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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내인생의주역

신령스런 거북이(靈龜)의 가르침

by 북드라망 2020. 1. 7.

신령스런 거북이(靈龜)의 가르침



䷚山雷頤


頤, 貞, 吉, 觀頤, 自求口實.


初九, 舍爾靈龜, 觀我, 朶頤, 凶.

六二, 顚頤, 拂經, 于丘, 頤, 征, 凶.


六三, 拂頤貞, 凶, 十年勿用, 无攸利.


六四, 顚頤, 吉, 虎視耽耽, 其欲逐逐, 无咎.


六五, 拂經, 居貞, 吉, 不可涉大川.


上九, 由頤, 厲, 吉, 利涉大川.


공부하면서 가끔 드는 생각. 나는 참 아는 것이 없구나. 세상 산 시간이 그리 짧은 것도 아닌데 그동안 도대체 뭘 공부한 거지? 앞으로 배울 수 있는 수많은 책들이 있음에 가슴 벅찰 때도 있지만 내 지식의 짧음에 한심할 때도 많았다. 그런데 산뢰이(頤)괘는 그런 나에게도 타인이 배울 수 있는 영험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말한다. 그게 무얼까?




이(頤)괘는 위에는 멈춤을 상징하는 간(艮)괘가 있고 아래에는 움직임을 상징하는 진(震)괘가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제일 아래와 제일 위에 양효가 있고, 그 중간에 네 개의 음효가 배열되어 있다. 이 형상이 음식을 씹는 턱을 닮았다고 하여 턱 이(頤)를 괘 이름으로 한다. 턱은 음식을 씹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제대로 잘 씹어야 그 음식물이 나의 몸을 기르는 영양분으로 잘 흡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頤)괘는 키움, 배양을 뜻한다. 작게는 몸을 배양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나라를 키우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덕을 키우고 사람을 기른다는 뜻이 크다.


사람을 기른다는 의미에서 볼 때, 이(頤)괘의 두 양(陽)인 초구와 상구가 기르는 역할을 하고, 네 음(陰)은 두 양에 의해 길러진다. 왕필주역이든, 정이천주역이든, 대산주역이든 모두 양인 초구와 상구가 기르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왜? 양이니까. 말이 필요 없다. 주역에서 양은 강건하고 적극적이며 현명한 자질을 상징하고, 음은 유약하고 소극적이며 몽매한 자질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두 양이 네 음을 기르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주역에서 초효는 가장 낮은 자이다. 그런데 가장 낮은 자가 기르는 자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니 초효의 어떤 면이 우리를 기르는지 알아봐야 한다.


이 의문의 실마리를 사이영귀(舍爾靈龜)에서 찾았다. 사이영귀는 ‘너의 신령스러운 거북이를 버린다’는 뜻이다. 초구는 스스로를 기를 수 있는 자(陽이므로)인데, 자신의 자질을 자각하지 못하고 육사를 따르고자 하는 자이다. 그래서 턱을 늘어뜨리고(朶) 육사만을 바라보는 모습을 흉하다고(觀我 朶頤 凶) 한 것이다. 그런데 초구에게 있는 신령스런 거북이(靈龜)는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육이, 육사가 기꺼이 위아래의 전도를 각오하면서까지 초구에게 기름(顚頤)을 구하는가.


앞서 얘기했듯이 초효는 주역에서 가장 낮은 자를 상징한다. 가장 낮은 자는 현장에 가장 밀착되어 있는 자이다. 농사를 예를 들어보자면, 초효는 오랜 세월 농사를 지어온 농부로 볼 수 있다. 이런 농부는 땅의 경영이나 곡식에 대한 이론적 지식은 없지만 오랜 세월 땅과 함께하면서 저절로 익힌 바가 많다. 그 익힌바가 영험한 지혜로까지 승화된 사람. 이런 사람은 하늘의 색이나 바람에 섞인 냄새만으로도 비가 올지 얼마가 올지 곡식을 걷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를 그냥 안다. 그 앎이 경험에 밀착되어 이론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이 보기엔 영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요리에서도 이런 경지가 있는데, 오랜 세월 요리를 해온 시어머니가 ‘대~충’ 양념을 해도 맛있는 경지랄까. 어쨌든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론적인 지식이 없어도 배울 것이 많다. 그 오랜 경험에 따른 지혜가 다른 사람을 기를 수 있는 자질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모른다. 자신에게 얼마나 신령스런 거북이가 있는지를. 그래서 육사가 가진 이론이 더 전문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괘의 초구는 말한다. 오랜 시간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온 모든 사람들 속에는 반드시 신령스런 거북이가 있다고. 그러니 그 삶을 배우라고.




괘 이야기를 쓰다 보니 문득 정신이 든다. 나에게도 분명 내 오랜 세월 삶의 현장에서 익혀온 나만의 신령스런 거북이가 있을 것이다. 그 거북이를 버리고 남만 보면서 내 모자람만을 탓하고 있었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흉했겠는가. 산뢰이괘의 초효는 나에게 있는 신령스런 거북이를 스스로 발견하고 이제라도 그것을 친구들과 나누라고 재촉하는 듯하다.


_장현숙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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