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너머의 세계(2)
- 코로나바이러스,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놈
바이러스는 어디 안 간다
누구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 기술만 믿고 오만방자해진 인간에게 자연이 코로나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또, 반대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유행 따라 돌아오는 자연스러운 감기의 일종이며, 높지 않은 사망률 4% 앞에서 우리만 괜히 패닉하는 거라고.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를 감기로 협소하게 정의한다 하더라도 그로 인한 배고픔과 죽음의 고립은 감기로 소급되지 않는다. (이것을 단순한 유행병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이미 소수다. ‘죽음다운 죽음’을 보장할 의료체계와 충분한 식량을 보유한 공동체가 지구상에 소수이기 때문이다.) 또 코로나가 정말 자연의 메시지라 하더라도, 그래서 사피엔스 종이 옛적에 말아먹은 겸손의 덕목을 기적적으로 다시 곱씹어보게 되더라도, 그 자연이 해결책까지 건네주리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자연은 모든 열린 가능성의 총체일 뿐이다. 인간도 바이러스도 이 자연 속에 존재한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여파로 수많은 인간이 굶게 되든, 혹은 백신 개발로 인해 코로나바이러스가 자취를 감추게 되든 자연은 관심이 없다.
나의 입장은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를 대립적으로 여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전염병과 개체의 굶주림, 그리고 신체의 죽음은 모두 자연에서 잉태되는 사건이지만, 이런 사건들은 현실 속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가령, 전염병은 철저하게 문명적이다. 사피엔스가 밭을 갈고 성을 쌓는 정착 생활을 하면서 인구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기 전까지, 전염병은 우리 종에게 그렇게 큰 위험이 되지 못했다. 사피엔스는 늘 100명이 넘지 않는 작은 부족 단위로 방랑을 했고, 이런 소규모 집단에서는 유행병이 크게 번질 수 없었다. 그 집단이 전염병으로 소멸할 때 동시에 바이러스도 함께 전멸했기 때문이다. 또, 당시에는 가축을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을 모두 숙주로 삼는 공통인수 바이러스가 발전할 일도 없었다. 전염병의 창궐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이른바 ‘문명’이라는 삶이 방식을 택하면서 시작되었다.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구석구석 연결된 거대한 문명을 탄생시킨 21세기이니, 바이러스의 도래는 더 화려해질 예정이다.
식량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가 겪는 배고픔은 병든 동물의 실패한 사냥보다 더 복잡한 차원의 문제인데, 왜냐하면 인류는 전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충분한 식량 생산력을 갖춘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식량 분배의 실패로, 우리 문명의 실패다. 죽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죽음을 마주할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아플 때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현대 의학을 찾으라 배웠고, 이번 사태처럼 현대 의학이 길을 잃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공포 없이 받아들이는 훈련도, 외부로부터의 고립을 내면의 고독으로 바꿔내는 영성도 없었다.
결론은 집단적 배고픔이라는 병도, 고립이라는 죽음도, 그리고 공통인수 바이러스조차도 사피엔스가 지금까지 걸어온 궤적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번 상황이 발생한 맥락들과 이미 예전부터 같이 살아오고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져서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이 아니다. 늘 우리 옆에 있었고 또 있을 것이다. 백신으로 쫓아 보내더라도, 바이러스가 정말 어디로 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와 함께 고립 상태와 굶주림도 물론 계속 반복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손으로 변화의 물꼬를 내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에게 사태를 해결할 완전한 능력이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생물인 이상 우리도 언제까지 움츠러든 채로 있을 수만은 없다. 앞으로 생활의 질서는 필연적으로 바뀔 것이다. 거기에는 ‘전염병 예방법’이라는 메커니즘이 전제로 깔리게 될 것이다. 한국처럼 최첨단 전문가 관리 시스템으로 방향을 잡든, 쿠바처럼 모든 움직임을 제한하면서 사회의 ‘절전모드’를 실행하든 말이다. 우리들은 이런 변화의 트렌드에 적응하고 또 저항하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계속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바이러스와 공존 가능한 자유의 형태를 궁리할 것이다. 공부하는 법, 춤을 추는 법, 연애하는 법, 노는 법……
이 가운데에서도 먹는 법과 죽는 법의 자유를 확보하는 게 가장 시급하다고 손 번쩍 들고 말하겠다. 산 사람은 제대로 먹을 자유가 필요하다. 이는 식량이 상시적으로 부족한 곳이 새로운 네트워크를 통해서 식량을 보장받을 자유만큼이나, 식량 과잉인 곳에 사는 개개인들이 식탐을 부리지 않을 자유도 내포한다. 또,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돌연변이를 가속화시키는 축산업과 환경파괴의 상황 검토 또한 폭넓게 재고되어야 한다.
죽는 사람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지향해야 한다. 불가피한 죽음의 길목에서 우리는 외부의 의료기기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고요함에서도 도움을 구할 수 있다. 이것은 지성의 힘없이는 불가능하다. 밥벌이를 위한 노력과 죽음에 대한 사유는 매일 반복해서 실천되어야 한다. 너무 당연해서 잊고 사는 사실인데 코로나 덕분에 다시 빛을 본다.
사는 것과 살리는 것
바이러스는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된다. 그렇지만 나는 전 세계에 쏟아져 나오는 뉴스를 보면 아직도 꿈속에 있는 기분이 든다.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갈 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내가 삼 년 전 뉴욕에 있을 때 살았던 동네 잭슨 하이츠에서 가까운 엘머스트 병원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죽은 사람들로 가득하고, 또 작년 여름에 친구와 함께 두 발로 가로질렀던 마드리드가 적막으로 감싸여 있다. 몇 백 명의 사람들이 땡볕에 길게 줄을 선 아바나의 마켓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데도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이 모든 곳의 최전선에는 의료진들이 있다. 어디에나 있다. 병원 응급실에도 있고, 시위대 앞에도 있고, 장례식장 관에도, 무덤 속에도 있다. 이탈리아에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기 시작했을 때 방송에서 열악한 의료 현실을 폭로했던 의사는 그 방송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망했다. 방호복이 없다면 쓰레기봉투를 뒤집어쓰고라도 끝까지 싸우겠다고 사진을 올렸던 뉴욕의 간호사 역시 그 후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망했다. 장시간 마스크 착용으로 땀띠에 시달리면서 환자들 곁을 떠나지 못하는 대구 의료진의 희생은 벌써 두 달 째 계속 되고,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든 의대생들이 현장에 투입되는 아바나에서는 바이러스에 걸려서 입원하는 학생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들려오기 시작한다.
나도 이 난리부르스에 발을 담그고 있다. 아침마다 주민들 뻬스끼사(문진)를 다니는 중이다. 내가 장착한 무기는 N95 마스크가 아닌 티셔츠로 만든 수제 마스크, 손 세정제가 아닌 물비누 하나와 헹굴 물을 담은 페트병이다. 건물 하나를 돌 때마다 길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손을 씻는다. 응급실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니까 이 정도면 선방이다.
학생들을 사지(死地)로 내몬다는 불평불만이 들려오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뻬스끼사는 이번 전투에서 후방부에 속한다. 내 주민 중에 하필이면 확진 케이스가 있고, 또 하필 실수로 접촉을 해서 나까지 걸렸다면 그건 정말 재수가 없는 경우인 거다. (내가 문진 도는 블록 바로 옆에서 최근에 확진자가 나와서 심장이 쫄깃하다.) 여기 후방부에 머물 수 있는 시간도 어차피 사 년 밖에 안 남았다. 다음 번 팬데믹이 왔을 때 나의 현장은 저기 최전선이 될 것이다. 세상에,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자동으로 ‘의사 딱지’를 달고 나면 어떻게 도망칠 방법도 없다. 의사가 사회 특권층이면서 양심 없이 돈만 밝힌다는 비판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의사에게 높은 윤리의식을 기대한다. 목숨이 달린 일에 목숨을 걸고 달려가길 바란다. 기대를 하니까 욕도 하는 것일 테다.
그런데 나는 이런 리스크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던가? 아니다. 의대를 가기로 결심했을 때 나를 추동시켰던 것은 순전히 의학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의사로서의 사명감 같은 건 희박했고, 그게 뭔지도 감이 안 잡혔다.
그래서 이번 팬데믹을 통해 생각이라는 것을 해봤다. 사실 내가 뻬스끼사 참여를 결정하기까지는 2주의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동참하지 않을 이유가 더 많았다. 우선 외국인에게는 뻬스끼사가 의무가 아니었다. 뻬스끼사가 이 엄중한 팬데믹의 상황 앞에서 과연 효과가 있는 방법인 것인지 회의도 있었다. (작년에 앓았던 뎅게도 뻬스끼사를 하던 중에 걸린 것이다. 그때 진행되던 뻬스끼사는 엉망진창이어서 그 정도의 가치가 없었다.) 무엇보다, 학교와 정부의 대처에 대해서 불만을 넘어선 분노가 있었다. (이 디테일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2주가 지나자 이것들은 더 이상 이유가 되지 못했다. 나는 이런 이유들의 가장 밑바닥에 내가 답하지 못한 질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상황 속에서 나는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고, 또 감당하고 싶은가? 집에 남기로 한 것은 뻬스끼사에 동의하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가?
이 질문들의 시작점에는 다음의 질문이 있었다. 의사는 살리는 사람이다. 의사가 된다는 것은 살리는 일에 종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살리려는 마음은 어떤 것인가? 적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내고픈 슈퍼맨의 심정일까? 아니면 직업 때문에 수동적으로 훈련받은 원칙일까? 인간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무조건적인 선이라고 말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많다.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지구의 종양과 같은 존재다. 공교롭게도 이는 이번 코로나바이러스가 제대로 증명하고 있는데, 인간의 활동을 단숨에 제약함으로써 지구의 생태계를 혁명적으로 치료하고(!) 있다. 이 치료의 힘은 인간 외의 종들을 극적으로 행복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간접적인 이익을 준다. 가령, 전 세계적으로 공장들이 멈추고 공기의 질이 크게 개선되면서, 호흡기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치유되고 있다. 대기 오염으로 매년 목숨을 잃는 사람의 수는 이번 코로나 사태로 죽은 사람들보다 더 많다. 그렇다면 코로나바이러스가 ‘선’이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사의 입장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원인이 코로나바이러스가 되었든 대기 오염이 되었든, 의사의 임무는 목숨이 넘어가려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나는 이 단순함에서 거꾸로 의사가 발 딛고 있는 자리를 본다. 의사가 사람을 살리는 것은 그것이 옳아서가 아니라, 살고 싶어 하는 생명의 원초적인 운동성에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치료에 나서는 것은 자기 목숨을 희생해도 좋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이 사람을 살려서 같이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의사도 결국은 사피엔스,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홀로 살 수 없다. 환자를 살리는 것은 병인을 죽이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라 ‘같이 살기’를 목표로 한 활동이다. 가령, 코로나바이러스 덕분에 지구의 여러 종들이 쾌적하게 산다는 것은 축하할 만한 소식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피엔스 종이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도 인정해줘야 한다. 살려고 태어난 생명들이 살고자 노력하는 것이 잘못될 수는 없으니.
결국 초점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바이러스와 인간 숙주의 관계에서 ‘바이러스’에 초점을 맞추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잠재적 보균자가 된다. 이들을 모두 피해서 집에 숨고 싶은 두려운 마음이 올라온다. 하지만 초점을 ‘사람’으로 옮기면 거꾸로 바이러스가 그 사람의 일부로 인식된다. 이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와서 내 이웃을, 더 나아가 나까지 괴롭힐 수 있는 말썽쟁이이므로 꼭 제거되어야 한다. 이웃이 아프지 않아야 나도 아프지 않고, 또 내가 아프지 않아야 이웃이 아프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말이다.
COVID-19 국면이 진정되고 마침내 의료진이 무대에서 퇴장하고 나면, 비어버린 최전선에는 행정가들과 정치가들이 들어설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어떤 질서가 짜일지는 모르지만, 상충하는 두 가지 정서가 그 기반이 될 것이라고 본다. 하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여기서부터 보균자일지도 모르는 타자를 끊임없이 배제하는 흐름이 생길 것이다. 또 하나는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이다. 여기서는 바이러스를 예방하면서도 고립되지 않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짜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후자가 전자보다 더 강성해지기를 바란다. 이것이 의사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사람들을 치료하는 이유이므로. 남을 살리는 길이 내가 사는 길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코로나바이러스처럼 빠르게 알게 해준 경우가 있을까? 그러나 극한 상황은 눈을 쉽게 멀게 한다. 얼마나 시력을 떨어뜨리느냐면, 나와 내 가족이 도움의 손길을 요청해야 할지도 모르는 의사를 바이러스 옮기는 전염원 취급하며 박해하고 추방할 정도다. (이 믿을 수 없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비루하다. 자기가 아직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을 때에는 전염가능성이 있는 모든 타인을 폭력적으로 배제한다.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바이러스에 걸리고 나면, 그때는 전염가능성을 감수하고라도 자신을 돌봐주는 천사 같은 타인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이 역시 두려움 때문이다.
뻬스끼사에 가야겠다고 결정했을 때 시끄럽던 마음이 조용해졌다. 바이러스를 피해 안전하게 숨느냐, 두려움을 억누르고 작업을 수행하느냐라는 이분법도 사라졌다. 내가 해야 했던 것은 단지 여기 주민들을 같이 사는 사람들로 인식하는 것뿐이었다.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나 자신을 고립시키는 (물리적인 자가격리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무기력이 더 큰 병이었다. 내가 반 년 전의 나에게 이것들을 미리 말해주었더라도 ‘그때의 나’는 거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앎이 원래 있던 자리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이라면, 이 여정은 원래 알던 말을 버려야만 가능하니까. 탈주의 순간에 우리는 잠시 할 말을 잃는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는 정말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놈이다.
슈퍼마켓에서 음식을 사기 위한 두 시간의 기나긴 기다림
아, 그렇지만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말도 많다. 이 상황이 다 끝나면 성토하려고 마음속으로 칼 갈고 있다. 작년과 올해, 나는 뻬스끼사랑 정말 원수 진 사이가 되고 말았다. 자의로 참여하고 있는 지금도 때때로 울화통이 터진다. 뻬스끼사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다. 그때까지 아디오스. 다들 건강하시라!
글_김해완(쿠바의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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