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몸-마음 복합체이다(3)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세 구나의 활동력의 변화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의 세 구나들은 매순간 그 우세함이 달라지면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주도한다. 타마스의 에너지가 우세한 순간들마다 우리들은 분리된 자신을 인식하고 고립됨을 느낀다. 이러한 일상이 지속되다 보면 우리들은 다른 일상을 만들고 싶어지고, 그에 따라 달라지려는 몇 가지 시도들을 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와 활동을 시작할 때, 라자스의 에너지가 우세해진다.
사람들마다 좋아하는 영역이 다르듯이 자신의 일상을 주도적으로 구성하는 구나의 활동이 다르다. 타마스의 에너지가 우세한 경우와 달리 라자스적인 에너지가 우세한 사람은 외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자신 안에서 많은 동기가 부여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활동하려 한다. 그리고 이 활동의 결과물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자아의 만족을 즐긴다. 이 만족감은 외부 세계에서의 활동을 더욱 강화시킨다. 이렇게 라자스의 우세로 인해서 얻어지는 자아의 만족과 활동력은 자신의 에너지를 많이 소모시킨다. 또 자신의 활동의 결과물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하지만 외부의 결과물은 자신의 활동 에너지와 자신을 둘러싼 외부 에너지와의 교섭 속에서 특정한 형태로 결과물을 만든 것이지, 그 자체가 자신은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라자스의 에너지는 끝없이 자신을 외부로 달려가게 만든다.
문제는 이러한 자신의 활동에 대한 만족할 결과물을 얻지 못하게 될 때 발생한다. 자신의 많은 에너지를 투여하고도, 그 결과물이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일 경우들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지 않는가? 이때 우리들은 “삶이 충격을 불러와서 특히 제어를 잃을 때 그들은 커다란 고통을 겪을 수 있으며 목적을 성취할 때조차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아유르베다와 마음』, 60쪽, 데이비드 프롤리 지음, 슈리크리슈나다스 아쉬람출판사) 라자스의 에너지가 주로 작용하는 일상을 사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시선이 자신 외부의 목표와 결과물에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 알아차림은 잠시 멈출 때 가능하다. 만약 스스로 자신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면, 활동으로 인한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 때문에 멈춰서게 되기도 한다. 이때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 이로 인해 커다란 고통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이 순간 시선을 자신 안으로 돌릴 수 있는 기회를 맞을 수도 있다.
자신이 속해 있는 관계의 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거나 함께 일을 하고 나서 혹은 그 과정 중에 반드시 그 일이 자신 안에서 어떤 에너지들을 불러일으키는지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활동하는 사이사이에 자신에게 현재 우세한 에너지가 무엇인지 관찰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시간을 자신에게 허락한다면, 라자스의 에너지를 따라서 끝없이 에너지를 써버리는 일을 줄일 수 있다. 라자스의 에너지는 끝없이 외부로 달려가게 하고, 자신 밖에서 결과물을 창출하고자 하기 때문에 과도한 활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러한 라자스의 과도한 활동은 자기 동기의 활동력을 떨어뜨리게 된다.
“라자스는 에너지의 과도한 표출을 일으키며, 이는 궁극적으로 고갈로 이어져 타마스가 세력을”(『아유르베다와 마음』, 52쪽, 데이비드 프롤리 지음, 슈리크리슈나다스 아쉬람출판사) 떨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생명활동 전체의 에너지가 손실되게 되고, 자기 동기를 불러일으킬 수 없게 되기에 타마스의 상태로 들어서게 된다. 침체되었다가 반짝 활동하고 다시 침체되기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트바적인 에너지가 우세한 일상을 살 때, 대체로 사람들은 무엇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사트바적인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지도 않는다.
“사트바는 사물의 진리를 인식하게 해주는 명석함을 창조하며, 빛과 집중, 헌신을 준다.”(『아유르베다와 마음』, 51쪽, 데이비드 프롤리 지음, 슈리크리슈나다스 아쉬람출판사) 하여 사트바의 에너지가 우세할 때 우리는 남들을 고려하면서도 자신을 돌볼 줄 안다. 그리고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가 서로의 우세함 속에서 순환함을 알고 그 순환의 과정이 바로 생명이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창조성의 과정임을 기억하게 된다. 자신을 구성하는 세 구나의 활동을 한 개체의 일상으로 경험하는 것이 생명활동의 주요한 목적임을 알고 외부의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려고만 하지 않는다. 결국 생명인 인간이 생성의 과정에 있을 때 우리 안에 사트바가 우세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을 아유르베다에서는 자신 안의 지성이 깨어난 상태라고 말한다. 사트바가 우세한 상태, 즉 지성이 깨어난 상태에서는 우리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세 구나의 변화 속에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허니 타마스가 우세한 상황에서는 라자스를 불러일으키고, 라자스의 활동 속에서 자신 안으로 시선을 돌려 사트바로 이어지는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려 한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해간다면 우리가 특정한 행위와 마음을 가질 때 어떤 구나가 우세한지 인식할 가능성이 열린다. 우리가 타성에 젖어서 고립감을 느끼며 침체되어 있는 순간이 타마스가 우세한 활동을 하는 순간이다. 또한 자신 외부에 특정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가 달성될 때 행복할 것이라 믿으며 달려가는 그 순간 라자스의 활동이 우세하다. 자신에게 어떤 삶의 형태들이 찾아와도 삶이란 다가온 순간들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때 우리는 사트바가 우세하다.
결국 세 구나는 우리 안에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과 삶에서 나의 행위와 그 행위를 하는 마음으로 매 순간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활동과 관계와 마음씀을 느끼고 관찰하면서 세 구나 가운데 주로 활동하는 프라크리티의 활동을 인식하게 된다. 이 인식의 순간이 바로 아유르베다에서 말하는 지혜가 활동하는 시간이다. 아유르베다에서는 '지혜없는 삶'이 이어질 때 질병이 생기게 되고, 이 질병이 자신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말한다. 곧 자신이 어떤 일상을 살았는지 알려주는 지표임을 말해준다고 말이다.
글_정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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