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읽기의 어려움
읽다만 책들이 쌓이는 과정
읽기 어려워서 초반에, 혹은 중간쯤 읽다가 포기한 책들이 있다. ‘읽기 어려운 책’들은 어떤 책들일까?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내용 자체가 어려운 책들이 있다. 이를테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같은 책들은 시작부터 한 걸음 떼기가 어렵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이라는 낱말로 본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제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존재’라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서 당혹스러움에라도 빠져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우선 무엇보다도 다시금 이 물음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일깨워야 할 필요가 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구체적으로 정리작업하는 일이 이 책이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을 모든 개개의 존재 이해 일반의 가능한 지평으로 해석하는 것이 이 책의 잠정적인 목표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옮김, 『존재와 시간』, 까치, 13쪽
인용한 글은 『존재와 시간』의 ‘들어가는 말’에 해당하는 글의 일부이다. 해당 글은, ‘서론 격의 해설을 필요로 한다’로 끝난다. 그리고 곧장 ‘서론’이 이어지는데, 말하자면 이 글은 ‘서론’의 ‘서론’인 셈이다. 책 전체를 아우르는 ‘문제의식’이 집약된 부분인데, 그조차도 알쏭달쏭해서 단번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우리는 ‘존재’라는 말을 정말로 잘 이해하고 있는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 짧은 한 문단의 글 안에도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이 가득하다.
혼자서 이 책을 읽어나간다면 어떨까? 각자의 의지에 따라 읽는 것 자체는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내용을 풍부하게 생산하며 읽어나가는 건 대부분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몹시, 대단히 높다. 본인이 철학 학부 졸업생 수준의 지식을 갖추었더라도 마찬가지다. 물론, ‘책’은 본질적으로는 ‘혼자’ 읽는 것이다. 누구도 나를 대신해 읽어줄 수는 없다. 문제는 혼자 읽고 난 다음이다. 읽으면서 생긴 의문, 아니면 읽었으나 뭘 읽었는지 알 수 없는 난감함, 무언가 가슴에 맺히는 건 있는데 혼자서는 끌어낼 수 없는 갑갑함 같은 것들이 문제다. ‘혼자서만’ 읽는다면 그러한 의문, 난감함, 갑갑함들이 매번 읽기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게 되는데, 그런 장애를 서너 번만 만나도 책을 덮게 된다. 그래서 혼자 책을 읽다보면 자주 패배하게 된다. 책장엔 읽다만 책들이 한가득 쌓이고 만다.
변신의 책읽기
그런 패배를 수차례 겪고 나면 다음부터는 ‘읽히는 책’만 읽게 된다. 물론 그런 책들이 가진 장점이 없는 건 아니다. 게다가, ‘책읽기’란 상대적이어서 어떤 사람에게는 ‘읽히는 책’이 다른 사람에게는 ‘안 읽히는 책’이 되기도 한다. 어쨌든, ‘읽히는 책’만 읽으면 어떻게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늘 같은 자리에 머무르게 된다. ‘읽히는 책’이라는 게 그렇다. 나에게 불편하지 않고,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책이라야 잘 읽히는 법이니 말이다. 그러면 결국 원래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감정만 계속 두터워질 뿐 ‘나’라는 인간 자체의 성질이 바뀌지는 않는 것이다. 이게 극한으로 가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꼰대’라고 부른다.
‘읽히는 책’의 함정엔 다른 것도 있다. 이를테면 ‘책읽기’라는 행위가 정보의 습득에만 머무르게 되는 함정이다. 나는 ‘책읽기’가 주는 최고의 기쁨은 ‘변신’에 있다고 생각한다. ‘변신’이란 뭘까? 달리 말하자면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이다. 가장 쉬운 예로는 소설 읽기가 있다. 중년 남자가 사랑의 격정에 휩싸이는 유부녀(안나 까레니나)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외계 행성에 파견된 에큐멘 사절단(어둠의 왼손)이 될 수도 있다. 이건 영상으로 표현되고, 고정된 시간축에 따라 흐르는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묘미다. 여전히 문자로만 구축된 ‘이야기’가 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리고 이건 단지 ‘소설’에만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니다. 철학자가 수백년 전에 쓴 철학책을 읽을 때에도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강의실에 앉아 칸트의 강의를 듣는 학생도 될 수 있고, 1968년 거리의 투사가 될 수도 있다. 그 뿐인가, 시의 세계에 들어가면 떨어지는 가을 낙엽이 될 수도 있고, 고성(固城)의 벽돌 한 장이 될 수도 있다. ‘책읽기’가 어떤 점에서는 마술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이러한 ‘변신’을 유도하는 능력 때문이다. 이런 책들은 대개 처음엔 낯설고, 인물의 이름을 익히기가 어렵고, 논리의 진행이 파악되지 않는다. ‘변신’은 쉽지 않다.
그래서 가장 익숙한 형태의 ‘읽기’로 되돌아오고 만다. 가장 익숙한 형태의 읽기란 어떤 것인가. 소설이라면 ‘스토리’를 파악하는 데만 머무르고, ‘철학책’이라면 (그게 가능하다면) ‘요점’만 찾아내고 마는 식이며, 역사책이라면 ‘그 시절에 그런 일이 있었지’ 하는 정도로만 ‘시큰둥’하게 읽고 치우는 식이다. 책을 쓰는 사람과는 별개로 어떤 책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 철저하게 읽는 사람의 몫이다. 기왕 읽는 책이라면 빈곤하게 읽기보다는 풍요롭게 읽는 편이 좋지 않을까?
어떻게 책읽기를, 공부를 풍요롭게 할 것인가
함께 읽으면 된다. 어떤 책이 유명해지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그 책을 읽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그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책이 생산하는 ‘말’이 많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함께 읽기’는 그 과정을 작은 규모로, 의식적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책의 내부로 함께 들어가서 이런 저런 말들을 덧붙여 나가보자. 한 문장을 두고 두 시간, 세 시간 떠드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 다음 모임을 준비하면서 각자는 또 얼마나 많은 말들을 만들어 낼 것인가. 안정적으로 조성되어 있는, 관성에 따라 살아가는 ‘나’가 ‘변신’하는 순간이다. 하나의 두뇌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지평으로까지 나갈 수도 있다. 함께-책-읽기가 그렇게나 재미있다.
‘변신’하는 건 비단 그걸 읽고 있는 ‘나’와 ‘너’ 뿐만은 아니다. 어떤 책이 ‘고전’이 된다는 건 단지 그 책이 유명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러 사람이 읽고, 여러 이야기들이 오가기도 하지만, 특정한 조건에서 이전과는 다른 책으로 ‘책’이 가진 성질 자체가 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책이 품은 잠재성이 매번 새로 태어난다. 그런 책이 가진 생명력은 수백년, 수천년을 간다. 여전히 자신의 잠재성을 완전히 펼쳐내지 못한 책들이 있다. 내가, 우리 모임이 그걸 펼쳐낼 수도 있다. 잘만 되면 정말 근사한 일이다. 잘만 된다면... 말이다.
독서 모임을 만들어도 좋고, 여러 인문학 단체들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들어가 보는 것도 좋다. 비대면 독서모임을 만들어 봐도 좋겠다. 겪어본 적 없는 펜데믹 사태 때문에 흉흉한 시절이지만, ‘하던 대로’ 하던 일들이 멈춘 지금이 사유가, 지성이 활성화 되는 순간이다.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펜데믹 때문에 가지 못해 아쉽다는 마음이 들 정도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부디 시작하길 바란다. ‘함께-책-읽기’를 말이다.
글_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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