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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치1/몸과정치2

메이지 헌법의 구성과 신체성 - (3)

by 북드라망 2019. 3. 7.

메이지 헌법의 구성과 신체성 - (3)

 

 


소위 ’시라스[しらす]‘라는 것은 즉 통치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역대의 천황은 이 천직을 중시해,

군주의 덕은 팔주신민(八州臣民)을 통치하기 위해 있고,

일인일가에 향봉(享奉)하는 사사로움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이 헌법에서도 의거하는 기초가 되는 바이다.

─伊藤博文, 『헌법의해(憲法義解)』(1889)

  

 

‘통치’와 ‘시라스’

 앞서 『헌법의해』와 「군인칙유」, 「칙어연의」에서 보았듯이 이러한 새로운 통치모델은 후쿠자와의 국체론과 대비를 이루면서 천황의 권력을 강화하는 신체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처럼 머리와 사지를 상하 수직적인 명령 관계로 파악하는 신체성 속에서 다양한 바디폴리틱은 천황 중심의 단일한 신체모델로 정리되기 시작한다. 이노우에 코와시(井上毅)가 「진대신(進大臣)」의 제5항 ‘독일학을 장려함’에서 “지금 천하 인심이 보수적 기풍으로 형성되려면, 오로지 프러시아의 학문을 권장하여, 수년 후 문단을 제압하도록 함으로써, 전례 없이 강한 영국 학문의 세를 암소(暗消)시켜야 한다”라고 제언했던 바는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는 단순히 영국학과 독일학 중 어느 외국 문화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국헌제정을 위한 모범, 표준을 선택하는 문제였다. 이처럼 그가 자유주의 학문을 ‘제압’하고 ‘암소’시켜 국가주의적 학문의 기풍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은 「인심교도의견안(人心敎導意見案)」에서 말하는 것처럼 후쿠자와를 읽고 천하의 소년들이 마비되어 이를 따르는 현상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그러나 천황과 인민의 관계를 절대적인 명령관계로서 머리와 사지로 빗대어 풀어내는 과정이 기존의 전제정치나 사적 지배인 가산제국가 형식을 사유한 것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동시에 이들 메이지 지식인들이 서구식의 근대국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했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다시 메이지 헌법으로 돌아가 신체정치의 특성을 재사유해보자. 메이지 헌법 ‘천황은 나라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해 이 헌법의 조규에 의거해 이를 행한다’고 할 때 통치권이라는 용어로서 sovereignty를 나타냈다. 이는 주권이라는 용어가 재야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음에도, 만세일계의 천황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통치권과 주권을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된다. 즉 이토 히로부미가 천황제라는 일본 고유의 통치 전통과 헌법이라는 서양제도의 결합을 위해 주권을 사유한 것이었다.

 『헌법의해』 5조에서 천황의 통치가 “주일(主一)의 의사로 백해(百骸)를 지사(指使)”하는 것과 같다고 할 때 이 역시 머리가 자기 마음대로 사지를 통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군인칙유」는 머리와 손발 간의 수직적인 명령 모델을 동원하지만 이는 고굉의 비유를 통해 전통적 사유와 결합한다. 「칙어연의」는 사지가 정신을 따라 유일의 주의가 관철됨을 말하지만 이는 원기론과 결합된다. 수직적 신체 모델과 전통적 신체 모델이 혼종된다. 그리고 이 때의 주권이란 사적 성격과 공적 성격의 이중성을 갖는다. 즉 주권이란 사적인 명령과 공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 사이에 있다. 머리는 단순히 명령을 내리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위치에 올라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신체를 하나로 묶어내며 전체의 건강을 고려함으로써 그 역할을 다한다.

이를 메이지 헌법 제1조에 나오는 ‘통치한다(統治ス)’는 동사와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앞에서 본 것처럼 메이지 헌법 제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고 되어있는데, 여기에서 사용된 ‘통치한다(統治ス)’라는 동사에 대해 『헌법의해』에서 다음과 같이 추가적 설명이 붙어있다.

 통치는 대위(大位)에 자리하여 대권을 통할해, 국토와 신민을 다스리는 것이다. 고전에는 천조(天祖)의 칙명을 거론하며 ‘일본[瑞穂国]은 우리 자손이 왕이 되어야 하는 땅이다. 황통이여 오셔서 다스리소서’라고 적혀있다. 또한 조신(神祖)을 칭하며 제사함에 하츠쿠니시라스 스메라미코토(始御国天皇)라 불렸다. 야마토 다케루[武尊]의 말에 ‘나는 전향(纏向)의 히시로노미야(日代宮)에서 오야시마국(大八島国)을 다스리신[知ろしめす] 오오타라시히코 오시로와케노 스메라미코토(大帯日子淤斯呂和気天皇)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몬무천황(文武天皇) 즉위의 소(詔)에는 ‘천황의 아들이 차차 계승해오신 오야시마국을 다스리는[治める] 차례’라고 나와 있다. 또한 천하를 조사해 평온케 하고 공민(公民)에 은혜를 베풀어 위무(慰撫)한 역대의 천황은 모두 이를 나라를 물려주는 대훈으로 삼고, 그 후 ‘오오야시마시로시메스 스메라미코토(御大八州天皇)’를 칙서의 예식으로 했다. 소위 ’시라스[しらす]‘라는 것은 즉 통치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역대의 천황은 이 천직을 중시해, 군주의 덕은 팔주신민(八州臣民)을 통치하기 위해 있고, 일인일가에 향봉(享奉)하는 사사로움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이 헌법에서도 의거하는 기초가 되는 바이다.

─伊藤博文, 『憲法義解』. 23쪽


​메이지 헌법에서 ‘통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담겨있는 부분이다. “통치의 대위(大位)에 자리해 ‘대권’을 ‘통할’해 ‘국토’와 ‘신민’을 다스리는 것”이라는 처음의 말 속에서 근대 통치 개념을 정초하려는 이노우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노우에는 위에서 보듯 다소 장황하게 『고사기』, 『일본서기』, 『속일본기』등 일본 고전의 예들을 적으며 다스린다라는 뜻의 동사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예들을 언급하고 있다. ‘통치하다’라는 말이 고전에서 보이는 ‘시라스(しらす)’나 ‘시로시메스(しろしめす)’와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시라스(しらす/治す)’라는 말은 ‘다스리다’라는 뜻의 일본어 아어(雅語)로 여기서는 사사롭지 않은 점을 그 특징으로 들고 있다. 원래 이노우에 코와시가 이토에게 제시한 헌법초안에서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다스린다(しらス)’라고 되어있어 ‘통치한다(統治ス)’라는 말 대신 ‘시라스’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통치’라는 번역어 대신에 ‘시라스’라는 고전적인 말을 통해 무언가 근대적 통치 개념과는 다른 방식의 통치성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이노우에가 헌법발포 5일 후에 행해진 강연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로도 뒷받침된다. 그는 ‘시라스’가 토지나 인민을 사적재산으로 하지 않는 통치양식으로, 이 말이 ‘알다(しる/知る)’라는 동사의 존경표현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단순한 사적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또한 이성의 작동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마음으로 대상을 안다는 의미이고, 이는 거울이 사물을 비추듯이 명백히 아는 것이라 보충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힘이나 권력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마음에 의한 지배, 마음써서 보살피는 지배로 ‘군주의 덕’의 작용이다. 그는 이 점에서 ‘시라스’라는 동사는 ‘우시하쿠(うしはく/領く)’라는 동사와 대비된다고 설명한다. “‘우시하쿠’라는 말은 즉 영유한다[領する]는 것으로 구라파인의 ‘occupy’, 지나인의 부유(富有), 엄유(奄有)라는 말의 의의와 완전히 같다. 이는 하나의 토호의 소작으로서 토지인민을 나의 사유 재산으로 취하는 대국주(大國主)의 행위를 그린 것”이다. 이는 가산제국가 양식인 사적, 권력적 이념임을 설명하는 말이다. 이에 반해 ‘시라스’는 천황에 의한 공적 지배, 도덕적 이념을 체화한 천황의 독특한 지배양태를 가리키는 말임을 강조하고 있다.

고로 지나 구라파에서는 일인의 호걸이 있어 일어나 많은 토지를 점유해, 하나의 정부를 세워 지배하는 정부의 결과로서 국가의 역의(譯義)가 된다 해도, 우리나라의 황위계승[天つ日嗣]이라는 대업의 근원은 황조의 어심의 거울로서 천하의 민초를 다스리는[しろしめす/知ろし召す] 의미로부터 성립한 것으로 이는 우리나라의 국가성립의 원리는 국민의 약속에 있지 않고, 하나의 군덕(君德)에 있다. 따라서 국가의 시작은 군덕에 기초한다는 구절은 일본국가학 첫 권 제일에 이야기되어야 하는 정론이어야만 한다.

─副田義也, 『교육칙어의 사회사: 내셔널리즘의 창출과 좌절(敎育勅語の社會史: ナショナリズムの創出と挫折』), 64~66쪽 재인용


​이처럼 1조에 담긴 통치한다는 동사의 의미는 인민과의 계약에 의한 것도, 그렇다고 인민을 소유하는 형태의 지배도 아닌 군주의 덕에 의한 통치다. 물론 이러한 구별이 역사적으로 타당한가는 별도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메이지 헌법의 기초자들은 서구식의 통치와는 다른 방식의 다스림, 공적 지배, 군덕에 의한 지배의 개념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이노우에가 국수적 논의 속에서 천황 통치의 독자성과 정당성을 강조했다고 보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유럽의 사정에 해박한 서양형 지식인으로, 헌법의 이미지로서 구미의 법제도를 염두에 두고 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의도는 천황을 근대국가의 ‘기축(機軸)’으로 위치시키지만, 그 권력은 사적인 권력이 아닌 공공 권력이어야 함을 주장한 것으로, 그 근거를 일본의 전통 속에서 끌어 온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서양주의자로서 구미의 법제도를 그대로 모방하는 것과 역으로 국수주의자로서 전통적 이념의 우위성에 자기만족 하는 두 가지 사이에서 교묘하게 근대 국가의 통치이념을 일본적 전통 속에 접목하는 선택이었다. 이는 당시 일본의 상황 속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급격한 서구화를 통한 방식의 개혁이 낳은 사회적 불안감이 존재했다. 이를 이토 히로부미는 서구화와 전통의 융합이라는 과정 속에서 새롭게 통치 개념을 재규정함으로써 돌파하고자 했다.

치신(治身)과 치수(治水) 그리고 치국(治國)

그렇다면 이때 ‘시라스’라는 동사에 비추어 신체정치적 특징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통치라는 개념을 신체정치에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앞에서 보았듯이 근대적 통치를 생각할 때 신체은유는 강력한 힘으로 작동했다. 즉 머리가 사지를 통치하듯 천황이 국가를 통치한다. 이때 신체유비는 서양의 근대적 국가 시스템을 도입하려 하는, 즉 머리인 천황이 토지이자 신민인 사지를 통치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서양식의 머리와 사지의 관계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발상 속에서 혼종되어 나타난다.

즉 머리가 사지를 다스린다고 할 때 이는 머리가 사지를 지배, 명령한다는 의미와는 다른 사유방식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결국 다스린다(治)는 동사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문제와 관련된다. 치수(治水)라는 말에서도 ‘치’라는 말이 쓰이듯 다스린다는 개념은 동양에서 물의 은유로서 자주 사용되어왔다. 『서경』에 나오는 우임금의 치수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의 본성에 거슬러 막거나 메우는 방법을 사용한 곤(鯀)은 실패하여 처형되고, 소통 혹은 통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한 우(禹)는 성공하였다. 이는 물을 다스리는 ‘치’수(治水)의 방식대로 ‘치’병(治病)을, ‘치’국(治國)를 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치의 논리를 잘 담고 있는 것이 전통 의학 분야이다. 대표적으로 ‘경락설(經絡說)’은 한의학의 가장 독특한 이론 중 하나로, 사람의 몸 안을 흐르는 유체들(기나 혈)의 길을 상정하고 이 길 중 어느 한 부분이 막혔을 때 몸에 이상이 온다는 이론이다. 이 경락설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수로공사라고 평가된다. 즉 고대 중국에서는 농경을 위해 치수가 아주 중요한 사업이었으므로 물을 다스리고 막히지 않게 흐르게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음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 다스리는 자는 물이 성질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성격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다스리는 것이고, 이는 통치의 문제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논의가 신체에 대한 유비로 작용하여 병리설을 이루었다. 즉 물이 막혀서 정체되고 고이면 썩는 것과 같이 인체 내의 흐름도 막히면 병이 생긴다는 개념이다. 이는 혈자리들의 이름에서도 물에 관련된 용어들(溝, 渠, 谷, 泉, 池, 澤)이 많은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통함의 신체성은 전통 의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논의였다. 양생의 근본은 흐르는 물이 썩지 않듯이, 문의 지도리에 좀벌레가 먹지 않듯이 움직여 통하는 데 있다. 사람의 형체와 정기도 마찬가지로 모든 병은 기가 적체되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인간의 신체뿐만 아니라 국가로까지 확장된다. 

무릇 사람은 삼백육십 개의 마디와 아홉 개의 구멍과 오장과 육부가 있다. 피부는 조밀하기를 바라고, 혈맥은 통하기를 바라며, 정기는 운행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면 병이 머물 곳이 없고, 추한 것이 생겨날 근거가 없게 된다. 병이 머물고 추한 것이 생겨나는 것은 정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이 막히면 더러워지고 나무가 막히면 굼벵이가 생긴다. 나라도 막히는 것이 있다. 군주의 덕이 베풀어지지 않고 백성이 바라는 바가 펼쳐지지 않는 이것이 나라가 막힌 것이다. 나라가 막힌 채 오래 지속되면 온갖 추한 것들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모든 재앙이 무더기로 발생한다.

─여불위, 『여씨춘추』


​즉, 물이 막히면 더러워지고, 나무가 막히면 굼벵이가 생기는 것처럼 나라 역시 막혀서는 재앙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서 병이 머물고 추한 것이 생기는 것은 정기가 막혀있기 때문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시빈(Sivin)의 지적처럼 동아시아에서 정‘치’(政治)란 신체와 국가 사이의 포괄적 감응체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질서를 부여한다는 의미의 ‘치(治)’자를 쓰는 치신(治身)과 치국(治國)의 논리적 유사성은 중국 고대 의학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지속하는 주제였다. 즉 우임금의 치수 이야기를 다른 눈으로 보자면 개체와 국가적 신체 모두에 생과 사, 혹은 병과 건강의 핵심이란 흐름 내지 순환시켜 통하게 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이 흐름에 변화가 생겼을 때가 병이고 막혔을 때가 죽음이다.

 

이렇게 보자면 근대적 신체관의 모습 그대로 상부의 머리가 위치권력으로서 명령을 내리고 아래에 있는 사지는 그것을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은 아니다. ‘시라스’란 동사가 그러하듯 단순히 지배한다는 것이 인민이나 토지를 사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면, 머리가 사지를 다스린다[治]고 하는 것은 단순히 사지를 사유하거나 소유하는 방식이 아니며, 권력이나 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사지의 바람직한 존재양태를 아는 것이자, 사지의 뜻을 거슬러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통하게 함으로써 다스리고자 하는 논리였다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머리의 통치가 공적인 지배로서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전통과 근대의 접합, 다스림과 신체

근대 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왕의 두 신체’라는 말이 보여주듯 군주의 통치 대상 내지 소유물로서 국가라는 관념에서 인격화된 신체성이 탈각되고, 국가 자체의 법적 인격을 갖추는 것이 필요했다. 따라서 근대국가의 구성은 바디폴리틱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격의 탈인격화가 아니라 새로운 인격화의 문제라 하겠다. 그러나 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군주로부터 국가의 탈인격화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이는 인격화의 문제가 또 다른 차원에서 작동했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체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던 시점에서 인격화는 벗어나야 할 문제가 아니라 달성해야 할 과제였다. 집합적 신체를 새로이 구성함에 신체라는 유비는 분리되었던 개체들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자, 집합체에 최고성과 영속성, 배타성을 부여하는 근대적 주권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논의였다. 이 발명된 국가적-주권적 신체는 주권을 매개로 해서 유기적 성격을 부여받았다. 이는 단순히 복종-동원의 신체로서만이 아니라, 불멸하며 영속하는 신체성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는 분리되지 않는 강고한 결합을 하나로 이어주는 접착제로서 작용했다. 근대 동아시아에서 왜 굳이 정치를 신체로 가지고 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역시 국가라는 신체의 생명과 관련해서였을 것이다. 어떻게 하나의 신체로서 영구적 성격을 부여할 것인가, 물론 이 때 신체의 중심은 어디인가라는 질문 역시 주권의 문제와 관련해서 논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국가론이 처음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이러한 바디폴리틱적 사유와 접하면서 가능했다. 그것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본격적으로 물어지기 시작한 것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논의가 19세기 독일의 유기체설보다 서양중세의 신분제적 유기체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는 19세기 독일의 유기체설이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법인격으로서 국가를 세우기 위한 논리였던 데 비해 일본에서의 유기체에 대한 논의가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만 전유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타당한 지적처럼 보인다. ‘인격(person)’으로서 유기체설이 정신의 단일성, 이른바 귀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던 반면에 근대 일본에서는 이를 머리(원수)로서 천황이라는 ‘인물’에 이러한 인격성만을 부여하여 국민을 정신적으로 복속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한 차이를 낳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서로 다른 신체관 혹은 세계관을 가진 장소에서 사상이 접합되면서 생기는 굴절의 양상의 측면을 보이는 것일지 모른다. 이처럼 근대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메이지 체제를 입안했던 이들에게 천황이라는 머리는 사지에 명령을 내리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이는 기존의 전통적 신체 논리 속에 위치 지어진다. 즉 전통적 통치 개념과 근대적 통치 개념이 상호 혼종되어 기묘한 형태로 이 둘이 접합되어 나타난다. 

 

글_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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