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공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澤水困
困 亨 貞 大人 吉 无咎 有言 不信.
初六 臀困于株木 入于幽谷 三歲 不覿.
九二 困于酒食 朱紱方來 利用亨祀 征 凶 无咎.
六三 困于石 據于蒺蔾 入于其宮 不見其妻 凶.
九四 來徐徐 困于金車 吝 有終.
九五 劓刖 困于赤紱 乃徐有說 利用祭祀.
上六 困于葛藟 于臲卼 曰動悔 有悔 征 吉.
2018년 8월부터 대구에서 ‘니체와 인문학’이란 제목으로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다. 중년의 나이에 남산강학원과 감이당에서 4-5년 공부하고 나니, 인문학을 배우는 입장에서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입장에 간혹 서기도 한다. 인문학 공부가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구분될 수 없는 일이기에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하지만 좀 더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부담만큼 재미도 있고, 이를 계기로 공부도 더 많이 하며, 생각지도 않은 수입도 있고 하니 나에게는 참 좋은 일이다. 같이 공부하고자 모여든 사람도 각 시즌마다 15-20명 내외이고, 무엇보다 오시는 분들이 재미있어 하니 나름 성공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이렇게 공부를 하다 보니 1년이 다 되어가고 또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었다. 1년, 그리고 새로운 시즌의 시작을 기념할 겸해서 그 동안 배운 주역으로 괘를 한번 뽑아 보았다. 질문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인문학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였다. 결과는 택수곤(澤水困) 초육효가 나왔다. 臀困于株木 入于幽谷 三歲 不覿.(밑둥만 있는 나무에 앉아 있으니 곤란하다.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가서 3년이 지나도 볼 수 없다.) 괘의 전체 모습으로 보면 연못에 물이 없어 궁핍한 상황이다. 또 상괘는 두 양이 맨 위의 음에 의해 저지당하고, 하괘는 양이 두 음의 가운데에 있어 양이 상징하는 군자가 음이 상징하는 소인에 은폐를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1년 정도 지난 우리의 공부가 뭔가 곤란한 상황, 즉 ‘각자의 밑천이 바닥이 드러난 상황’, ‘위에는 어려운 니체 철학에 짓눌려 있고, 아래에는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 힘이 부족한 상황’에 처해 있는 형국이다.
처음에는 약간 당황했다. 재미있게 공부 잘 하고 있는데, 이왕이면 좋은 괘가 나와 우리의 이 기분을 더욱 부추겨주면 좋으련만!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평소에도 ‘공부란 원래 거칠 것을 다 거친 이후에 즐거움이 있는 일’임을 말해 왔기에 지금 우리에게 잘 맞는 괘라 생각하고 이런 저런 풀이를 해 나갔다. 공부란 원래 궁둥이가 아플 때까지 하는 것이다. 그렇게 공부한다고 하지만 뭐가 뭔지 모르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게 인문학 공부이다. 그렇게 3년을 해도 잘 모르는 게 인문학 공부가 아니겠는가. 특히 니체의 철학은 더욱 그렇다! 그러니 1년 남짓 공부하고 아는 척하지 말고, 최소한 3년은 같이 더 열심히 공부해보자는 결심을 했다. 또 괘사에서 유언이면 불신(有言 不信)이라 했으니 공부가 힘들다는 불평을 하지 말고 좀 더 열심히 해보자! 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는 “나도 좀 더 열심히 준비할게요!”란 말을 했고, 그 자리에 있는 몇 분들은 “선생님, 죄송해요! 다음 주부터 ‘암송’, ‘필사’ 열심히 해올게요!”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한참을 웃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약간은 찔리는 것이 있었고, 각자의 게으름을 이 기회에 한번 점검했으니 나름 좋은 전환점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되었다. 이어지는 효들도 그야말로 곤란한 상황들만 계속된다. 이 상황을 우리가 이겨낼 수 있을까? 인문학 공부 괜히 시작했나? 아직 인문학 공부가 무르익지 않은 내가 괜히 이런 프로그램을 했나? 등의 의문이 들었다.
이런 저런 의문을 품은 채, 택수곤 괘를 찬찬히 다시 읽어보았다. 그 순간, “아니다. 이제 공부를 제대로 할 때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수곤 괘는 이러한 상황에 처한 우리에게 공부의 자세를 잘 알려준다. 괘사에서 “이 곤경은 형통하고 올바를 수 있다.”(困 亨 貞) 그리고 “대인이라야 길하고 허물이 없다.”(大人 吉 无咎)고 말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공부란 원래 거칠 것을 제대로 거친 이후에 즐거움이 있는 것’이니, 지금의 이 상황이 특별할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괘사에서 말하듯 우리가 인문학 공부를 대하는 태도를 이제 ‘대인의 자세’로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갑자기 대인? 우리가 어떻게? 솔직히 당황스럽다. 공자님도 이런 우리의 마음을 아셨다. 갑자기 대인이 되는 것이 우리에게 과한 요구라 판단하신 것이다. 그래서 공자님은 단전에서 “위험한 상황이지만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곤경에 처할지라도 형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지 않으니, 그러한 자는 오직 군자뿐일 것이다!”고 말한다. 이것이 공자님이 해석한 대인의 공부, 곧 군자가 공부를 대하는 태도이다. 우리는 이런 저런 계기에서 인문학 공부를 시작한다. ‘갑자기 삶에 대한 회의가 와서’, ‘학교 공부가 이게 아니다 싶어서’, ‘취업준비만하는 대학공부가 싫어서’, ‘몸이 아파서’, ‘직장을 그만두게 되어서’, ‘미래가 불안하여’ 등 각자 이런 저런 계기가 있을 것이다. 이런 모든 분들에게 택수곤 괘는 말한다. “힘들지만 기쁜 마음으로 하라! 그러면 현재의 상황이 힘들겠지만 좋아질 가능성은 잃지 않는다. 비록 기쁨은 더디긴 하겠지만, 결국에는 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인문학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공부란 끝까지 곤란함이 있음을 알고, 끝까지 뉘우침이 있는 마음(曰動悔 有悔)으로 해야 하는 것’임을 주역은 말해주고 있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공부가 조금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그 만큼의 곤란함이 생긴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가 그 곤란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예전과 달라졌을 뿐이다. 공부의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곤란함이 없을 때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 기쁨은 지금의 난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내게 있을 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달라진 난관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없으면 공부를 그만 두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인문학 공부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가지고, 각 국면마다 겪게 될 다양한 곤란함을 견딜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면 비로소 그 때 우리는 어떤 공부를 해도 길한(征 吉) 상태가 될 것이다. 이것이 곧 군자의 공부이다.
글_안상헌(금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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