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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카프카와 함께

카프카 읽기 - 시간의 미로, '지금'의 폭발

by 북드라망 2018. 7. 5.

시간의 미로, '지금'의 폭발



허무를 향해 쏘아올린 화살


고대 그리스인들은 서양의 전통적 시간표상을 규정했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점들이 무한히 이어진 양적인 연속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원환(圓環)으로 표현했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시간을 ‘이전’과 ‘이후’에 따라 측정되는 운동 지수로 규정했습니다. 시간이 기하학적 점과 유사한 비연장적인 시점(지금)으로 나뉨으로써 연속성을 보장받는다고 본 것이지요. 여기에서 시점은 그 자체로 시간 연속성의 지표가 됩니다. 과거와 미래를 결합하는 동시에 분리시키는 순수한 경계로서 말이예요. 이후 서양에서는 그리스적 원환을 대신하여, 직선으로 구현된 기독교적 시간 이미지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시간은 창조로부터 종말로 향해가는 비가역적 연속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이후, 서유럽을 시작으로 기독교적 시간의 세속화가 일어났지요. 창조는 시원의 시간이 되고, 종말은 진보의 저 먼 끝이 되었습니다.




‘지금’이란 어떤 시간일까요? 그리스적 시간과 기독교적 시간은 모두 시간이 연속한다는 사실을 공유했습니다. ‘지금’은 늘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었지요. 그런데 근대에 와서 ‘지금’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긴 하지만 그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지금을 천계가 구현하고 있는 영원이나 종말 이후의 구원으로 가는 사다리로서 긍정하기가 불가능해졌거든요. 왜냐하면 진보를 향한 기투 속에서 ‘미래’가 끝도 없이 미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더, 더! 매순간 창출해야 할 발전이 새롭게 제시되었고, 미래가 도래한다는 것은 사실상 ‘진보의 종말’로서 거부되었습니다. 그런 시간관 안에서 ‘지금’은 극복되어야 할 과거와 유예된 미래로서의 의미 이상을 갖지 못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늘 부정되어야 했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일상 속에서 느꼈던 끝도 없는 허무는 이런 ‘지금’의 느낌이었지요. 근대인은 떨쳐버려야 할 과거와 이루지 못한 미래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매순간 불안과 허무를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Never ending Before


그런데 카프카는 「법 앞에서」에서 ‘지금’을 허무하지 않게 창조해냈습니다. 이 작품에도 일단은 매순간 미래로 건너가지 못하는 ‘지금’의 상태가 나옵니다. 그래서, 법 너머를 꿈꾸는 시골 사람의 처지가 제논의 역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제논은 날아가는 화살이 괘도상의 여러 지점들을 통과하는 것이라면, 화살이 각각의 지점 위에 있을 때에는 틀림없이 멈춰 있는 셈이며, 따라서 화살은 전혀 움직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을 수없이 분할된 시간의 한 지점으로 본다면, 그 지점에서 서 있는 인간은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셈이지요. 시골 사람도 문지기로부터 계속 같은 말만 들었습니다. “지금은 안 돼!” 문지기는 시간을 줄기차게 끊어내면서 시골 사람을 가로막았습니다. 결국 시골 사람은 이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 법 앞에 한 문지기가 서 있다. 이 문지기에게 한 시골 사람이 와서 법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그에게 입장을 허락할 수 없노라고 말한다. 그 시골 사람은 곰곰이 생각한 후, 그렇다면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가능한 일이지” 하고 문지기가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안 돼.”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언제나처럼 열려 있고 문지기가 옆으로 비켜났기 때문에, 그 시골 사람은 몸을 굽혀 문을 통해 그 안을 들여다보려 한다. 문지기가 그것을 알자 큰소리로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그렇게도 끌린다면 내 금지를 어겨서라도 들어가보게나. 그러나 알아두게. 나는 힘이 장사지. 그래도 나는 단지 최하위의 문지기에 불과하다네. 그러나 홀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하나씩 서 있는데, 갈수록 더 힘이 센 문지기가 서 있다네. 세 번째 문지기의 모습만 봐도 벌써 나조차도 견딜 수가 없다네.” 시골 사람은 그러한 어려움을 예기치 못했다.(「법 앞에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골 사람이 초조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그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겠습니다. 그가 지금의 너머 즉, 미래로 건너가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시골 사람은 매 순간의 문턱에서 문지기와 함께 다른 일상을 구성했어요. 그의 콧수염을 관찰했고, 그의 옷감을 만져보았지요. 나중에는 자신의 노쇠함과 뒤틀림을 앞세워 문지기의 몸뚱아리를 비틀기도 했습니다. 카프카는 사소하고도 미세한 수준의 사건사고가 이 시골 사람의 주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골 사람의 모든 움직임, 그가 펼쳐낸 각각의 시간은 최종적으로 하나의 질문으로 힘차게 집약되었지요.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가?’


그렇습니다. 시골사람은 문지기가 주는 겁을 무시하고, 열린 문으로 나아가버릴 수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는 현재를 거절하는 진보의 선고 앞에서, 직선밖에 모르는 시간관 자체를 거절했습니다. 과거를 부정하면서, 미래로부터는 유예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통해하기보다는 차라리 아이처럼! 그는 과거와 미래를 손 안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기로 했어요. 아이들은 기억의 짐을 지지 않아서, 미래의 자력에 끄달리지 않아서 가볍습니다. 그들은 유물(사물의 과거)이라는 이유로 사물을 존중하지도 않고, 목적(사물의 미래)에 대상을 복속시키지도 않습니다. 할머니의 은비녀도, 아버지의 카메라도 아이들에게는 길가의 돌맹이나 다름없을 뿐.  펑펑 울었다가도 돌아서면 까르르인 아이들에게 시간이란 언제나 '지금' 뿐입니다. 카프카는 단선적 시간관 밖에서 진보를 믿는 모든 이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오드라텍 같은 존재를 창조하기도 했지요.(「가장의 근심」) 시골 사람도 ‘지금’이라는 바로 이 순간이 더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도 단 하나의 빛으로 인도되는 문 앞에 고개를 수그리기 보다는, 매번 다른 미래가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지금'을 만들면서 살기로 했던 것이지요.




# 지금 모피 외투를 입은 그 문지기의 모습, 그의 큰 매부리코와 검은색의 길고 가는 타타르족 콧수염을 뜯어보고는 차라리 입장을 허락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결심한다. 문지기가 그에게 걸상을 주며 그를 문 옆쪽으로 앉게 한다. 그곳에서 그는 여러 날 여러 해를 앉아 있다. 들어가는 허락을 받으려고 그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자주 부탁을 하여 문지기를 지치게 한다. 문지기는 가끔 그에게 간단한 심문을 한다. 그의 고향에 대해서 자세히 묻기도 하고, 여러 가지 다른 것에 대해서 묻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체 높은 양반들이 건네는 질문처럼 별 관심 없는 질문들이고, 마지막엔 언제나 그에게 아직 들여보내줄 수 없노라고 문지기는 말한다. 그 시골 사람은 여행을 위해 많은 것을 장만해 왔는데, 문지기를 매수할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용한다. … 그는 어린애처럼 유치해진다.(「법 앞에서」)


‘나는 왜 여기에 있나요?’라는 시골 사람의 질문에 문지기는 이렇게 답합니다. “이곳에서는 너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받을 수 없어.” 문지기의 답이 뜻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너의 시간은 오직 너의 것! 과거도 미래도 지금 이순간 구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문지기는 모두에게 주어진 균질적 시간이란 없음을, 모두에게 허락된 똑같은 삶이란 있을 수 없음을 알려주었습니다. 미래 앞에 놓인 이 '지금'은 수만개의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그 어떤 미래에게도 내어줄 수 없는 소중한 가능성들을 향해 자신을 활짝 열었기 때문에, 시골 사람은 법 앞에서 그토록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만리의 벽, 만방의 질문 


카프카의 세계에서 시계는 원운동도 직선운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과거는 미래의 원인이 아니며, 미래는 과거의 목적이 아닙니다. 『성』에서 K는 백작님이 계신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기를 쓰지만, 그가 왜 고향 마을을 떠나 이런 여정을 시작하는지는 카프카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K의 ‘지금’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방향이 펼쳐지고, 죽은 자와 태어나지 않은 자가 갑자기 튀어나와 사건을 일으키는 무대가 되지요. K는 매순간 새롭게 펼쳐지는 방향 앞에서 놀라움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K와 시골 사람의 ‘지금’을 더 탐구하게 해주는 작품은 「만리장성의 축조」입니다. 중국 시황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에서, 사람들은 모두 만리장성의 축조라는 원대한 사업에 일생을 걸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만리를 쌓는 방대한 기획이다보니 황제는 어느새 돌아가시고 없고, 새로 임명된 설계사는 아직 도착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황제의 명을 전달해줄 칙령사도 어딘가의 성문을 두드리는 중입니다. 덕분에 장성 주변에서는 이런 시간이 펼쳐지지요.


# 어느 누구도 이곳을 뚫고 나가지는 못한다. 비록 죽은 자의 칙명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 – 그러나 밤이 오면, ‘당신’은 창가에 앉아 꼭 그렇게, 그렇게 희망 없고 또 그렇게 희망에 차서, 우리 백성은 황제를 바라본다. 어느 황제가 통치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또한 왕조의 이름마저 확실치 않다. 학교에서 그 비슷한 많은 것을 순서대로 배웠지만 이 점에서는 너나없이 워낙 불확실하다 보니 최우수 학생마저 불확신에 휩쓸리게 된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은 황제들이 우리 마을에서는 왕좌에 앉혀지고, 노래 속에나 살아 있는 이가 방금 포고를 발하여, 그것을 사제가 제단 앞에서 읽어준다. 고대 역사의 싸움이 여기서는 이제야 비로소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웃 사람이 이글거리는 얼굴로 그 소식을 가지고 당신 집으로 뛰어든다. 비단 금침에 묻혀 호식이 지나친, 황제의 여인들은 교활한 내시들로 인해서 고귀한 법도로부터 멀어졌고, 야심에 가득 차고, 탐욕에 들뜨고, 음탕함으로 널리 알려진 그네들은 아직도 새로이 거듭거듭 비행을 자행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든 빛깔들은 끔찍스럽게 빛을 발한다. 수천 년 전의 어느 황후가 남편의 피를 천천히 들이켰다는 이야기를 언젠가는 큰 비명을 지르며 우리 마을은 듣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과거의 지배자들을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고, 현재의 지배자들을 죽은 사람으로 섞기도 한다.(「만리장성의 축조」)


“수천 년 전의 어느 황후가 남편의 피를 천천히 들이켰다는 이야기를 언젠가는 큰 비명을 지르며 우리 말을은 듣게 될 것이다.” 천년 전의 황후는 ‘천천히’ 피를 들이키지만, 다급히 비명을 지르는 마을 사람들은 허둥지둥 바쁩니다. 마을의 시간은 엉망진창!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자신들의 지금은 언젠가 위대해지리라고. 카프카는 시간이 결코 일직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지금’은 각기 다른 과거와 미래가 충돌하고 부서지기를 기다리는 지점이라고요.




죽은 시황제의 백성들은 황제의 뜻이 찬란히 실현되는 미래를 믿었습니다. 그들은 '지금'의 다채로움을 알지 못했죠. 그럼 카프카의 '지금'을 만끽하는 자는 누구인가요? 여기서 우리는 만리장성의 제국을 소개해주는 화자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 작품의 화자, 만리장성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이 목소리. 이 유구한 중국 역사 속에서 오직 그만이 뒤죽박죽 엉킨 시간을 놀라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도 원래는 장성의 도장공이었어요. 열심히 성을 쌓던 와중에 문득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장성이 올라가는 여기저기를 돌며 다른 사람들의 생활을 보게 되었죠. 단 한 번의 관찰이 그의 삶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가?’


그때부터 그의 질문은 무한대로 늘어났습니다. 장성을 쌓고 싶은 황제의 욕망은 무엇인가? 인간의 본래적 천성이 어떠하길래 장성은 부분 축조술로 지어지고 있는가? 인간의 본성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습니다. 물어야 할 것은 끝도 없이 많아졌지요. 사람들이 여기저기 지어지고 있는 장성을 바라보며 그 원대함에 고개 숙일 때, 그는 한없이 깊어지고 끝없이 넓어지는 지금에 감탄했습니다. “나의 사고 능력이 나에게 지어놓은 한계는 물론 매우 좁고, 그러나 여기서 헤매어야 할 영역은 무한하다.” 만리를 약속한 벽 앞에서 질문을 던질 때, 그는 시간의 깊이와 넓이를 스스로 만드는 자로서, 시간을 가꾸는 자로서 자유로웠습니다. 삶을 무한한 가능성의 시공간으로 바꾸어낼 수 있는 자는, '지금'에 대해 질문하는 자뿐이었습니다.


아래의 인용문은 카프카 일기의 한 구절입니다. 카프카는 우리 모두가 시간의 원환 밖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거듭 강조했지요. ‘기원 없이, 목적 없이 살아갈 수는 없을까?’ 카프카는 질문으로 넘쳐나는 ‘지금’만을, 만 갈래의 방향을 긍정하는 자유의 순간을 원했습니다.


# 우리를, 다른 사람들인 우리를 그래도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유지해준다. 즉 우리의 무위도식 거의 전부를, 우리는 그들을 균형 속에 위아래로 흘러가게 하면서 우리 직업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가. 미래가 양에 있어서 우월한 것을 과거는 무게로 대체한다. 그리고 그들의 끝에서는 양쪽을 정말 더 이상 구분할 수가 없다. 가장 이른 청소년 시절은 나중에는 미래처럼 밝아질 것이고, 미래의 끝은 원래는 우리의 모든 탄식과 더불어 이미 경험한 것이고 과거인 것이다. 이 원은 이렇게 거의 완결된다. 우리는 이 원의 주위를 따라가고 있다. 이 원은 이제 우리들 것이다. 하지만 이 원은 우리가 붙들고 있는 동안에 한해서만 우리 것이다. 우리가 한 번만이라도 옆으로 비켜서면 이미 그를 공간 안으로 잃어버린 것이다. 어떤 자기망각 속에 그리고 경악으로, 놀라움으로, 피곤해서, 산만함 속에 비켜서게 되면 말이다. 이제껏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코를 파묻고 있었다. 지금 과거에 헤엄쳤던 사람이고, 현재 산책하는 사람인 우리는 물러섰고 실패했다. 우리는 법 밖에 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런데도 누구나가 우리를 법에 따라 취급한다.[일기, 1910]


글_오선민(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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