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하라! 정직하라!
노동이 된 학문
1870년 7월,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에게 프랑스는 하나의 독일을 세우기 위한 마지막 고지였다. 7개월 여간 이어진 전쟁, 그리고 프로이센의 승리. 그것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독일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국가nation-state는 영토적 통일만으로는 부족한 법. 그 속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줄 무언가가 함께 있어야 한다. 독일이 왜 하나가 되어야만 하는지, 왜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각인시켜주고, 독일의 승리를 확정지어주며, 자신들이 하나의 뿌리를 가진 민족임을, 같은 경험을 가진 하나의 집합체임을 확인시켜줄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역사’가 들어온다.
역사학이 통일 독일을 휩쓸었다. 신문, 출판계, 학계, 교육계 할 거 없이 모두가 역사학에 열광했다. 역사학은 시대의 요청이었고, 이 요청에 화답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이었다. 니체는 이런 시대적 흐름 한 가운데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이 흐름에 동참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시대의 열광에 멀미를 느꼈고,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하나의 우상처럼 떠받들여지는 역사학. 니체는 이 우상에 전쟁을 선포한다. “화약도, 연기도 없”는 전쟁. 1873년 12월, 20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던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의 2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를 완성한다.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에서 니체는 두 방향으로 전투를 수행하고 있다. 한쪽은 역사학이 다루는 ‘역사’이고, 다른 한쪽은 역사학이 수행하는 ‘학문’이다. 우리는 우선 학문을 향한 칼날을 따라가보려 한다. 거기에는 24살의 젊은 나이로 대학교수가 된 학자로서의 니체가 오버랩되어 있다.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학문은 니체에게 너무 일찍 늙어버린 삶을 안겨주었다. 그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그의 생명력은 하루가 다르게 소진되어갔다. 격렬한 눈의 고통과 편두통으로 인해 글을 쓸 수도 없었다. 이로 인해 『반시대적 고찰』 1부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구술로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무엇이 이토록 자신을 병들게 하는 것일까.
두 번째 반시대적 고찰(1874)은 우리의 학문 경영 방식의 위험한 요소, 삶을 갉아먹는 요소, 삶을 독살하는 요소를 백일하에 폭로하고 있다― ; 거기서의 탈인간적인 톱니바퀴와 메커니즘으로 인해, 노동자의 ‘비인격화’로 인해, ‘노동분업’이라는 잘못된 경제학으로 인해 삶은 병이 든다. 목적이 상실되고, 문화가 상실되어간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백승영 역, 책세상, 397쪽)
노동이 된 학문, 그리하여 삶을 병들게 하는 학문. 니체는 삶을 회복하기 위해, 노년이 된 자신에게 청년 니체를 되돌려주기 위해 학문의 문제를 탐색해 들어간다.
배움, 자기 삶의 예술가 되기
학문 탐색의 첫 출발은 ‘지식교육’이다. 지식교육은 니체가 받아왔던 교육이자, 대학에서 니체에게 요구되는 교육방식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지식교육은 시대가 요청하는 교육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지식교육은 계속되고 있으며, 그만큼 이에 대한 비판들이 이곳저곳에서 쏟아진다. 하지만 지식교육에 대해 니체가 던지는 질문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보통의 경우 지식교육에 대한 비판은 지식의 내용과 관련된다. 그 지식이란 것이 써 먹을 수 없는 것이라거나, 혹은 책을 보고 공부하는 것보다는 체험학습이 중요하다는 식이다. 그래서 실용적인 학문을 배워야 한다든지, 자연에서 노는 것이 공부라는 결론에 이르곤 한다. 하지만 니체가 제기하는 지식교육의 문제는 실용적이냐, 비실용적이냐에 있지 않을뿐더러, 책을 내려놓고 놀이를 통한 교육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교육이 실용적인 것을 배우는 것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교육에는 엄격한 훈련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가 지식교육에 제기하는 문제는 교육의 내용적 측면이 아니다. 그는 ‘지식’이 ‘앎’이 된 교육, 그렇게 지식을 끊임없이 ‘습득’하도록 하는 교육의 형식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니체에게 지식은 앎이 아니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곧 그것을 행할 줄 안다는 것, 즉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앎은 언제나 삶이고, 삶은 언제나 앎이다. 이런 앎의 형태에서는 그것을 익히는 문제,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만드는 힘까지가 그 안에 포함된다. 배운 것을 소화해서 자신의 일부분으로 만드는 힘. 니체는 이 힘을 ‘조형력’이라고 부른다.
조형력은 예술 작업과 관련된다. 예술가는 아직 아무런 형태도 없는 재료들을 하나하나 다듬어가며 자신의 작품을 만든다. 여기서 형태없는 재료를 살아숨쉬는 작품으로 탈바꿈시키는 힘이 조형력이다. 니체는 이 예술의 힘을 배움과 관련시킨다. 배우는 자는 한 명의 예술가로서 자기 존재를 빚어간다. 배우는 자에게는 곧 자기 자신이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배움이란 자기 삶의 예술가되기이다.
예술가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조형력이다. 예술가는 그렇게 조형력을 키워나가다가 자신에게 맞는 재료들 또한 찾아나가게 된다. 배움 또한 마찬가지다. 배우는 자에게 지식은 작품의 재료이다. 아무리 좋은 재료가 있어도 조형력이 없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듯이, 배움의 현장에서 초심자가 배워야 할 것은 조형력이다. 어떤 경험을 했느냐, 혹은 어떤 지식을 알았느냐보다는 그것을 삶으로 변형시키는 힘 그 자체가 앎의 일차적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조형력은 소화력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위(胃)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위 자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머리 속에 그리는 그런 위, 볼록한 주머니 형태로 음식이 들어오면 꿀럭거리며 활발하게 움직이는 그런 위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갓난아기는 처음부터 음식을 많이 먹을 수도, 어른이 먹는 그런 거친 음식들을 먹을 수도 없다. 애기들은 액체인 젖을 조금씩, 그것도 하루에 몇 번씩 나눠서 먹으며 서서히 위장의 크기도, 소화력도 키워간다. 그렇게 위가 자리를 잡고, 그 기능도 활발해지면서 아이는 밥을 먹을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아이들이 성장해 간다는 것은 소화력이 커져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앎과 삶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조형력을 가진 앎을 통해 삶을 만들어나간다. 배움 속에서 자신의 소화력만큼 자기 존재를 빚어내고, 그렇게 좀 더 커진 소화력으로 다시금 자기 존재를 형성해 나간다. 앎을 통해 하나하나 만들어지는 삶. 그렇게 우리는 자기 존재를, 자기 자신을 빚어 나간다. 니체 식으로 말해, 하나의 ‘인격’이 태어나는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조형력을 통해 자신만의 삶의 양식을 창안한 사람, 자기 존재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든 사람을 ‘위대한 자’라고 불렀다. 위대한 자는 자신의 인격을, 다른 이들과 구별 가능한 자신만의 독특한 존재 양식을 가졌으며, 그리하여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된 사람이다.
교육의 목적이 있다면, 바로 이런 위대한 자가 태어나는 토양을 가꾸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육 현장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조형력이다. 즉, 우리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것은 소화력을 키우는 일이다.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얼마나 잘 소화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 소화력의 정도가 앎의 정도를, 삶의 정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의 시대인 근대는 다른 앎의 형식을 만들어냈다. 근대 이전의 앎이란 지식을 포함한 그 모든 경험을 자신의 삶으로 가져오는 앎이었다. 이런 앎이 “교양”이라 불렸다. 하지만 근대에서는 더 이상 그런 앎을 찾아볼 수 없다. 근대는 앎을 단순히 ‘인식’의 문제로 축소해 버렸다. 이제 삶에서 실제적으로 그것을 실행할 줄 안다는 앎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의미로서의 앎만 남아 버린 것이다. “교양”이 아니라 “교양에 대한 지식”일 뿐인 앎. 존재의 문제로서 앎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가 되어버린 앎. 그것이 지식이고, 교육은 이 지식의 습득에 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식 교육에 의해, 근대는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면성’의 인간을.
글_신근영(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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