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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카프카와 함께

[카프카 읽기] K, 실종을 꿈꾸다

by 북드라망 2018. 5. 3.

K, 실종을 꿈꾸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카프카 하면 K가 떠오릅니다. 그가 유고로 남긴 미완의 세 장편에 나오는 주인공들 이름에는 모두 K라는 글자가 들어가거든요. ‘카알 로스만’, ‘요제프 K’, 그리고 ‘K’. 카프카는 점차적으로 각 인물의 고유성을 지워나간 것 같습니다. 이 세 명의 나이를 한 번 볼까요. 카알은 열 일곱 살, 요제프 K는 서른 살, 하지만 K의 나이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카알이 십대 청년인 것은 그가 아버지로부터 쫓겨날 수밖에 없는 처지라거나,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갈 것이라는 점을 암시해주는 장치가 됩니다. 하지만 요제프 K의 삼십 세는 어떤 상징이 있는지 작품을 통해서는 전혀 알 수 없고, K는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을 것처럼 무시간적 존재로 활약합니다.




이들의 직업을 비교해보면 점차로 익명성이 강화됨을 알 수 있습니다. 『실종자』에서는 카알이 호텔 엘리베이터 보이나 유랑극단의 수리공으로서 겪는 사건이 서사의 진행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요제프 K의 경우, 은행에서 가끔 상사나 고객을 만나기는 합니다만, 그의 주된 임무는 갑작스레 닥친 소송 문제를 해결하기. 그래서 직업이 그의 운명을 좌우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K는 측량사라는 직함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아예 땅과는 무관한 생활을 합니다. 그는 마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을 하고서, 나날의 일상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의 하루란 연애, 산책, 담소, 그리고 끝!


또한『실종자』에서 『소송』을 거쳐, 『성』에 이르면 역사적 시간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카알은 유럽 출신의 이민자였고, 『실종자』는 이민자의 비참한 처지나 사업가의 이기적인 착취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K가 간절히 만나고자 하는 베스트베스트 백작은 역사책에는 나오지 않는 무시간적 존재지요. 달빛이 미치지 않는 겨울 골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자는 왜 K여야 할까요? 그의 이름은 왜 점점 지워져야 했던 걸까요?


카프카의 다른 존재도 어느 정도는 익명적입니다. 출신, 직업, 친인척 관계는 대체로 삭제되어 있고, 인물의 성격이나 취향이 사건의 전개 변수가 되지도 않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싱클레어’처럼 철학하기 좋아하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마르셀’처럼 글쓰기에 목숨 걸고, 입센의 ‘노라’처럼 위선을 싫어하는 특별한 캐릭터는 없는 셈이죠. 사회에 소속된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무시간적 공간을 생활무대로 삼고 있습니다. 대형 로펌의 변호사는 소송 서류를 검토하기보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법전을 연구하고(「신임 변호사」), 장성의 기술공은 태곳적 황제의 칙령을 추적하고(「만리장성의 축조」), 사냥꾼은 죽은 채로 여행합니다.(「사냥꾼 그라쿠스」) 반면 신화 속 인물들과 소설의 주인공들은 공무원처럼 그려집니다.(「사이렌의 침묵」,「프로메테우스」,「포세이돈」, 「산초 판자에 관한 진실」)


인물의 성도 큰 변수가 되지는 못합니다. 대부분의 인물은 남성으로 나옵니다만 사실 그가 여성이라고 해도 크게 달라질 일은 없을 겁니다. 아니죠. 외판원이 갑충도 될 수 있는 마당에, 카프카는 남자와 여자라고 하는 성차로 구획된 영역을 자유자재로 뚫고 돌아다니는 것이 더 멋지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음, 아이들이 출현할 때에는 남자냐, 여자냐가 문제 되겠군요. 소년들이 아버지의 집에 유착되어 있는 반면, 소녀들은 사무실과 아뜰리에, 아파트 계단 등 좁은 공간을 비교적 다양하게 활용합니다. 어쨌든 작품 속 아이들은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어떤 강렬한 사건을 겪고 성숙해져서 어른이 된다는 콘셉트 자체가 이들에게는 없습니다. 아이들은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기로 작정한 듯 ‘잠자지 않는 자들의 도시’ 남쪽 나라로 훌쩍 떠나버리지요.(「국도의 아이들」) 이렇게 카프카의 주인공은 골목 여기저기에 개성이라는 겉옷을 툭툭 벗어던지면서 돌아다닙니다. 어디에나 볼 수 있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존재, K는 그런 자들의 이름입니다.



도전! 푸른 하늘


카프카가 익명의 중요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탐색한 작품은 『실종자』입니다. 『실종자』는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지요. 카프카가 가장 먼저 기획하고 썼던 장편 소설이지만, 막스 브로트가 제일 마지막에 편집 출판함으로써 가장 늦게 알려지기도 한 작품입니다.(1927년 출간, 『소송』(1925), 『성』(1927)) 카프카는 단편과 장편에서 각기 다른 테마와 스타일을 실험했는데요, 단편은 대부분 손바닥 하나 크기를 넘지않은 초소형인 반면, 장편은 모두 미완으로 남겨져 있어서 어마무시한 스케일을 암시합니다. 단편에서 시도한 실험 대부분이 장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요, 대표적으로 인물이 갑충이나 사물로 변신한다거나 하는 일은 장편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카프카는 『실종자』에 이후 「법 앞에서」나 「유형지에서」,『소송』과 『성』에서 더더욱 적극적으로 탐색하게 될 ‘법과 운명의 문제’를 씨앗처럼 심어놓았습니다. 그것이 ‘익명성’이라는 모티프이지요.


익명의 중요성은 작품 제목에서도 나타납니다. 막스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아메리카’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제목으로 붙였습니다만, 후에 카프카의 초고를 연구한 학자들은 카프카가 잠정적으로 이 작품에 ‘실종자’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것을 발견하고 제목을 바꾸어 책을 다시 출간했습니다. 카프카는 『실종자』의 초벌 원고를 1911년 겨울과 1912년 봄 사이에 썼습니다. 그런데, 3월 말까지 순조롭게 진행되던 글쓰기는 4월 1일에 갑자기 중단됩니다. 1912년의 일기와 막스에게 보낸 편지 곳곳에는 『실종자』쓰기의 어려움이 아래와 같이 토로되고 있습니다.


# 그 소설은 너무 방대해서, 마치 하늘 전체를 가로질러 스케치된 것 같아(또한 오늘 날씨처럼 색깔도 없이 불투명하고), 그래서 나는 쓰고자 하는 바로 첫 문장에서 혼란에 빠져들고 만다네. 이미 써둔 것의 황량함으로 인해서 스스로 놀라지 않아야겠다는 것, 그것 또한 이미 알아차렸어, 그리고 어제는 이 경험으로 많은 유용함을 얻었지.[막스 브로트 앞, 1912.7.12.; 강조는 인용자]

# 현재로선 그 소설 전체가 불확실해. 어제는 내가 나 자신을 다그쳐 제6장을 억지로 끝냈어, 그러니 조야하고 형편없이 끝냈지. 그 속에 그대로 등장했어야 할 인물 두 사람을 삭제했어. 글을 쓰는 동안 내내 그들이 나를 뒤쫓았고, 그리고 그 소설에서 그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주먹을 불끈 쥐게끔 되어 있었기에, 똑같은 제스처를 나에게 하더군. 그들은 내가 쓴 것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었네. 그런데 게다가 오늘은 아예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어, 쓰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이 다시 너무도 쑥 들어갔기 때문이야.[막스 브로트 앞, 1912.11.13.; 강조는 인용자]




카프카는 자신이 쓰고 있는 작품의 방대함에 압도되고 있었어요. 마치 푸른 하늘을 다 뒤덮어버릴 것 같은 실종됨의 넓이와 깊이라니요. 카프카는 실종된다는 문제의 중요성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었고, 더구나 자신이 그려낸 형상들이 앞으로도 끈질기게 자신을 추적하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들은 소설가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순수한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엄연히 살아서 우리를 붙잡고 흔들며 괴롭히는 실체들이었던 것이죠. 카프카는 쉬지 않고 도주해야 했던 카알만큼이나 자신도 위기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단정하듯 K는 정말 Kafka의 약자일까요? 실종되기를 꿈꾸면서, 마을에 소속되고도 싶은 양가감정을 카프카는 자신의 주인공으로 표현했던 걸까요? 물론 어쩌다 그가 하필 S나 H가 아니라 K를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카프카는 『실종자』를 쓰다가 작가로서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작가란 주제를 갈고 닦아 소설을 완성시키는 자가 아니라, 작품 안에서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려야 하는 존재란 것을요.


그럼 『실종자』 속으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을 굳이 장르로 분류하면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공간을 편력하면서 주인공이 자기 운명을 각성하기는 하니까요. 하지만 카알이 깨달은 미래는 안착이 아니라 실종이었지요. 그는 작품 마지막에 스스로를 ‘니그로’라고 부릅니다. 사실 ‘니그로’는 이름도 아니지요. 게다가 흑인이라니, 유럽 출신의 백인이 왜 그런 호칭을 쓴단 말입니까? 그런데 ‘자유롭기 위해선 이름을 던져버려야 한다’는 카알의 결심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카알은 세 번에 걸쳐 ‘이름’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우선,『실종자』에서는 ‘호명’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누군가가 카알에게 이름을 묻고 그가 답할 때마다 생활공간이 완전히 달라져버리거든요.


# “당신 이름이 뭐예요?” 집요한 이 남자의 돌발적인 질문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한 본론에 유리하다고 생각한 카알은, 습관대로 자신이 가까스로 찾아내었던 여권을 제시하는 것으로 자기 소개를 대신하지 않고 간단히 대답했다. “카알 로스만이에요.” […]


“설마.”하고 야콥 씨는 되풀이하더니 약간 굳은 결음걸이로 카알을 향해 걸어왔다. “그러면 내가 너의 외삼촌 야콥이고 너는 나의 귀여운 조카야. 이곳에 줄곧 있는 동안 예감이라도 했겠어요?” 하고 야콥 씨는 선장 쪽을 보고 말하고 나서, 카알을 껴안고 키스를 했다.(『실종자』)


야콥이라 불리는 남자가 카알의 외삼촌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녀는 카알이 자신과 은밀히 관계해서 아들을 낳았으며, 그 때문에 미국으로 쫓겨난 거라는 소식을 외삼촌에게 알렸다고는 합니다. 그러나 드넓은 아메리카 대륙에 야콥 씨가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하녀와의 치정이야 흔하디흔한 사건인 걸요. 그런데 어머니와 같은 성을 가진 한 남자가 카알의 이름을 호명한 순간, 그들은 곧바로 가족이 됩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호명의 한 순간이 온천지에 널린 이름들 중 하나를 꽃으로 바꾸어내지요. 카알은 그렇게 꽃이 된 덕분에 한낱 이민자에 불과했던 처지에서 벗어나, 여권심사도 거치지 않고 뉴욕 최상류층의 일원이 됩니다.


그리고 상원의원 외삼촌은 어마어마한 특권을 카알에게 주었습니다. 따뜻한 온수가 24시간 나오는 욕실과 포근한 침대, 최고급 영어 과외, 승마와 음악같은 갖가지 교양 수업! 성이 같다는 그 이유 하나로 외삼촌은 자신이 일군 모든 것을 카알에게 하사합니다. 하지만 공짜 점심은 없는 법! 꽃 같은 삶에는 대가가 있었습니다. 열일곱살의 카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하나의 일탈 때문에 벌어진 사건! ‘예쁜 아가씨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다!’ 카알은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를 깨알같이 말하고, 외삼촌은 집에서 해야 할 일을 수도 없이 열거하는 식으로 외출 심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카알은 심사 중간에 허락없이 스윽 대문을 나서버렸습니다. 결국 삼촌은 ‘다시는 얼굴 볼 일 없길 바란다’며 돌아오지 말라는 최후의 편지를 보내왔지요. 헉!


카알은 진정 당황스러웠습니다. 자신이 꽃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외삼촌이 그렇게 불러주었기 때문이지, 그 자신의 덕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죠. 카알은 삶이 누군가의 부름에 좌우된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허락없이 아이를 낳았다고 유럽에서 쫓겨났고, 허락없이 외출했다고 집에서 버림받다니! 카알의 안락은 겨우 “내 말을 안들으면 쫓겨날 줄 알아!”라는 으름장의 테두리 안에 놓여 있었던 것이죠. 이름을 부여받는다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기입된다는 뜻, 딱 그만큼의 반경을 허락받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너머를 욕망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심사와 허락이 필요한!


어째서 내가 쫓겨나야 하는 거지? 먹이고 입혔다는 이유로 나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가? 일찍이 카프카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고압적인 태도를 문제 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밤늦게까지 책을 읽어서는 안된다’는 식의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요구만큼 부당한 것은 없었어요. 세상의 다른 아이들은 아홉 시 전에 잔다는 이유, 아이는 무조건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이유, 그 어떤 것에도 늦도록 책을 펴고 싶은 한 존재를 설득할 힘이 없다는 것이죠. 결국 부모는 으름장을 놓거나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그 권위의 억지스러움을 증명한다는 겁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이름을 주면서 자식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로구나! 카프카는 ‘카프카’로 불릴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이름 없이 살 순 없지만, 이름이 주는 굴레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저는 이것이 카프카의 중요한 화두였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을 넘어, 수치를 깨고 


다시 카알에게 돌아오겠습니다. 카알은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결정하기 위해서 스스로 벌어먹기로 했습니다. 길은 취직에 있도다! 그래서 옥시덴탈 호텔의 엘리베이터 보이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혈연이나 지연의 그물에 걸리지 않기 위해, 면접을 앞두고 자신의 이력을 조작했습니다. ‘나는 독일이 아니라 보헤미아의 프라하 출신이랍니다!’ 재능과 성실함을 뽐내리라! 카알은 엘리베이터 보이라는 직분에 충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밤에는 몰래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구요.


하지만 오래지 않아 승진이란 ‘애초불가’ 임을 알게 됩니다. 한없이 촘촘하고 끝없이 뻗어있는 진급의 사다리는 이미 샐 수도 없는 사람들로 꽉 채워져 있었고, 그 안에서 발휘되는 성실함과 재능은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입니다. 호텔의 지배인, 수석 요리사, 상류층 손님 그 누구도 부지런한 카알과 약삭빠른 래널을 구별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일주일 내내 엘리베이터 기둥을 닦아가며 근무했지만, 단 한 번의 지각조차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전체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조각 하나하나가 다 제자리를 지켜야 하니까요, 불성실은 죄 중의 죄였어요.




그런데 사실 직분의 충실이나 재능의 성장을 따져 묻는 호텔 문지기들은 시각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 각자는 모두 다른 스케줄을 갖고 있었고, 한 번에 모든 일을 감시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어요. 때문에 감시의 사각지대는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암흑지점에서 서성였다면,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그는 벌을 받아야 했지요. ‘헤이! 거기 엘리베이터 보이!’ 이렇게 직함으로 불리는 삶이란 모순투성이인 감시와 처벌을 끊임없이 인내하는 일이었습니다.


카알은 커다란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호텔의 수위장은 갑자기 카알의 옷을 뒤지기도 했어요. 그의 행적을 파헤쳐야 한다면서요. 그는 카알을 수위실에 가둬놓기도 했습니다. 상사에게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요. 타인의 몸을 마구 헤집는 저 무례함! 수위장 폭력 앞에서의 이 무력감! 직함을 부여하고 위신을 세워주는 제도 속 자립은 비굴함을 견디는 재주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 “너는 샅샅이 검사를 받아야 해.” 벌써 수위장은 카알의 웃옷 주머니에 손을 억지로 집어넣었다. 그래서 옆 바느질이 터졌다. “여기에는 아무 것도 없어.”라고 그는 말하고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주머니 속에서 나온 내용물을 구분했다. 그것은 호텔의 광고용 달력, 상업 통신무의 문제가 적힌 종이, 몇 개의 웃옷 단추와 바지 단추, 여주방장의 명함, 한 손님이 트렁크를 챙길 대 던져준 손톱 다듬기, 레널이 자신을 대신해서 열 번 정도 근무를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한 낡은 손거울 그리고 몇 개의 사소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이건 쓸데없는 것이야.”라고 수위장이 되풀이하여 말하고 모든 물건을 의자 밑으로 던져버렸다. 마치 그것들이 훔친 것이 아닌 이상 의자 밑에 두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는 그 물건을 의자 밑으로 던졌다. “그러나 이건 너무해.”라고 카알이 혼잣말을 했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수위장이 탐욕에 눈이 멀어 주위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카알의 두 번째 주머니를 뒤질 때 카알은 단숨에 소매를 뿌리치고 누구에게도 제지당하지 않고 단숨에 펄쩍 뛰어 수위보 한 명을 상당히 강하게 전화기 쪽으로 밀어붙였다.(『실종자』)


“이건 너무해” 카알은 더는 참을 수 없었고, 참으로 조심스럽게 호텔을 탈출했습니다. 소란을 피우면서 나가려고 하면 지배인이며 경찰들이 들이닥쳐 여기저기서 ‘엘리베이터 보이!’라고 불러댈 것이 뻔하니까요. 호텔을 나오자마자 카알은 아예 이름을 감추었습니다. 옥시덴탈 호텔의 카알이라는 것이 알려질 경우, 이력서가 필요한 곳에서나 운 나쁜 불심검문에서 왜 도망쳤는지를 설명해야만 할 테니까요. 그렇게 다시 호텔과 엮이면서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도망자로 살 수도 없지요. 소속 없는 삶,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존재가 받는 취급이라야 뻔할테니까요. 가족도 회사도 없고, 남루한 옷차림에 기약없이 굶어가며 경찰을 피해다니는 자를 어떤 시선으로 보겠습니까? 도망자는 이웃을 사귈 수도, 사랑을 할 수도 없을 겁니다. 이름이 없는 삶은 매인 데가 없어서 자유로운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초라했습니다.


카알은 어떻게든 누군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의지해서 국면과 국면을 돌파해 가야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호명되기를 무조건 거부해서는 안돼. 하지만 아버지가 부여하고, 문지기가 허락한 이름이어서는 안 되지. 그럼 이건 어때? 복수의 이름을 갖거나 때때로 이름을 바꾸면 되지 않을까?’ 카알은 도망자 신세인 자신을 이용해 먹는 탐욕스런 부루넬다의 아파트 발코니에서 밤늦게 공부하는 하인 청년을 만난 뒤, 비로소 하나의 전략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청년은 말그대로 주경야독하며 살면서 학업의 요구와 주인의 명령 양쪽을 거침없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호명의 두 체계는 청년의 일상 속에서 뒤죽박죽 교란되었지요. (‘이름의 중첩’이라는 이 테마는 나중에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으로 이어집니다.)



실종자의 탄생 


결국 카알은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는 유랑극단의 단원이 될 것을 결심합니다. 카알이 어떻게 브루넬다의 아파트에서 오클라호마 극장으로 이동하게 되는지, 그 계기와 방법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실종자』가 미완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카알이 베란다의 청년과 만나고 난 장면 뒤부터입니다. 카프카는 이 지점에서 카알의 과제가 갖는 무게를 실감한 것 같습니다. 그는 이후에 카알의 ‘그 후’를 그려보기도 했지만, 장면들을 잇고 전체를 재조명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카프카는 카알이 스스로를 ‘니그로’라고 정의하는 데까지는 그려내었습니다. 카프카에게 모든 일은 오클라호마 극장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왜일까요? 사실 ‘오클라호마 극장’은 카프카 최후의 주제인 예술의 문제가 처음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카프카는 ‘유랑’, ‘무대’, ‘예술가’, ‘단식’ 몇 가지 모티프의 씨앗을 뿌려보기는 합니다만, K의 운명이라는 주제가 워낙 방대해서 예술의 문제를 더 파고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자, 오클라호마 극장입니다. 극단에서는 언제나 단원을 모집하지만, 항상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이 극장 자체가 움직이고 있지요. 이 고장과 저 고장 ‘사이’야말로 이들의 자리입니다. 카알은 면접에서 자신을 ‘니그로’로 소개합니다. 그러자 곧장 심사관들 중 한명으로부터 ‘저 사람은 니그로가 아니야’라는 말을 듣지요. 하지만 본인이 스스로를 밝혔으므로 서류에 ‘니그로’라고 기입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요. 그러나 문서 위의 그는 흑인이어도, 현실의 그는 백인이지요. 이름과 대상의 불일치! 누군가 ‘니그로’라고 부르면 그를 포함해서 다른 흑인들이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이름의 복수성!


게다가 니그로는 이민자. ‘니그로’라는 집합 명사는 ‘이주’를 둘러싼 다채롭고 능동적인 뉘앙스를 갖고 있었습니다. 카알은 누구도 불러줄 수 없는 자가 되기보다는, 움직이는 곳 어디서나 대답할 수 있는 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실종이란 억울한 이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었던 거예요! 그는 자랑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의 무대를 끊임없이 바꾸어가며, 떠나오고 떠나가는 자들 속에서의 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카알은 실종자! 그 누구와도 영원을 약속하지 않는 자, 그래서 어떤 제도의 그물에도 완전히 걸리지 않는 자!




# 카알은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지금 밝혀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그는 순간적으로 어떤 다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지난번 직장에서 불린 이름을 말했다. “니그로입니다.” “니그로?” 라고 부스 책임자가 묻더니 고개를 돌려 마치 카알이 이제 더 이상 믿지 못할 최고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 되었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서기도 한참 동안 조사하듯이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서기는 되풀이하여 “니그로.”라고 말하면서 그 이름을 기록했다. “설마 니그로라고 기록하지는 않겠죠?”라고 부스 책임자가 서기에게 야단치는 말투로 말했다. “아뇨, 니그로라고 기록했어요.” …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반하여 어떤 것도 할 수 없어서 자리에 앉으며 “저 사람은 니그로가 아니야.”라고 말했다.(『실종자』)


글_오선민(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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