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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청년니체

청년 니체, 청년과 니체

by 북드라망 2018. 8. 21.

청년 니체, 청년과 니체


3년 전 쯤, 니체 전작 읽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니체의 첫 단행본인 『비극의 탄생』을 지나, 『반시대적 고찰』과 만났다. 이전에도 여러 번 읽은 텍스트였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그 어떤 생생함, 내 눈으로 니체를 읽는다기보다는 니체가 내게 말해주고 있다는 그런 생생함이 느껴졌다. 난 그렇게 새벽마다 니체의 이야기를 들었다. 



『반시대적 고찰』은 니체의 초기작 중 하나다. 1869년, 니체는 스물다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바젤 대학 문헌학과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스물아홉이 되던 해, 『반시대적 고찰』을 쓰기 시작했다. 첫 책인 『비극의 탄생』에 혹평이 쏟아진 다음 해였고, 2명의 청강생만이 있던 겨울학기를 지난 후였다. 본래 좋지 않던 눈이 한층 더 그를 괴롭혔고, 거기에 심한 편두통까지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썼고, 이듬해 자신의 작업을 마무리했다. 

『반시대적 고찰』에 대한 이런 이야기들을 난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반시대적 고찰』을 빼들면 그런 맥락은 까맣게 잊혀졌다. 거기에는 ‘철학자 니체’로 뭉뚱그려진 한 인물이 있었다. 그리고 『반시대적 고찰』은 그런 철학자의 전 생애에 걸친 작업 위에서 읽혔다. 그 책은 철학자 니체의 초기작이었고, 그렇기에 그의 사유의 씨앗을 알 수 있는 텍스트이기는 하지만, 여하튼 원숙기 철학에는 못 미치는 그런 작품이라고. 한 마디로, 내게 『반시대적 고찰』은 철학자 니체의 덜 익은 열매였다.

그런데 3년 전, 다시 읽은 『반시대적 고찰』은 달랐다. 그 글 속에는 오십 인생을 살다간 철학자 니체가 아니라 스물아홉의 청년이 있었다. 그랬다. 그것은 스물아홉의 니체가 쓴 글이었다. 한 철학자의 사유의 체계 위에 자리 잡은 글이 아니라, 한 청년이 자신의 삶을 통과하며 토해낸 생생한 기록. 그것이 『반시대적 고찰』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었다. 청년 니체와 함께 뭔가 작업을 해보아도 재미있을 거 같다고.

청년 니체를 읽는다는 것

한 철학자의 청년기를 마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은 설익은 사유? 혹은, 이후 철학에서 펼쳐지게 될 사유의 단서? 그것도 아니면, 젊음의 열정으로 일궈낸 그 풋풋한 사유의 맛? 하지만 이런 질문들에는 나쁜 전제가 깔려있다. 완결된 한 철학자가 있는 것이다. 

1900년, 20세기의 문턱에서 니체는 숨을 거뒀다. 그리고 두 세기가 흘렀다. 지금 우리에게는 니체의 전 생애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니체의 모든 글에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냄새를 맡곤 한다. 하지만 이십대의 니체는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십 대의 자신이 그런 글을 쓰게 될 줄은. 그는 살아있는 한 사람이었고, 생명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 매번이 시간을 통과하며 다음으로 나갈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한 철학자의 전 사유를 펼쳐놓고 그의 청년기를 읽는다는 것은, 그 자신이 해왔던 실제 사유와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런 식으로 읽는 게 가능한 철학자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거친 초기 사유를 점점 다듬으며 후기 철학으로 나아간 철학자도 있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니체에게만큼은 그런 그림이 어울리지 않는다. 

​​

어떻게 생성을 사유할 것인가? 생성할 것인가?



니체가 전 생애에 걸쳐 씨름한 하나의 문제가 있다. ‘생성으로서 삶’이다. 매번의 시간은 새롭게 태어나고, 소멸한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시간의 매듭이 온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하는 삶에 우리는 곧잘 멀미를 느낀다. 그리고 찾는다. 생성의 시간들 속에 변치 않는 본질이 있을 거라고. 그 단단한 지반 위에 상륙하기만 하면 이 멀미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러나 니체에게 삶의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는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변치 않는 실체라는 것은 우리가 삶에 멀미를 하고 있음을,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우리는 스물에는 스물의 시간을, 사십에는 사십의 시간을 산다. 스물에는 스물의 웃음과 울음이 있고, 사십에는 사십의 웃음과 울음이, 육십에는 육십의 웃음과 울음이 있다. 스물의 나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육십이 있듯, 육십의 나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스물이 있다. 사십으로도, 육십으로도 결코 환원할 수 없는 그런 어떤 스물의 삶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스물에는 스물을, 사십에는 사십을, 육십에는 육십을 살 수 있을 뿐이다.  

니체는 이 생성으로서의 삶에 자신을 담궜다. 멀미의 고통을 오롯이 긍정하고 싶었고, 변치않는 실체라는 환상에 기대지 않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출렁이는 생성의 삶에서 항해를 이어나가길 바랐다. 니체의 시간은 이를 찾기 위한 실험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실험들은 시간의 매듭들마다 다르게 이뤄졌다. 어떤 실험들은 인생 후반부까지 이어졌지만, 어떤 것들은 일찍 끝나버렸다. 이것을 단순한 실패로 읽어야 할까. 그것은 변해버린 시간, 변해버린 자신의 삶에서 그 실험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생성의 삶이기에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그러니 니체답게 니체를 만나려면, 하나의 완결된 철학자라는 상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청년 니체이기에 할 수 있는 그런 실험들에 주목하는 게 필요하다. 그것은 이후의 삶에서 드러나는 니체와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아니 같기도 한 지점’은 설익은 열매가 아니라, 청년기 니체의 완숙한 열매다. 그 완숙한 열매가 떨여져 씨앗이 되어, 또 다른 열매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답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질문을 바꿔 다시 묻고 싶어진다. 왜 하필이면 청년 니체인가?

청년들과의 접속 

작년,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공부 공동체에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신서유기’라는 이름이 붙은 이 활동은 청년들과의 공부를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청년들이 집에서 독립해 스스로 생활을 꾸려가며, 공부를 통해 존재적 자립을 실험하는 공부의 장. 이것이 신서유기 공부의 비전이었다.

​이 실험에 참여한 청년은 단 두 명. 하지만, 아니 그렇기에 공부의 밀도는 그 어느 때보다 컸다. 청년들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냈다. 우리는 수업뿐만이 아니라 생활 하나하나를 공유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훈련에서부터 하루의 생활리듬과 경제활동을 조율하는 문제까지, 한 마디로 연구실 일상의 모든 부분들이 신서유기 친구들과 나누는 공부의 장이 되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을 그 친구들과 함께 했다. 내게 그것은 하나의 인류학적 탐사였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그 친구들을 난 이해할 수 없었다는 거다. 내가 만난 청년들은 말 그대로 신인류였다. 관계를 맺는 방식이나 돈에 대한 태도, 또는 관심을 갖는 부분이나 활동을 하는 방식 등등 열에 아홉이…음…그 정도는 아니고 열에 대 여섯이 나와는 달랐다. 그러니까 다시 쉽게 말해보자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거다. 

어떻게든 그 신인류를 이해해 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친구들에 대한 잔소리가 늘어갔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 친구들은 위축되어 가거나, 아니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데 도통해 갔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방법은 그려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 그렇게 내 인류학적 탐사는 실패로 끝났다.



신서유기는 내 한계를 절감케 했다. 청년들과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게 내 몫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초 ‘청년공부자립 프로젝트’(줄여서 청공자)라는 새로운 청년 프로그램이 생겼지만, 작년만큼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청공자 2기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 청년 니체라는 걸로 글을 써보라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청공자 2기와 청년 니체. 청년들의 세계로의 강제 소환. 청년들과의 이런 인연은 뭘까. 난 이 인연의 장 앞에서 청년이란 문제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 한계를 만나는 일이기도 했다. 왜 청년들과의 공부가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 걸까. 이유는 간단했다. 거기가 내 공부의 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난 청년들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은지, 어떻게 하면 그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식의 관계가 내게 갖는 의미가 뭐지? 그저 그렇게 가르치는 자가 되어 버린다면, 그래서 거기서 내 배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게 꼰대가 아니면 뭔가. 그러니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생각해야 했다. 나에게 청년과의 접속은 무엇일까, 라고. 

청년으로서 니체, 청년과 니체, 그리고 나

다시 돌이켜본 ‘청년’, 그것은 단순히 생의 한 주기가 아니었다. 모든 시대에서 청년이란 그 시대의 자화상이다. 그 시대의 기쁨과 슬픔은 청년들에게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내가 20대였을 때, 청년들이 시대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시대와 싸웠듯, 지금의 청년 역시 이 시대의 최전선을 살아가고 있다. 단지 그 방식이 나 때와는 다를 뿐이다. 

청년과의 접속은 곧 지금 이 시대와의 접속이다. 그럼에도 난 청년들을 단지 나보다 어린 애들, 아직 뭘 모르는 애들 쯤으로 치부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난, 과거의 내 시간에 갇혀서 그 친구들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니 길은 하나. 가르치려 드는 꼰대가 되는 수밖에. 쩝….

스스로 갇힌 삶이란 만족스럽지 않다



뭐, 청년들에게 꼰대라는 욕을 듣는다고 해서 그게 뭐 대수일까. 살아가다보면 청년이 아닐지라도 나를 욕하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고, 그러니 꼰대로 살아가는 게 스스로 만족스럽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닌가. 하지만 문제는, 그런 삶이 내게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거다. 재미가 없다는 거다. 

내 시간에 날 가두고 살아가는 게 싫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항상 깨어 있도록 만드는 배움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꼰대로 살면, 그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말 안 듣는 애들이 괴로울 뿐이고, 그 관계는 지겨운 노동이 될 뿐이다. 그렇게 과거에 갇혀 지낼 수만은 없지 않나. 나를 지금 이 시공간에서 깨어있게 하기, 내 삶을 현재형으로 만들기. 그럴려면 공부의 장을 다시 가다듬어야 한다. 이 시대의 가장 현재형인 청년들과의 접속을 통해.

그렇지만 그 접속이 청년들과 똑같아지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럴 수도 없을뿐더러, 그래서도 안 된다. 나는 사십대 후반이다. 그게 나의 현실이다. 그 지반 위에서 청년들과 만나 내 삶을 현재형으로 만들어 나가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나 역시 무언가 이야기를 건내야 한다. 더 많이 살아 본 사람으로서 아니라, 다른 시공간을 살았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아프니까 청춘이고 그러니 잘 참고 견디라는 것도 아니고, 시대 탓하지 말고 자기 계발에 힘쓰라는 것도 아닌 다른 식으로 청년들에게 이야기를 건낼 수 있는 길. 바로 이 길에서 청년 니체와 만난다.  

니체가 말하는 시간은 묘하게도 지금의 시간과 오버랩된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야기되는 하이브리드 시대, 노동을 중심으로 구성된 기존의 가치가 무너져버린 사회, 갈 길을 잃은 사람들의 무력감과 그 무력감이 분노가 되어 서로를 해치고 있는 삶. 니체는 이를 잡종의 시대, 신의 죽음, 약자의 원한감정이라 불렀다. 그는 자신의 시대로부터 도래할 시간을 읽었고, 그렇게 도래할 시간으로서 자신의 시대와 맞섰다.

하지만 한편으로, 청년으로서 니체는 오늘날의 청년들과는 사뭇 다른 지반 위에 서있었다. 아직 국가라는 것도, 민족이라는 것도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고, 자본주의가 막 꽃을 피우는 시기였기에 노동 시장에 진입하기란 지금보다 수월했지만, 대부분의 노동 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니체는 그 속에서 직접적으로 전쟁을 경험하기도 했고, 교수로서 취업도 했다. 그것도 스물다섯의 나이에 정규직으로. 

하지만 이런 다름이 니체와 우리 사이의 걸림돌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렇게 다르기에 우리는 다른 싸움의 전술을, 삶에 대한 다른 상상력을 나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청년 니체와 함께 가보려 한다. 청년으로서 니체, 청년과 니체, 그 길 위에서 나는 무엇을 배우게 될까.   


글_​신근영(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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