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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내인생의주역

함장가정(含章可貞)의 지혜

by 북드라망 2020. 1. 14.

함장가정(含章可貞)의 지혜



䷁重地坤

坤 元 亨 利 牝馬之貞. 君子 有攸往. 先迷 後 得主利.

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 吉.

初六 履霜 堅氷至.

六二 直方大 不習 无不利.

六三 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

六四 括囊 无咎 无譽.

六五 黃裳 元吉.

上六 龍戰于野 其血玄黃.

用六 利永貞.


내가 ‘周易’을 나름 재미있게 공부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역은 내게 ‘天–地–人’으로 상징되는 三才가 함께 움직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과 우주를 변화시켜간다는 원리를 가르쳐주었다.




3년 전부터 『주역』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외웠다. 어느 정도 외운 후 이제 뜻도 좀 잘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주역』을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중천건(重天乾) 괘를 읽고, 중지곤(重地坤) 괘를 읽어가면서 갑자기 많은 생각이 몰려왔다. ‘음으로만 이루어진 괘에 왜 이렇게 배울게 많지?’, ‘왜 중지곤(重地坤) 괘에서 중천건(重天乾) 괘보다 군자의 도를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지?’, ‘양강(陽剛)한 괘가 군자의 도를 말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음유(陰柔)한 괘에서 소인의 도를 말하지 않고 왜 군자의 도를 더 많이 말하지?’, ‘강한 것은 군자·남자·군주, 약한 것은 소인·여자·백성이 아니었던가?’ 등을 생각하면서 읽고, 또 읽었다. ‘양강(陽剛)한 것과 음유(陰柔)한 것’,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이것들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이들의 주기적 상호작용이 세상을 생성하고 변화해 가는 원리란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질문이 생겼다. ‘이 원리가 어떻게 하면 내 삶에 적용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그 순간 다가온 함장가정!


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

안으로 아름다움을 머금어 올바름을 굳게 지킬 수 있으니, 혹 벼슬길에 나가 나라 일을 하게 되더라도, 이룬 것은 없지만 끝마침은 있어야 한다.


예전에도 공부란 걸 했었고, 그 공부의 힘으로 나름 공적인 일에 헌신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조직과 나는 어긋나기 시작했고, 이 어긋남을 서로가 감당할 수 없을 때 직장을 몇 번 그만 두었다. 어른이 되고 이렇게 30년 정도를 살아왔다. 지금 돌아보니 예전에 내가 했던 헌신은 ‘하늘과 땅의 움직임 안에서 내 안의 힘을 키우고, 그 원리 안에서 세상과 내가 함께 성장해가는 공부와 일’이 아니었다. 내 안의 ‘아름다운 힘과 바름’과는 상관없이 내가 생각하여 설계한 옳음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꿔 보려는 공부와 일이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직장을 그만둔 문제가 주역을 배우기 전에는 이해하기 참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할 수 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알겠다. 주역(周易)의 이치는 나에게 ‘실직’이라는 시련을 통해 ‘함장가정’하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었다. 나는 몇 년 동안 몸담았던 조직을 떠날 때 마다, 신기하게도 이런 말을 했다. ‘다시 공부하면 되지 뭐!’


실제로 나는 예전에 함께 공부하던 선생님과 동료들을 찾아가 다시 공부하는 생활을 했고, 얼마 후 예전보다 좀 더 활기차게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니체도 말한다. “너희들이 너희들의 사명을 외면하거나 도망치려고 할 때마다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이 폭군은 끔찍하게 보복한다!”(니체, 《인간적 Ⅱ》, 14). 그렇다! 몇 번의 ‘실직’, 그것은 ‘天–地–人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며 살고 있었던 나에게 그 작용과 변화를 알아가면서 살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지금 나는 과거의 공부와 일과는 좀 다른, ‘감이당 공부’를 하며 살고 있다. 만약 내가 예전처럼 공부하고 일하며, 제도를 바꿔보려는 노력을 지금도 하고 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제도의 개혁과 운영을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직에 붙어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왜소한 존재가 되는 댓가로 더 나은 벌이와 약간의 지위를 누리는 것은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함장가정(含章可貞)하는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동안 세상의 일을 나름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이룬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나는 예전에 나와 세상이 맺었던 관계를 마무리한다. 대신 내 삶을 위해 버릴 수 없는 것이 생겼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변화 속에 있는 나를 인식하고 그 속에서 내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나만의 일이겠는가!


글_안상헌(감이당 금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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