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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리포트

[쿠바리포트] 코로나를 ‘뻬스끼사’ 하라 (1) – 쿠바산 타가진단 앱

by 북드라망 2020. 6. 22.

코로나를 ‘뻬스끼사’ 하라 (1) 

– 쿠바산 타가진단 앱



 

잠든 자들의 도시


조용하다. 뜨겁다. 아무 일도 없다. 요즘 내가 보는 쿠바의 모습이다. 전국 격리 조치가 실행된 지 벌써 두 달이 꽉 차게 흘렀다. 3월 말에 닫혔던 국경은 6월에도 닫힐 예정이고, 매연을 뿜는 올드카로 소란스러웠던 거리는 완벽하게 비워졌다. 살 태우는 햇볕 아래서 시간만 증발하고 있다. 지금까지 쿠바의 코로나 확진자는 2,000명을 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정말 선방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죽음의 전운이 감도는 고요는 아니고, 기약 없이 영영 잠들어버린 도시의 고요다. 이 집단 수면 상태에서 시간의 흐름을 유일하게 알려주는 것은 조금씩 늘어나는 확진자 통계와 날씨뿐이다. 올해 특히 변덕스러웠던 날씨는 몇 번 추위를 타더니 결국 완연한 여름으로 넘어갔다. 이 더위가 바이러스까지 녹여버린다면 좋겠지만, 거기에 희망을 걸 만한 데이터는 아직 보지 못했다.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는 동안 내 마음도 변화의 굴곡을 탔다. 멍 때리기, 화들짝 놀람, 갇혀버렸다는 분노, 자포자기하는 동굴의 시간, 그리고 다시 멍 때리기. 감정이 한 바퀴를 돌자 일상도 안정되었다. 처음에는 고삐 풀려 날뛰는 자유시간에 당황한 나머지 안 하던 짓들을 이것저것 했었는데 이제는 고정된 생활 패턴이 생겼다. 우선 오전 스케줄은 뻬스끼사를 위해 비워져 있다. 활동을 마친 후에 열두 시가 채 못 되어 집에 돌아오면, 우선 오염되었을지도 모르는 교복과 마스크를 몽땅 벗어서 빨래통에 넣고 휴대폰 및 소지품을 소독한다. 그 후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서 잠시 쉬다가 점심을 대충 때운다. 오후 두 시 즈음에는 학과 공부를 시작한다. 저녁을 먹은 후 공부를 계속 하거나 쟁여두었던 책을 꺼내 읽는다. 그리고 다시 내일의 뻬스끼사를 위해 잠을 잔다.


뻬스끼사 풍경


뻬스끼사, 현재 내가 유일하게 외부와 만나는 시끄러운 시간이다. 잠들어버린 공동체도 가까이에서 보면 목소리 볼륨만 낮아졌을 뿐이고 여전히 재잘재잘, 별별 일을 다 떠들고 있다. 바이러스도 쿠바인들을 입 다물게 만들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그게 고맙다. ㅋㅋ



뻬스끼사-아침 10시에 울리는 ‘타가진단 앱


뻬스끼사를 지금까지 자주 언급했지만 이게 정확하게 무슨 활동인지는 설명하지 않은 것 같다. 스페인어를 쓰는 사람들도 쿠바 의료 체계의 맥락을 모르면 이 단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Pesquisa의 뜻은 말 그대로 ‘조사, 탐구’다. 그런데 쿠바 의료는 이 단어를 차용해 여기에 ‘찾아가는 문진’이라는 좀 더 특수한 뜻을 부여했다. 의사들이 조사해야 하는 것은 환자의 건강이니까 조사가 곧 문진이라는 점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문진은 진료소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의사가 찾아간 주민들의 집 문턱이나 동네 길거리에서 벌어진다. 다시 말해서, 이 단어에는 환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직접 조사하러 간다’는 행동력과 의지력이 담겨 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의 모습 위에 노약자 계층을 살피러 다니는 사회복지사와 호구조사하는 공무원의 모습을 겹쳐본다면 뻬스끼사를 하는 쿠바 의사의 아우라를 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뻬스끼사는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다. 전염병이 돌 때 한다. 콜레라나 지카, 뎅게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릴 때면 교육부와 보건부는 (아바나의 의대는 교육부가 아니라 보건부 소속이다) 그 지역에 있는 의대의 학사일정을 모두 멈추고 학생들을 길거리로 내보낸다. 의사들만으로는 지역 전체를 커버할 수 없기 때문에 의대생을 동원하는 것이다. 즉, 뻬스끼사는 테크놀로지와 자본은 부족하지만 인력만큼은 넘쳐나는 쿠바가 전염병에 맞서 싸우는 방식이다. 쿠바 맞춤형 대응책이랄까? 수 천 명의 노동력을 갈아넣고 발품까지 팔아야 하는 뻬스끼사가 한참 구식으로 보이겠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최근에 한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맞이하여 최신 대응책이라고 나온 자가진단 앱이랑 다를 게 없다. 오늘은 기분이 어떠신가요? 열이 있나요? 기침이 있나요? 감기 증상이 있나요? 본인 외에도 가족이나 이웃 중에 이런 증상이 발현된 사람이 있나요……? 대부분 ‘노’라고 말하지만 아주 가끔씩 ‘예스’를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다른 알고리즘의 질문들이 주르륵 이어진다. 증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마지막으로 체온을 잰 것이 언제인가요? 최근에 여행을 했었나요? 구토, 어지러움, 출혈 같은 다른 증상도 있나요?


이렇게 학생이 정보를 수집해서 돌아가고 나면, 뽈리끌리니꼬에서 마스크와 장갑으로 무장한 의사와 간호사가 문제의 가정집으로 출동한다. 이때 어설프게 탈출을 시도하더라도 금방 잡히게 되어 있다. 쿠바에서는 신용카드 기록이나 핸드폰 사용내역을 쑤시지 않아도 추적가능하다. (애초에 신용카드의 존재 자체가 없을 뿐더러 핸드폰은 요금이 비싸서 사람들이 잘 안 쓴다.) 교통수단이 끊긴 상황에서는 이동수단이 두 발 밖에 없기 때문에 뛰어 봤자 벼룩인 데다가, 어떤 동선을 그리든 이웃들의 눈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쿠바에서 개인의 사생활을 쥐락펴락하는 진정한 권력자는 ‘빅브라더(Big brother)’가 아니라 ‘베씨노(Vecino : 이웃)’들이다. 심지어 이 베씨노들은 뻬스끼사에 자가진단 앱에는 없는 신기능을 추가시킨다. 바로 거짓말 탐지 기능이다. 때때로 아파도 아프지 않다고 거짓말을 하는 환자들이 있는데, 문진자는 환자의 콜록거리는 목이나 좋지 않은 안색 같은 징후를 통해서 진실을 가늠해보려고 한다. 그럴 때는 이웃들을 따로 불러 물어보는 게 최고다. 옆집 숟가락 개수는 물론이요, 배탈난 시간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매일 아침 몇 천 명의 아바나 의대생들은 ‘아날로그 타가진단 앱’이 되기 위해 도시 전역을 빨빨 돌아다닌다. 주민들 역시 아침 10시마다 문을 두드리며 찾아오는 이 앱에 응답해야 한다. 내가 맡은 블록의 주민들은 처음에는 이 앱이 국산(쿠바산)이 아니라 중국산(사실은 한국산이지만 쿠바에서 아시아인은 무조건 중국인이니까)이라는 것에 조금 혼란스러워했지만, 여하튼 매일 빼먹지 않고 찾아오는 성의 덕분인지 문은 꼬박꼬박 열어준다. 똑같은 장소들을 매일 방문해서 똑같은 질문을 똑같이 반복한다. 졸지에 애인보다 더 자주 얼굴 보는 사이가 되고 말았으니, 얼굴은 물론이고 이름까지 슬슬 외우고 있다. 몇 주가 지나자 동일한 대화 패턴이 지겨워져서 급기야 이제는 질문 사이에 잡담을 조금씩 끼워 넣는 중이다. 어휴, 이렇게 나도 쿠바화가 되어가나 보다.



내가 뻬스끼사와 '웬수'된 사연


외국인 친구들은 내가 의무도 아닌 뻬스끼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바보 아닌가, 왜 정당하게 쉴 수 있는데 사서 고생을 하나? 혹은 쿠바의 의료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며 훌륭한 의사가 될 거라고 응원을 보낸다. 첫 번째 반응에는 나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그러게, 나는 그냥 쉴 팔자가 아닌가봐. 두 번째 반응을 들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훌륭한 의사라니, 내가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그런 명예를 바란단 말인가. 그리고 나도 뻬스끼사 싫어한다. 처음부터 뻬스끼사의 의도에 동의했기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한 건 아니라는 소리다.


말을 꺼내기에 앞서, 내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한다고 해서 뻬스끼사에 헌신하는 수많은 의료인들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는 것을 밝힌다. 요즘 쿠바 정부는 의대생들을 인터뷰하고 그 중 일부분만 따서 왜곡 보도를 하는 외신기자들에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러나 나 또한 뻬스끼사에 참여하고 있는 마당에, 그것도 작년에 뎅게까지 걸려가며 이 년 째 일꾼으로 동원되고 있는 차에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결국 쿠바 사회의 내부를 잘 모르는 외부인의 시선이라고 말한다면 반박하진 않겠으나 (어차피 나는 여기서 평생 살아도 외부인이다) 과장된 외부의 시선이 때때로 내부의 구멍들을 발견할 때도 있는 법이다.


나는 지금까지 뻬스끼사를 총 다섯 번 했다. 일주일 넘게 지속된 장기 뻬스끼사가 세 번이었고, 하루씩 현장 지원을 나간 게 두 번이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를 제외하면 모두 뎅게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작년에는 내게 할당된 동네에서 뎅게 모기의 습격을 받아서 문진자에서 대상자로 전락해버린 일도 있었다.


문진 대상자로 전락했던 나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내게는 쿠바 뻬스끼사의 성격이 강렬히 각인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비효율성’이었다. 정보 수집에 나선 의대생들은 집주소와 세대 구성원의 숫자, 나이, 이름, 그리고 증상의 유무 여부까지 종이에 다 적어야 한다. 50가구를 할당받으면 인구가 150명에서 200명까지 늘어나고, 종이가 앞뒤로 빽빽하게 꽉 찬다. 마지막에는 총합을 내어 꼰술또리오에 제출한다. 나로서는 전통적인 스페인어권 이름과 너무 다른 쿠바식 이름(‘유미시스레이디 Yumisisleidy’ 같은 이름)을 한 번에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어려움까지 겪어야 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매일 뻬스끼사를 할 때마다 동일한 정보를 매번 다시 적어서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실제로 문진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2할이라면 나머지 8할은 종이와 씨름하는데 쓰인다. 깐깐한 의사가 근무하는 어떤 꼰술또리오는 규격에 맞춰서 다시 깔끔하게 옮겨 적으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그런 규격이 마련된 종이를 달란 말이다.) 이 즈음되면 내가 종이인지, 종이가 나인지 모르겠다. 내가 의대생인지, 호구조사 다니는 ‘호구’ 공무원인지 모르겠다.


이럴 때면 저절로 한국 생각이 난다. 한국에서 뻬스끼사를 했다면, 내가 문진을 돌아야 할 구역의 주소와 가족 구성원의 정보가 표로 쫙 정리되어서 프린트 되었을 것이다. 나는 증상의 유무여부만 기록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정보가 완전히 디지털로 전환된 사회에서나 꿀 수 있는 꿈이다. 여전히 정보들이 수작업으로 유통되는 쿠바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 발품뿐만 아니라 ‘손품’까지 파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여전히 할 말은 남는다. 동네 호구 조사와 건강 정보는 가족 주치의와 간호사가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는 기본적인 작업 아닌가? 동일한 정보가 기록된 종이뭉치가 꼰술또리오 책장에 이미 산더미처럼 꽂혀 있는데, 왜 그걸 활용하지 않고 우리에게 거기에 종이뭉치를 또 추가하라고 요구하는 건가? 학생들이 의심 환자가 살고 있는 집주소만 체크해오면, 그 후에 의사가 기존의 진찰기록부를 참고해서 인적사항을 파악해도 뻬스끼사의 역할은 충분하지 않은가? (다행히 이번 코로나 발 뻬스끼사에서는 가족 구성원의 이름이 정보 수집 사항에서 제외되었다. 장기전으로 접어드는 싸움에서 의료인들의 피로도를 낮추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우리 뽈리끌리니꼬는 최근에 학생들이 불성실해지고 있다며 다시 이름까지 적어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에이씨 ㅠㅠ.)



'손품'을 팔아서 작성하는 뻬스끼사 문진표



그 다음으로 내 뒷목을 잡게 했던 것은 비협조적인 주민들의 태도였다. 주민들은 매일 찾아와서 열이 있냐고 물어대는 학생들을 몹시 귀찮아했다. 심지어 열이 있어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때로는 이웃까지 포섭해서 입을 맞췄다. 사실 그들 입장도 십분 이해가 되었다. 뎅게 의심 환자로 분류되는 순간 지정 병원에 의무적으로 격리되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식중독 및 다른 병들을 얻어올 정도로 입원실 관리가 좋지 않다고 한다. 나라도 가족이 있는 집에 남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뻬스끼사를 하는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뽈리끌리니꼬에서는 할당된 숫자를 채워오라고 달달 볶고, 주민들은 성의 없이 대답하거나 문을 안 열어주고, 이 사이에 낀 애꿎은 의대생들은 수업일수만 까먹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그들의 무기는 바로 통계 조작이다. 뻬스끼사를 하다가 지치면 대충 아무 숫자나 적어서 낸다. 주민들의 이름은 의사의 진료기록을 참고하거나 아예 멋대로 창조한다. 이 소소한 날조 현장을 몇 번 목격한 후로 나는 쿠바 정부가 발표한 통계 수치를 볼 때마다 두 번 생각하게 되었다.


작년 뻬스끼사를 하다가 뎅게에 걸린 날, 진통제를 맞으러 갔다가 병원에서 쓰러진 나는 결국 앰뷸런스를 탔다. 실려가는 동안 그간의 뻬스끼사 활동을 곱씹었더니 이미 고열이 올라온 몸 속에서 더 열불이 났다. 이렇게 엉망이라면 다음 번 뻬스끼사는 도저히 하고 싶지 않았다.


3월에 코로나 사태 초반을 지켜보면서 거부감은 더 커졌다. 쿠바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을 보내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코로나 불바다가 되던 때에도 당국에서는 별 움직임이 없었다. 공항 방역을 잘 하고 있다는 뉴스만 줄창 나왔다. 또, 국내에 코로나 확진자가 나온 후에도 교육 당국은 트위터에 “학교가 더 안전하니 휴교는 안 한다”는 희한한 코멘트를 남겨서 학생들을 웃게 만들었다. (학교 교문에 바이러스를 걸러내는 매직 필터라도 달았나?) 3월 말, 하루 만에 이 모든 말이 뒤집혔다. 국경과 가게, 학교가 모두 일시에 문을 닫았다. 의대생에게는 다시 길거리로 나가라는 콜이 들어왔다. 모기를 매개로 퍼지는 뎅게와 달리 사람 간에 전염되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뻬스끼사를 더 위험한 작업으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각자 마스크를 공수해야 했고, 수술용 장갑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마스크가 없으니 알아서 구해오라는 뽈리끌리니꼬와 마스크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학생들 사이에 갈등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이 와중에 나는 과연 이게 정말 가치 있는 일인가를 회의적으로 자문했다. 마침 비염이 심해져서 마스크를 쓰기 어려워지자 이를 핑계로 뻬스끼사 참석을 피했다.


그렇게 버티는 것도 이 주 뿐이었고, 결국 나는 다시 교복을 입었다. 하지만 내가 뻬스끼사로 돌아간 것은 단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병원의 청소 도우미를 뽑는다고 했다면 나는 차라리 거기에 지원했을 것이다. 위험 부담은 더 컸겠지만 최소한 내가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은 있었을 테니까.



뻬스끼사의 두 얼굴 : 저효율성과 고효과성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뻬스끼사를 대하는 내 감정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아무리 하기 싫은 뻬스끼사라도 두 달 가까이 하다 보니 예전에는 몰랐던 미묘한 맥락들을 발견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이 숨은 디테일들은 허술해 보이는 뻬스끼사가 어떻게 쿠바의 ‘전염병 퇴치 전략’으로 활약할 수 있었는지 결국 나를 납득시키고 말았다. 내가 비판해왔던 구멍들이, 구멍이 아니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생각처럼 크지는 않았던 것이다.


더 기막힌 것은 이 구멍을 땜질하는 원동력이 다름 아닌 나를 절망에 빠뜨렸던 ‘비효율적인 일처리’ 방식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보통 효율이 좋다고 말할 때 우리는 최소한의 자원을 들여서 최대한의 결과를 얻는 작업 방식을 뜻한다. 즉, 효율은 근본적으로 양화된 개념이다. 저효율은 아무리 ‘노오력’을 갈아 넣어도 밑 빠진 독에 쏟아지는 물 마냥 별 해결책이 안 떠오르는 가난한 삶의 풍경과 겹치고, 고효율은 손가락 하나만 까닥해도 거위들이 우르르 황금알을 낳는 놀라운 자본의 세계에 어울린다. 하지만 뻬스끼사에는 양적인 척도로 다 말할 수 없는 애매한 지점들이 있었다. 뻬스끼사의 방법론이 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라 해도, 쿠바라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가져오는 효과는 분명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들어가는 노동력은 여전히 어마어마했지만 어쨌든 뭔가가 굴러가기는 했다! 낮은 효율성이 높은 효과성으로 전환되는 현장을 지켜본 것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낯선 경험은 내 고정관념에 몇 개의 금을 내주었다.


뻬스끼사가 깨뜨린 내 첫 번째 고정관념은 다음과 같다. 기계적인 반복 노동도 충분히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효율성 없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속이 타는 것은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시간은 우리의 생명 자체이며, 절대로 대체불가능한 자원이다. 이런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면 내 소중한 노동력이 존중받지 못하는 기분이 든다. 거대한 기계의 부품 한 조각으로 전락해 의지 없이 끼워 맞춰지는 기분이 든다. 실제로 많은 현장에서 반복 작업은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배터리 같은 ‘저급 인력’으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쿠바는 의사나 의대생 같은 고급 인력을 이렇게 기계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즉 바깥의 시선으로 본다면 ‘낭비하는’ 것에 절대로 주저하지 않는다. 의료 인력을 국가의 노예처럼 다룬다는 미국의 히스테리컬한 비판에도 개의치 않는다. 쿠바에게는 완벽하게 타당한 이유가 있다. 지금 쿠바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 중에 가장 풍성하고 값싼 것은 바로 사람들, 즉 인력이기 때문이다. 자본을 들여 새로운 방역 인프라를 까는 것보다 지금 당장 수천 명의 의대생들을 길거리에 동원하는 게 쿠바의 현실에서는 더 빠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감염의 위험성에 노출된 채 조심하면서 길거리를 누비는 게 유쾌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역시, 이 편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사실 뻬스끼사는 의대생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작업이다. 한낱 ‘앱’조차 이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감염의 리스크를 감수하고 이렇게 지루한 반복 작업에 순순히 응할 ‘사람들’은, 결국 사람을 살리는 게 최우선이라는 의학의 대명제에 동의한 의대생과 의사들뿐이다. 혹은 그 명제에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시민들이다. 까뮈의 <페스트>에 나온 늙은 공무원 그랑은 보건대의 회계 역할을 자청하면서, 자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의사 리외에게 이렇게 답한다. “가장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한다는 건 뻔한 이치입니다.” 이 뻔한 이치를 받아들이면 비효율적인 반복 노동은 귀한 성실함이 된다. 이 가치는 자가진단 앱으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두 번째로 내가 새로 깨달은 사실은 통계가 반드시 언제나 정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신뢰도의 차원에서 통계는 물론 최대한 정확해야 한다. 그러나 숨은 환자를 잡아내는 게 목적인 현장에서는 통계 수치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오늘 문진을 돈 구역 사람들이 103명인지 203명인지, 그 숫자가 실제 머릿수에 부합하는지 아니면 자의적으로 부풀린 것인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어제는 ‘0명’이었으나 오늘은 ‘1명’으로 늘어났을지도 모르는 의심 환자의 존재다. 존재감 넘치는 이 ‘1명’을 찾아내기 위해서 모두가 쥐 잡듯이 블록 구석구석을 샅샅이 달려드는 것이다. 이 치명적인 숫자만 정확하게 나온다면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짐작컨대, 뽈리끌리니꼬에서 매일 학생들의 보고를 받는 의사들도 이 숫자가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이들도 한 때는 우리처럼 꾀부리는 학생이었을텐데. 그러나 이들은 굳이 진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다. 앞의 숫자가 뒤의 숫자와 안 맞는다고 뭐라고 하지 않는다. 의사들이 믿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이 숫자를 산출해내기 전까지 집집마다 팔아야했을 학생의 발품이다. 이 학생이 투덜대면서도 매일 같은 구역을 방문하면서 그곳 주민들과 형성해왔을 관계다. 이제 이 학생은 자기가 맡은 구역에서 환자가 발생한다면 어떤 의사보다 가장 먼저 알아차릴 준비가 되어 있다. 어제는 멀쩡했던 아파트 3호 할아버지가 오늘 아침 땀을 흘리며 기침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깜짝 놀라서 보고할 것이다. 이때 그의 종이에 쓰인 숫자 ‘1’은 WHO의 통계보다 더 정확하다.


세 번째로, 모든 주민들을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매일 같이 뻬스끼사를 하겠다는 야심찬 결정은 실제로 효과를 보았다. 나는 처음에 이것이 가장 비효율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뎅게 바이러스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람들 사이의 접촉을 최대한 줄여서 감염 확률을 줄여야 막을 수 있는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주민들 전체를 매일 방문할 필요가 있을까? 기관지 문제가 있는 주민들이나 혼자 사는 노인들 위주로 뻬스끼사를 돌고, 다른 일반적인 주민들은 증상이 나타나면 직접 병원에 전화를 하도록 하면 어떨까? 왜 주민들이 능동적으로 병원을 찾도록 격려하지 않고, 의사들이 일일이 돌봐줘야한다는 의존성을 키우는 걸까? 여전히 나는 나의 의문들이 무효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의사와 의대생들이 ‘전 국민’을 방문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쿠바에서 한 번쯤 이런 질문을 환기삼아 던지는 것도 좋다.


그렇지만 이 어마어마한 조치는 확실히 주민들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것은 의료 시스템이 늘 주민들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끊임없는 메시지의 전달이었다. 코로나든 뭐든 간에 건강에 무슨 일이 생기면 아침마다 방문하는 ‘타가진단 앱’에 접속하라는 간단명료한 해결책의 제시였다. 주민들은 현 상황에 대해 궁금한던 점들을 아침에 오는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는 문진만 하는 게 아니라 새로 업데이트 된 바이러스 소식을 전했고, 약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럴수록 내 눈에도 주민들이 점점 뻬스끼사 활동에 의지하는 게 보였다.


특히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협조적으로 돌변한 주민들의 태도였다. 사람들이 짜증낼 까봐 일부러 싱글싱글 웃으면서 문을 두드리는데, 그러면 주민들은 나보고 고생한다며 같이 웃어주고 또 가끔 주스도 준다. 헐…… 뎅게 때와 태도가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확실히 코로나가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언젠가 코로나가 뎅게처럼 풍토병으로 완전히 정착하고 나면 그들은 또 다시 귀찮다고 성질을 낼 테지만, 지금은 어쨌든 감사한 마음이 더 큰 것 같았다. 좋은 의사가 되려면 환자들의 감사에서만 보람을 찾아서는 안 되겠구나. 때로는 환자들의 미움을 사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 사람의 태도란 손바닥 뒤집듯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물론 뻬스끼사가 완벽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정말 아니다…) 나는 여전히 관료주의 보고 체계가 싫고, 현실과 맞지 않는 지침이 내려오면 짜증을 낸다. 고인 물이 썩기 마련이듯 뻬스끼사의 틀은 계속 업데이트가 될 필요성이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내가 목격한 최고의 효과성은 뻬스끼사의 방법론이 아니라 커뮤니티의 존재 자체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커뮤니티에는 바이러스의 공포를 걸러내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거름망이 있는 것 같았다.  글이 길어질 것 같으니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해야겠다. 사실 내가 뻬스끼사에 대해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 뒷편에 나온다. (계속)


글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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