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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슬기로운복학생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by 북드라망 2018. 12. 19.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1. 

중·고등학교 시절을 금욕적인(?) 기숙사 대안학교에서 보내면서 나는 별로 놀아본 적이 없었다. 착실하게 공부만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때 시골구석에서 나와 친구들이 노는 법은 공놀이, 물놀이, 곶감 만들기, 눈싸움 등 전래놀이 수준이었다는 것.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PC방에 가는 정도. 그래서 대학에 가면 뭐하고 노는지가 궁금했었다. 대학생이 되면 클럽과 술집을 전전하며 인사불성이 되어 방탕하게 놀게 되는 건가? 하는 은근한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대학생들이 노는 법은 꽤나 점잖았다. 술집에서 시작해 PC방, 당구장, 노래방으로 이어지는 놀이 문화는 지금 생각해보면 건전하다 못해 시시하다. 술집에 당당하게 들어간다는 것 외에 고등학생들이 보통 노는 방식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옮겨 다니는 놀이의 동선은 참 좁았다. 다 학교 앞 한 블록 안에서 이뤄지는 일들이었다. 그런데도 풋풋했던 스무 살의 나는 참 열심히도 노는 곳에 따라다녔다. PC방에 가서 총도 쏘고, 노래방에 가서 랩도 하고, 당구장에서 큐대도 휘둘렸다. 물론 세 가지 모두 재능도 실력도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그런 놀이 문화가 어떤 점에서는 신선하기도 했고, 나름 유익하기도 했다. 그 때의 심경을 더듬어 본다.





2.

PC방. 고등학교 때는 성인이 되어서 PC방에 간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학창시절에나 PC방에 다니는 거지 다 커서 무슨 게임이냐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입학한지 얼마 안 되어 수업이 일찍 끝난 어느 날, 여자애들 남자애들 섞여서 “총이나 쏘러 가자”하며 PC방에 몰려갔던 경험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PC방은 남자들의 영역인 줄만 알았고, 중고생들의 영역인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 그곳에는 이십대 남녀가 가득했고, 휴일에나 초딩·중딩들이 끼어들 뿐이었다. 그런 날이면 나도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아 급식충들 짱 많네”라며 투덜거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밤 10시, 한차례 신분증 검사 후에 초중고딩들이 사라지면 한잔 걸치고 온 대학생들이 자리를 잡는다. PC방은 생각 없이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시간대비 가장 저렴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열정적으로 게임을 하는 친구들은 정말 많았다. 공강 시간에 한두 시간 PC방에 다녀오거나, 수업 끝나면 그대로 직행하는 친구들도 많다.


당구장. 당구만큼 무용한 놀이가 또 있을까. 당구를 좀 치는 애들에게 언제 배웠느냐고 물어보면, 당구는 돈과 시간을 투자한 만큼 는다고 한다. 져서 게임값을 내다보면 잘하게 된다고. 왜 그런 한심한 짓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남긴 채 당구장 따라다니는 일은 그만 두었다. 어울리는 재미도, 별다른 매력도 없는 것을 뭐가 좋다고 잘해야만 하는 것인지. 군대에 당구대가 있어서 잠시 배워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때조차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노래방. 그래도 위의 두 곳 보다는 훨씬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노래를 잘한다는 것이 남자로서 또는 여자로서의 엄청난 매력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쟤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노래도 잘해’라고 말할 때, 지력과 체력에 비견되는 호감 요소. 게임 잘하는 것, 당구 잘 치는 것은 전혀 멋있어 보이지 않지만,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잘생긴 것만큼이나 멋진 남자의 조건이 된다. 그런 생각으로 별로 시간 아깝다는 생각 없이 따라다닌 곳이 노래방이었다. 때마침 ‘천원에 4곡’ 코인노래방이 성행하면서 간단하게 한두 곡 부르고 빠지기 딱 좋았다. 밥 먹고 배 꺼뜨리러 들르고, 술 취할 때쯤 깨려고 들르고, 집 가는 길에 들르고. 위의 놀이의 동선에서 빼먹지 말고 들러줘야 하는 곳이 코인노래방이었다.


처음 동기들과 노래방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있을 때는 아무거나 아무렇게나 불렀는데, 이 별로 친하지 않은 동기들 앞에서는 도저히 무슨 노래를 해야 할지, 몇 안 되는 나의 레퍼토리를 뒤적여 봐도 막막했다. 거기에는 이적, YB, 서시(!?) 등 ‘아제 노래’뿐이었다. 예약번호를 보면 다들 다섯 자리 숫자인데, 내가 선곡한 구시대 노래는 네 자리 숫자였다. 이렇듯 최신곡을 연습해가지 않으면 노래방에서도 아싸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노래방을 따라다닌다고 해서 실력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고, 쏟아져 나오는 신곡을 익히는 것 또한 버거웠다.




술집. 대학생들의 놀이문화에서 술을 빼놓을 수는 없다. 대부분 노는 패턴은 술에서 시작해 술로 끝난다. 처음 동기들과 술을 마시러 갔던 때가 떠오른다. 학기 초 3월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 앞에 신입생들이 와글와글 몰려있었다. 안 어울리는 코트를 입은 얼굴 넓은 친구가 “너도 마시러 가자”고 해서 따라간 곳은 우리학교 앞 대표 술집, 안주 3000천원의 ‘주향’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술집 위층이 나의 첫 자취방이었다. 그 허름하고 좁은 술집에 서로 잘 모르는 열댓 명이 둘러 앉아 술게임을 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취해갔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나는 집에 있다가도 친구들이 내려오라고 하면 쪼르르 내려와 술을 마시곤 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계단을 더듬어 올라가 쓰러져 잤다. 나는 그때 내가 술이 센 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좋은 것이라도 되는 양 생각했다. 아주 어리석었다.



3. 

지금 생각해보면 참 쓸데없는 짓들을 한 것 같다. PC방에서 총질하며 사람을 죽이는 일은 생태학자를 꿈꿨던 내가 할 짓이 아니었다. 정서에 전혀 안 맞았다. 당구 또한 마찬가지로 내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노래방은 역부족이었다. 또 지금까지 나는 소주가 맛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쫄래쫄래 몰려다니며 이런 짓들을 했던 것은 왜일까? 왜 밤을 세워가며 별로 재미도 없어 보이는 놀이문화에 굳이 끼어보려 했던 것일까?


대학생이라는 시기가 특이한 것 중 하나는 잘 노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 미덕일 수 있다는 점이다. 중·고딩 때는 ‘쟤는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해’라는 말에서처럼, 공부 잘하는 것이 전제 되어야만 잘 노는 것이 미덕이 될 수 있었다. 직장인들에게도 일을 못하면서 놀기만 잘하는 것은 전혀 칭찬거리가 아니다. 반면 대학생은 노는데 있어서 성적을 묻지 않는다. 잘 노는 게 우선이다. 아직까지도 ‘대학 가서 맘껏 놀아라’라는 고전적 잔소리가 유효하다. 단지 잔소리일 뿐만 아니라 당사자들도 대학 가서 놀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참고 공부한다. 그렇게 대학에 가면 잘 노는 사람이 멋있고, 놀 줄 알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나도 그랬다. 잔소리를 듣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대학만 가면...’하고 기대하며 노는 것에 대한 욕망을 미래에 투사했다. 그곳이야말로 노는 무대이고, 그들의 놀이가 노는 것의 정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작년 여름, 한참 건강미(?) 넘치던 상병 성민호는 휴가 때 친구들과 캐리비안베이에 갈 기대로 잔뜩 들떠 있었다. 그러나 부대 사정으로 휴가가 밀리면서 야심찬 계획은 무산되고 쓰디쓴 좌절을 맛보았다. (민호의 난중일기 7화 참조) 그리고 그 뒤로 지금까지 놀아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역시 내 일상에서 놀이는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갖춰야만, 특정 누군가가 있어야만, 어디를 가서 신박한 무엇을 해야만 노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딘가에 제대로 된 놀이가 있다는 생각.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수험생 때라고 해서 숨만 쉬고 공부만 했었나? 공부를 하지 않던 시간에는 뭘 했던 거지? 심지어 공부한다고 앉아 있던 와중에도 뭐가 좋은지 킬킬대고 있던 순간들이 많았다. 군대에 있었다고 해서 땅만 파고 멍때리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그때도 그때 나름대로 신났던 일, 숨도 못 쉬게 웃겼던 일, 흥겨웠던 일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시기들을 노는 것과 관련 없던 시기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과연 논다는 것이 특정 조건을 갖춰야만 가능한 것일까? 대학가가 아니면, 캐리비안 베이가 아니면 우리는 과연 놀 수 없는 것일까?




나의 별명은 ‘TMT, 투머치토커’이다. 쉬지 않고 말을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하루에도 수없이 웃고 떠들고 있지 않나. 음악을 듣고, 산책을 가고, 시답잖은 ‘아무말’을 내뱉고 있는 순간들을 나는 지금까지 뭐라고 생각하고 있던 거지? 나는 뭔가 더 대단한 놀이, 더 인싸다운 놀이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대학생이라면 놀 줄 알아야 한다는 강박과 잘 놀수록 멋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GD의 노래가사처럼 ‘진짜 놀 줄 아는’ 모습이 어딘가에 있다고 상상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내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그런 ‘진짜놀이’에 대한 생각은 스스로 자신을 놀지 못하고 놀 줄 모르는 녀석으로 만들고 있었다. 놀이로부터 내가 배제당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놀이에 대한 관념이 내 일상의 순간들을 배제시켜온 것이었다. 지금 이 마지막 문장을 고민하면서도 쉼 없이 떠들고 있는 내 입을 미처 보지 못하고.


글_민호(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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