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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청년니체

니체의 ‘아니오’ (2)

by 북드라망 2018. 10. 23.

니체의 ‘아니오’ (2)

 


운명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부정. 이 세계에는 신의 계획이 깃들어 있지 않으며,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 니체에게 이것은 지금껏 자신이 서 있던 존재의 기반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보이지 않는 손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고백한다. 범죄를 저지르는 기분이라고. 결코 넘어서는 한 되는 선, 니체는 그 선을 넘고 있었다.

 

신과의 결별은 니체에게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비단 종교적 신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 세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가야할 정해진 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얼핏 듣기에 이 말은 무언지 모를 자유로움을 느끼게 만든다. 이미 정해져 우리 앞에 놓여있는 길이 없으니, 억지로 따라야할 것이 사라진 기분.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어떤 구속을 느낄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손이 사라진 세계야말로 편안할 거라는 생각. 하지만 정말 그럴까? 보이지 않는 손이 사라진 세계는 우리에게 그런 편안함을 안겨줄까?

 



 

신 없는 세계의 불안

 

한 번 생각해 보자. 지금 우리 앞에 아무런 길도 없는 광활한 대지가 있다. 어디가 동쪽인지, 서쪽인지 알 수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든 걸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자, 그럼 우리는 그곳에서 어떻게 할까? 처음에는 길이 없으니 내가 가면 길이 된다고 신나게 앞으로 나아갈지도 모르겠다. 혹은 이곳저곳으로 방향을 바꿔가며 마음대로 대지를 누비고 다닐지도. 그런데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해가 지나면 어떻게 될까. 그때에도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뗄 수 있을까.

 

얼마 전 투루판에 있는 사막을 다녀왔다. 앞을 봐도, 옆을 봐도 그저 광활하기만 할 뿐, 아무 것도 없던 사막. 그 광활한 사막 앞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갑갑함을 느꼈다. 그 묘한 느낌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은 서울로 돌아와서였다. 너무나 익숙해서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걸어가고 있던 나에게 다가온 편안함. 그랬다. 그것은 아무런 길도 없이, 끝 간 데도 없이, 그렇게 펼쳐진 대지가 주는 갑갑함이었다. 길 없는 대지,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함, 그래서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그래서 또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는, 그 막막함이 주는 갑갑함. 이것이 보이지 않는 손이 사라진 세계다.

 

정해진 길이 없다는 것은 따라야만 하는 어떤 구속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방향도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곳에 놓여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우리가 선택지로 삼을만한 어떤 길들도 없다. 우리는 오롯이 우리 힘으로 길을 내야 한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 길의 끝이 어디인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이런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편안함이기는커녕, 답답함과 불안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구속이지만, 아니 구속이기에 편안함이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 지금 자신이 그곳에서 얼마나 멀리 있고 가까이 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좋든 싫든 어딘가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우리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주는 위안을 우리는 쉽게 떨쳐낼 수 없다. 그래서 아닌 것 같아도 사회가 인정하는 정석의 길을 걷게 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쫓아가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신은 여러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가 인정하는 길, 다수의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의 다른 이름이며, 무엇보다 길 없는 곳에 서 있는 우리의 불안에 붙여진 이름이고, 그 불안을 토닥이는 위로의 손길이다. 니체의 ‘아니오’는 바로 이 손길을 대한 것이었고, 그 손길을 갈구하는 자신의 마음을 향한 것이었다.

  


우리 없이는 운명도 없다

 

목적이 사라진 자리, 운명의 수레바퀴는 사건들을 따라 굴러간다. 정해진 방향도, 숨겨진 의도도 없는 사건들의 흐름 앞에서 니체는 운명에 대해 다시금 탐사를 시작한다. 거기에는 18살의 니체를 운명에 대한 탐사로 끌어들인 문제가 놓여 있다. 바로 자유! 사건들이 만들어내는 운명의 거대한 흐름과 그에 비해 한 없이 작게만 보이는 인간 사이의 분투. 그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길을 낼 수 있는지, 요컨대 자유의 지점은 어디인지를 니체는 묻기 시작한다.

 



니체의 출발은 일상의 사건들이다. 운명이란 사건들의 연속이고, 사건이란 모름지기 우리의 일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법. 운명이 가진 그 힘의 정체는 일상의 사건들로부터 가늠할 수 있을 터였다.

 

삶에서 무엇이 우리의 행복을 결정하는가? 우리는 감사를 표해야 하는 어떤 사건들을 가진 것일까? 우리를 실어 나르는 소용돌이로서 사건들을?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의 기질, 말하자면 모든 사건들에 색채를 부여하는 그 색깔일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격이라는 거울 속에서 모든 것들과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사건들은 소위 우리 운명의 열쇠가 아닐까, 반면에 그것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력의 강함과 약함은 오직 우리 자신의 기질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운명과 역사> 중)

 

우리가 어떤 사건에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 행복의 힘은 사건 자체에 있지 않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나의 사건이 어떤 이에게는 한없는 기쁨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한없는 슬픔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 사건이 어떤 힘으로 작용하는지는 전적으로 그 사건을 맞이한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가 가진 삶의 맥락이 그 사건이 어떤 운명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사건이 가진 힘의 정도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일도 아닌 것이 된다. 날라 온 돌이 유리는 깰 수 있을지언정, 강철은 뚫을 수 없듯이 말이다.

 

사건은 우리 밖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그 사건이 가진 힘과 질은 “우리 자신의 성격이라는 거울” 속에서 드러난다. 그 거울에 따라 사건의 색깔과 명암이 달라진다. 요컨대, 운명의 성격이란 우리 자신의 성격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각자가 가진 기질의 차이가 운명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운명이란 이미 우리 자신이라는 존재를 전제한다. 우리 자신을 떠난, 저 외부의 객관적 존재로서 운명이란 없다. 우리 자신과 함께 하나의 운명이 태어나고, 우리 자신과 함께 하나의 운명이 사그라진다.

  

 

쫄지 마!

 

우리는 운명을 우리 밖에 있는 거대한 힘이라고 상상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감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으로 운명을 생각한다. 하지만 운명의 한 쪽 끝에 우리 자신이 자리하고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하나의 사건이 닥쳐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어떤 사건이 될 지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것이 사건이라면, 그 바퀴가 ‘어떻게’ 굴러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인 것이다.

 

이제 운명이 가진 거대한 힘 따위는 지워버리자. 내가 어찌할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세상의 흐름이라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다 하기에 나 또한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라는 것도 없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세상의 흐름이란 나를 통해 만들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가는 그 길 역시 내가 걸어가는 순간 열린다. 어쩌면 세상의 흐름이란 게 있다는 믿음,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운명이 거대한 힘을 갖게 되는 원천이 아닐까.

 



우리는 사건들에게 그저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노리갯감이 아니다. 우리 또한 사건들을 상대로 우리 자신의 놀이를 벌이고 있다. 이것이 니체가 본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운명에 대항할 가능성이, 자유가 펼쳐질 그 공간이 열리게 된다.


대단원의 막이 내려가면 인간은 세계와 유희를 벌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아침놀에 깨어나, 웃으면서, 지난밤의 악몽을 떨쳐내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기 자신을. (<운명과 역사> 중)

 

운명의 거대한 힘이란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꿈, 그것도 아주 나쁜 꿈이다. 그러니 쫄지 말자! 날 것의 사건을 운명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세상과의 싸움이 쉬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레 겁을 집어 먹고 싸움을 포기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수 있다. 운명은, 우리가 운명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래서 우리 자신을 맥없이 놓아버리는 순간, 정말로 대단해진다. 그러니 똑바로 사건을 직시하자. 그리고 생각하자. 어떻게 그 사건을 요리할 수 있을지. (다음 편에 계속~)


글_신근영(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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