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조금 더 자유롭게 살고 싶다
- 바로 지금이 철학할 때
나는 '철학'이 인간사에 가장 밀접한 실용학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보고 듣고 겪는 일들 중에서 사유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매번 그렇게 '사유'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는 것이 팍팍해질수록 저마다 '철학적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는 것이 어렵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잘 돌아가는 '삶'에서는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아무 의문없이 지속되는 삶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희로애락'이 그렇고, '생로병사'가 그렇다. 삶의 각 국면들마다 기가막힌 '어려움' 한 둘쯤은 늘 있게 마련인 셈이다. '철학'은 다름아니라 바로 그러한 '필연적 어려움' 속에서 태어난다.
삶에서 마주치는 '어려움'들 덕에 우리는 멈출 수 있다.(코로나가 세계를 멈춘 것처럼) 이것은 마치 '통증'과 같다. 지금까지의 행동이나 생각을 반복하지 않으면 더 큰 고통이 몰려오거나, 파괴되고 말 것이라는, '삶'이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신호인 것이다. 경고 신호를 무시하고 동일한 행동을 반복한다면 동일한 아픔을 계속 겪거나,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손상을 입게될 것이다. '연애'를 생각해 보면 쉽다. 동일한 패턴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걸 반복한다, 헤어지면 아프다, 나중에는 아픔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다, 애정은 사라지고 연애의 쾌락만 남는다. 회복 불가능한 손상의 패턴이다. 어려울 때, 아플 때, 괴로울 때, 절망적일 때, 그렇게 안 좋을 때야말로 가장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하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가 '성찰'을 시작할 가장 좋은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어렵다. 기쁨에 가득차 있을 때, 즐거울 때는 그 때대로 '성찰'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기쁘기 때문에, 즐겁기 때문에 '성찰'이 크게 필요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 순간을 만끽하는 편이 감성적 측면에서 훨씬 더 좋을 수 있다. 그 반대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 삶을 '성찰'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이유는 '자기연민' 때문이다. 다른 동물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자기객관화'가 가능한 동물이다. '자기 자신'을 마치 '객체'로 놓고 관찰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 '자기객관화'의 능력 덕분에 성찰이 가능하고, 철학적 사유가 가능하다. 그런데 동시에 바로 그 능력 때문에 '자기연민'이 일어난다. 괴로움을 겪을 때, '괴로움' 그 자체만을 느낀다면 어떨까? 괴로우니까 온 힘을 다해서 그 상태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가 않다. '괴로움'을 겪고 있는 자기 자신이 불쌍하다. 너무 가엽다. 여기에 '세상의 고통을 모두 지고 있는 주인공의 고뇌'랄지, '상처받은 비련의 주인공' 같은 '판타지'까지 결부되면 몹시 기묘한 감정이 생기고 만다. '자기연민'에 더불어서 자기 자신을 '판타지'의 주인공으로 여기는 '쾌감'이 동반되는 것이다. '괴로움'과 '쾌락감정'이 뒤섞인 이 상태에 빠지고 나면 '성찰'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진다. '쾌락감정'이 성찰에 의한 '삶의 전환'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괴로움', '자기연민', '쾌락감정'이 뒤섞인 '마음의 늪'으로 빠져들지 않으려면 '괴로움'이 닥쳐올 때야말로 온 힘을 다해 제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면 '성찰'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뭐가 문제지?', '왜 이렇게 된거지?' 같은 의문이 마음 속에 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다. 저런 질문에 답하는 것은 아주 쉽다. 괴로움의 원인이 된 문제가 대부분 뻔히 보이니까. '내가 그때 이러이렇게 했어야 하는 건데'부터 '그걸 하지 말았어야 했나'까지 표면에 떠오르는 여러 답들이 있을 테고,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런 답들 중에 한두 가지를 골라잡고는 쉽게 결론을 내리고 만다. 그런데 '성찰'을 하려면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아야 한다. '표면'과 대비되는 '심층'으로까지. '내가 그때 이러이렇게 했으면 됐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런 결정이나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내 삶의 배경은 무엇이었지?', '그런 배경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지?', '지금의 나는 동일한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까?', '같은 판단을 내린다면 또 이 괴로움을 겪을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하지?', '도대체 '나'는 어떤 존재지?'. '성찰'이란 자기 자신이 자기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이런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 아니 차라리 더욱 심층적인 '질문'들을 만들어(향해)가는 과정이다.
'철학'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어려움' 속에서 태어난 학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역사상의 이름난 철학자들이 '사유'한 가장 강력한 동기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직접 대면한 인생의 '어려움',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그런 '철학'들을 남긴 것이다. '철학'이 단지 '우주의 신비'에 대한 '형이상학적' 답변을 내리고자 한 학문일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철학자도 '진리의 탐구자'이기 이전에 '삶'의 장에 내던져진, 우리와 같이 괴로움, 어려움, 슬픔을 겪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뜬구름 잡는 것처럼 '느껴지는') '형이상학'은 ('삶의 기술'로서의) '윤리학'을 튼튼한 토대 위에 세우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주와 세계의 질서가 이러하니,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어느 철학자가 주장했다고 치자. 이때 그가 정말 하고 싶은 말, 자신이 겪고 있는 삶의 문제와 가장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말은 쉼표 이후의 말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속에 있는 것이다. '철학책'들은 철학자들 각자가 자신의 삶에 제출하는 답안지이며, 우리에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들이 던지는 문제에 더 나은 답을 내리기 위해 펼쳐보는 '인생의 참고서'인 셈이다.
무술의 고수와 이제 막 도장에 다니기 시작한 무술 '뉴비'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고수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다. 자신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언제 그 기량을 발동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필요한 많지도 적지도 않은 힘만을 발동시킨다. 하수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는 기술도 사용하지 못하고 당하고 만다. 또 불필요한 상황에 과한 힘을 써서 정말 힘을 써야할 타이밍에서 도망조차 치지 못한다. '삶의 고수'와 '하수'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 감정이 어떤지, 지금 정신을 차리고 '성찰'을 시작해야 하는지, 주어진 기쁨을 충분히 만끽하면 되는지 어떤지를 고수는 안다. 하수는 자기 감정이 주는 고통과 쾌락에 취한다. 기쁨을 만끽해야 하는 타이밍에서 '진지한 성찰'을 시작하여 기쁨조차 만끽하지 못한다. 무술의 고수가 고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수련의 수련을 거듭했기 때문에, 하루도 빠짐없이 '무술'을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삶의 고수'도 그렇다.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자신이 겪었던 삶의 문제들을 마음속에 늘 품고 다녔기 때문에 그는 '삶의 고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철학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다른게 아니다. 매일 같이 일어나는 사소한 다툼들, 짜증, 분노, 슬픔, 괴로움 같은 정서 너머를 인생의 참고서의 도움을 받아가며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 생각들을 마음에 품은 날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슬픔의 정념들'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보다 조금 더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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