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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과 yoga] 우리는 몸-마음 복합체이다(2)

by 북드라망 2019. 2. 14.

우리는 몸-마음 복합체이다(2)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자연과 인간생명을 구​성하는 에너지들


우리는 인간생명이 어떻게 이 지구상에 탄생하여 지금까지의 삶을 이어왔는지, 학교에서 사회에서 여러 방식을 통해 배워왔다. 그 중에서 우리는 아유르베다에서 알려주는 생명탄생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상키야 철학에 바탕한 아유르베다에서는 푸루샤(purusa)로부터 분화된 프라크리티(prakrti)가 끊임없이 분화되는 과정 속에서 인간생명을 비롯한 생명체들과 자연 환경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물질인 프라크리티는 분화될 때 세 가지 성질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이 세 가지 성질을 구나(gunas)라고 부른다. 세 구나는 자신들의 에너지들을 섞어서 모든 다양한 자연과 생명의 씨앗이 된다. 이 세 가지의 구나들이 결합 비율을 바꿔가며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비롯한 삼라만상을 출현시킨다.

“세 구나는 물질, 생명, 마​음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미묘한 자연의 특질들이다.”(『아유르베다와 마음』, 48쪽, 데이비드 프롤리 지음, 슈리크리슈나다스 아쉬람출판사) 또한 “구나gunas라고 불리는 이 세 가지 양식들이 물질로 하여금 각기 다른 세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게끔 허용”(『요가』, 28쪽, M 엘리아데 지음, 다르마총서 6)하게 된다.

세 구나가 다른 비율로 섞인 물질들은 각기 다른 모습과 방식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세상에 나타난 물질들은 가장 미묘한 자연의 특질들을 자신 안에 담고 있게 된다. 이처럼 물질로의 모습이 시작된다는 것은 프라크리티 내에서 세 구나들이 나뉘기 시작하면서 각기 자신들의 에너지 활동을 시작함을 의미한다. 반면에 세 구나가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져 있을 때는 물질이 세계 속에 나타날 수 없다. 결국 세 구나의 결합 비율이 다르다는 것은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 중에서 우세한 비율과 작은 비율의 에너지가 섞인다는 것이고, 이 불균형이 바로 물질로 탄생된다는 뜻이다. 인간 생명도 세 구나의 불균형한 배합 비율이 만든 몸-마음 복합체의 생명활동인 셈이다. ​


 

세 구나는 개체와 개체를 둘러싼 자연 속에서 구체적인 에너지로 드러나게 된다. 사트바(sattva)는 밝고 순수하고 선한 특성을 발현하는 에너지이며, 명료함과 정신적 평정에 이르게 한다. 더불어서 지성으로, 균형을 주는 에너지이다. 라자스(rajas)는 움직임과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에너지이며 동기를 부여한다. 또한 이동성과 활동적인 에너지이며 개체를 적극적이고 활기차고, 긴장하고, 의지적이게 한다. 타마스(tamas)는 물질적인 형태들을 만들어내는 힘이며 만들어진 물질을 유지시키려는 타성의 에너지이다. 또한 어둡고 고립적으로 굳혀 안정되려는 특성의 에너지이며, 라자스의 작용과 사트바가 나타나는 것을 저지하고 반대로 작용하려 한다. 이러한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의 구체적인 에너지 활동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는데, 우리들은 세 구나들 중 우세한 에너지를 중심으로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타마스, 라자스, 사트바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이 세 절차들 각각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아침에 깨어난 바로 뒤나 오후에 공상할 때처럼 마음이 타마스적인 때가 있다. 정신적으로 둔하거나 감정적으로 침체될 때마다 타마스는 현저하다. 라자스는 수많은 사람들이나 계획들과 더불어 아주 바쁘게 일하고 있을 때처럼 동요되거나 동적이거나 외부 지향적일 때 세력을 떨친다. 사트바는 조용하고 평화롭고 만족스럽거나, 자연스럽게 명상 속으로 빠질 때 팽배하다. 

- 『아유르베다와 마음』, 59쪽, 데이비드 프롤리 지음, 슈리크리슈나다스 아쉬람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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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마음 복합체인 우리들의 일상은 바로 세 구나 중에서 우세한 에너지의 활동이다. 일상에서 행위와 마음들은 매순간 달라지게 되는데, 이처럼 달라진다는 것은 우세한 구나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때로 우리가 자신의 일상의 모습을 스스로 관찰해본다면 어떤 에너지가 주로 활동하는 순간인지 알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 안의 에너지들의 특징을 알지 못해왔다. 아유르베다에서는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라고 표현하고 또 다른 자연의학체계에서는 다르게 이름 붙일 것이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둔하거나 감정적으로 침체될 때 자신 외부에서 이유를 찾는다. 또 수많은 사람들과 계획을 세우고 활동할 때, 외부를 지향하며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때때로 조용함과 평화로움이 찾아올 때, 우리는 현재의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끼게 된다. 언제 왜 이런 상태가 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되고 싶은 상태는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현재 자신의 활동을 만드는 에너지들의 특성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유도 모른 체 이 구나들의 활동에 이끌려 다니게 된다.

 

세 구나의 에너지는 우리들에게 내적 동기와 의욕과 마음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들 또한 세 구나들로 구성되었기에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다. 때문에 아유르베다에서는 자연의 에너지들인 세 구나를 이해할 때 모든 수준에서 그 힘들과 더불어 작용하게 됨을 설명한다. 이러한 자연의 방법들을 이해하고 사용하는 연습을 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치유의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세 구나들의 활동력의 변화


아유르베다에서는 세 구나들의 활동력에 바탕하여 개인의 에너지 체계와 기질을 판단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들의 삶은 세 구나 중의 하나의 구나가 우세한 지배력을 펼치고 있고, 우세한 에너지가 오랜 기간 동안 우리들의 활동과 삶을 만들고 있을 때 기질로서 고착화된다. 아유르베다에서 보는 질병발생의 원인은 세 구나 중에서 특히 타마스가 우세한 활동을 하고, 그 상태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때라고 진단한다. 물론 타마스의 에너지는 물질을 만드는데 꼭 있어야 할 에너지이다. 물질이 하나의 개체로 이 세계에 드러날 수 있도록 형태를 만들기 때문이다. 타마스의 에너지는 우리가 독립된 개체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형태, 즉 신체의 주요한 에너지이다. 하지만 독립된 개체로서의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생명활동이란 분리된 자아의 활동이며, 우리 자신이 혼자이며 고립되었다고 종종 느끼게 된다. 

 

아유르베다에서는 먼저 자신이 어떤 구나의 우세한 활동력 아래 있는지 살펴본 후 이에 바탕하여 자신 안의 에너지의 세력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권한다. 우리는 많은 시간 타마스적인 에너지가 우세한 경우들을 경험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기존에 관계를 맺던 타성에 젖어서 관계를 하는 경우들이 많다. 이처럼 타마스의 에너지가 우세하다면 자신 안에 고립되어 물질로 굳어져 있는 타성을 분쇄할 수 있는 새로운 활동을 권유한다. 타마스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흩어버릴 에너지가 필요하다. 

​우리가 타마스의 에너지가 우세한 일상을 자주 살아갈 때, 타마스의 에너지는 그 상태로 가만히 고정되어 있지 않는다. 에너지들은 어떤 방향으로든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게 되어 있다. 하여 타마스의 상태를 더욱 굳건하게 하는 방향성으로 에너지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랑 관계를 맺을 때 비슷한 방식의 관계맺음을 한다. 새로운 관계나 새로운 상황 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보겠다는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관계 안으로 들어가지만, 곧 같은 지점에서 관계 안의 타인을 비난하거나 자신을 비난하곤 한다. 그리고 비슷한 방식으로 그 관계를 정리한다. 이렇게 같은 방식으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관계를, 마주치는 사건을, 부딪히는 대상을 만나는 것을 타성에 젖었다고 말한다. 이런 방식을 지속하는 된다는 것은 바로 타마스의 에너지가 우세한 상태를 지속한다는 이야기이다.

지속적으로 타마스의 상태가 우세할 때 우리는 자주 정신적으로 둔감하고 감정적으로 침체된다.  타마스의 우세함의 비율을 바꿀 수 있는 라자스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타성에 젖어서 고정된 자신만을 바라보던 상태에서 자신의 선택으로 새로운 관계와 상황 속으로 들어갈 에너지를 써야 한다. 자신 안에 있는 라자스의 에너지이다. 같은 사람과도 다르게 관계맺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상을 살면서도 다른 방식을 시도해보려는 마음은 라자스가 타마스보다 조금 앞서면서 나타나게 된다.  자신의 집착, 정체, 침체의 뿌리 깊은 패턴들이 지속될 때, 자신의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움직임과 행동을 시도해보아야 한다.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움직임과 행동들은 라자스의 우세함에서 나타는 것이며, 라자스의 에너지가 이것들을 흔들어 고정된 것에 아주 조그만한 실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고통이 찾아오기도 한다. “오랫동안 억누르거나 무시해 온 것들을 포함한 아픔에 직면해서 고통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배워야”(『아유르베다와 마음』, 60쪽, 데이비드 프롤리 지음, 슈리크리슈나다스 아쉬람출판사)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이때 고통이 찾아온다고 해서 다시 예전의 자신의 패턴으로 돌아간다면 또는 타성에 젖은 익숙한 상태로 돌아간다면 자신의 타마스의 에너지의 더욱 우세해질 것이고, 이 상태가 오래도록 지속된다면 질병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특정한 질병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타마스 상태에 고정되어 에너지와 감정이 정체되고 침체되어 산다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질병상태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세 구나의 우세함이 바뀌어가는 삶을 살도록 태어났고 그 에너지들의 교체와 순환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감이당과 같은 공부 공동체를 선택하고 그 안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지내지만, 그 곳에서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말로 모를 수 있다. 공부의 내용이 매우 어렵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이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 자신의 기존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을 연습해볼 수 있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익숙한 방식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통하지 않는 그 지점에서 다시 본다면, 사람들과의 소통들 그리고 활동과 관계에서 자신이 같은 방식만을 고집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이러한 과정이 매우 어렵고 힘들 수는 있지만, 기존의 자신이 쓰던 방식과 다른 방식을 연습하며 공부공동체를 경험한다는 것은 정체된 자신을 해체할 바늘구멍만큼의 라자스의 활동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자신이 속한 여러 관계와 상황 속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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