만들어진 심상에 내가 현혹될 필요는 없습니다
질문1 : 자신을 수동적인 사람이라 보는 것도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인가요?
질문자 : 저는 저 자신을 약간 수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저 스스로를 수동적인 환상이라고 보지 않는 연습을 해야 되는 것인 거죠? 근데 수동적인 게 있고 능동적인 게 어떤 건지에 대한 감도 잘 안 잡히는 것 같은데 그 차이가 궁금해요. ‘어떤 사람이 수동적이다, 능동적이다.’ 라고 할 때, 저는 능동적이라고 하는 거는 ‘항상 먼저 생각해야 되고, 먼저 앞서서 생각해야 되고, 항상 무언가를 잘 생각해내야 한다 ‘라고 생각하고 그게 능동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그걸 잘 못하니까 나는 수동적인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래 질문은 ‘어떻게 하면 능동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였는데 이 질문 또한 환상으로 보는 거죠?
정화스님 : 기본적으로 모든 생각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분석적 사고는 기억정보를 토대로 만들어진 사고들이에요. 굉장히 내가 능동적으로 하고 있는 것조차도 기억정보가 만들어놓은 환상이에요. 수동이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둘 중에 내가 수동적인 것을 능동적이라고 색깔만 바꾸면 수동적인 게 능동적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되어 있어요. 이 기억정보를 전환시키지 않으면 사람들이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이 굉장히 어려워지는 거예요. 아까 말한 대로 존재성은 지금 여기를 사는 것하고 기억정보를 통해서 세상을 해석하는 두 부위가 굉장히 적의적절하게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지금 제가 여러분을 보는 것은 거의 다 제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이에요. 심상이에요. 그리고 이 심상에는 심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감정이 거기에 개입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떤 물건이 어떻게 보이는 거예요. 심상과 감정이 붙는데 만들어진 심상에 현혹되지 않는 마음을 만드는 것을 ‘수행’이라고 해요. 근데 이미 기억정보는 우리한테 쌓여 있어요. 내가 과거에 경험했다, 안했다는 아무 의미 없어요. 내 안에 쌓여있는 기억정보는 이미 그렇게 있는 거예요. 그것을 통해서 지금 들어오는 정보나 내 몸의 상태를 가지고 심상을 만들어요. 그리고 심상을 만들 때 거기에 감정이 개입될 필요가 있으면 감정이 개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전부 다 자기가 만든 심상이에요. 이것을 ‘내가 만들었다’라고 빨리 생각하는 것이 첫 번째고요.
그 다음 두 번째가 감정의 깊이가 커져가지고 다스릴 수 없을 때는 빨리 90초를 그냥 가만히 견디고 있는 거예요. 그런 다음에 ‘만들어진 심상에 내가 현혹될 필요가 없다’라고 하는 생각을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만들어진 심상에 현혹될 필요가 없는 그것이 기억으로 계속 심어져요. 그렇게 해서 일어난 심상에 대해서 좀 편해져요. .이미 일어난 심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요. 그 심상이 안 일어나길 바라는 것은 쓸데없는 생각이에요. 거기에는 수동적인 것도 없고 능동적인 것도 없고 그냥 그렇게 되면 그렇게 나와가지고 이러한 일들은 나는 능동적이라고 말하고 이러한 일들은 수동적이라고 말하는데, 이미 안에서 거의 수동적으로 심상을 만드는 거죠.
그리고 아까처럼 능동적으로 끼어든다는 입장에서 잘못해놓으면 그 사건을 잘 만드는 게 아니고 내가 갑으로 뭔가 하고 있는 것처럼 변질되는 수가 많아요. 그래서 어려워요.
질문자2: 해야할 일들이 많아져서 부담스럽고 지칠 때 어떻게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질문자 : 활동을 하면서 해야할 일들이 많아지는데, 이제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되고, 시간적으로도 부담이 되고 지칠 때도 있는데, 이것들을 어떻게 하면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런 게 궁금합니다.
정화스님 : 지치고 힘들면 쉬는 것 외에는 즐겁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몸이 지치면 바로 “짜증 난 생각을 하세요.”라고 말해요. 지치지 않는데 짜증 난 생각을 하는 것은 자기 이외의 사건들이 내 생각대로 일어나기를 원하는 거예요. 이것은 그냥 ‘세상을 짜증 나게 살겠다’라고 하는 말이랑 똑같아요. 몸이 많이 지쳤다는 그것하고 관계없어요. ‘몸이 너무 힘듭니다’에요. 그러면 그냥 쉬어야 돼요. 그럴 때는 말하고 또 그냥 쉬는 연습을 해야 돼요. 다른 사람이 ‘저 애는 맨날 쉬어’ 그래도 그러든 말든 편하게 쉬어야합니다. 신체적 조건이 다르니까요.
내가 쉴 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 것에 대한 것은 그 사람들 몫이니까 ‘그 사람들이 내가 쉬고 있는데도 잘 봐주기를 바란다.’는 되지도 않는 일이기 때문에 안 바라는 훈련을 해야 돼요. 그런데서 오는, 이익은 아니지만 불이익 같은 상황은 그런대로 받아들이는 신체가 돼야 해요. 근데 그 불이익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 내가 지금 힘을 써서 하잖아요? 정도가 넘으면 그다음부터는 이상해져요. 그래서 빨리 쉬어야 돼요.
(같은 상황이더라도) 둘이 똑같지 않은 거예요. 한 사람은 한 시간만 하면 나는 그런 몸이 되고, 한 사람은 세 시간 해도 괜찮은 몸이 되는데, 세 시간 한 사람이 ‘너는 왜 그래?’라고 말하면 말이 안 맞는 것이죠. 그럼 한 시간 정도 되는 사람은 ‘난 한 시간만 하면 너무 힘들어. 네가 뭐라 하든지 간에 나는 쉬어야 돼.’라는 것을 자꾸 주지시켜줘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도록 돼야 합니다. 마치 ‘내가 마음만 먹으면 세 시간 할 수 있어’라고 착각을 하는데 일주일 지나면 그다음부터 ‘여기서 계속 공부를 해야 되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어있어요. 그렇게 할 필요 전혀 없습니다.
정리_청년공자스쿨 스페셜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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