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아빠는 '응'과 '아니' 사이를 왕복할 생각이 없단다
(단단히 각오해 둬야 할거야)
우리 딸은 요즘, 하루에 서너번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아으응’ 한다. 그러니까 ‘그거 하기 싫어요’쯤 되는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한다. 처음엔 아빠도 ‘쟤가 왜 저러지’ 했지만, 금방 알아차렸다. 그리고 놀랐다. ‘쟤가 저걸 어디서 배운 거지’ 싶어서다. 엄마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싫다’는 의사를 표현할 때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경우가 잘 없다. 우리는 거의 말로만 ‘싫어’, ‘아니야’ 따위의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배운 걸까? 처음엔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엄마와 아빠가 대화를 하거나 할 때는 말로 아니고, 싫고 하지만, 우리 딸의 비행(非行)을 지적할 때는 ‘아니야’, ‘안 돼’ 하며 고개를 흔들었던 것이다! 세상에 그걸 보고 배우다니. 아기는 그렇게 의사를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구나.
여하간 우리 딸이 ‘아니야’를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그에 따른 장단점들이 생겨났다. 좋은 점은 예를 들면 밥을 먹으면서 물컵을 눈앞에 가져다주면 자기 의사에 따라 마시거나 고개를 흔들거나 하는 식으로 ‘주거니 받거니’가 된다는 점이다. 안 좋은 점은 어쨌거나 제 의사를 거의 ‘언어’에 가깝게 표현할 수 있게 되다 보니, 아빠가 예전처럼 아빠의 일정에 의거하여 딸의 의견을 가뿐하게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래 사진을 보자.
이 사진 속 상황이 무언가 하니, 낮잠을 잘 시간에 안 자겠다며 드러누워 고개를 도리도리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식이다. ‘아기는 이제 자야지’ 하며 아빠가 아기띠를 두르고 있으면 벌러덩 드러누워선 ‘아으응’ 하며 고개를 흔든다. 예전엔 그냥 안아 올렸을 때 살짝 버둥거리는 수준이었다. 물론 아빠는 그게 ‘지금은 자기 싫어요. 더 놀고 싶어요’라는 의사를 표현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아빠는 널 재우고 방도 닦아야 하고, 세탁기도 돌려놓아야 하며, 잠깐이지만 낮잠도 좀 주무셔야겠다 하며 재우곤 했었다.(이 자리를 빌려 아이폰 앱 ‘딥 슬립 소리’에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이제는 그게 잘 안 된다. 사실 의사를 표현하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은데, 표현이 ‘언어’에 가까워지자 마음대로 휙 해버리기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래도 아빠는 방도 닦아야 하고, 세탁기도 돌려야 하며, 낮잠도 좀 자야 하므로 재우기는 재운다. 대신 나름의 설득을 시도한다. 아기띠를 허리에 두르고, 아기를 싸는 부분을 팡팡 치면서 ‘딸아 이제 자야지’, ‘한숨자고 놀자’ 등등 설득의 말을 건네어 본다. 그러면 딸은 서너 차례 거부의사를 표시하다가, 갑자기 만세하듯 양팔을 척 들어올린다. 그 몸짓은 ‘날 안으시오’인데, 중간과정이 없다. 아빠의 설득에 지쳤다거나, 체념했다거나, 설득과 거부를 주고 받다보니 갑자기 졸려졌다거나 하는 그런 게 전혀 없다. 계속 거부할 듯 굴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자겠소’ 하는 것이다.
짐작건대 딸이 자랄수록 ‘아니요’와 ‘알았어요’ 사이, 그러니까 현재까지는 몹시 뜬금없는 그 공백이 다양한 말들로 채워지지 않을까 싶다. 아니지, 그 사이를 얼마나 ‘다양한 말들’로 채우느냐가 중요할 듯싶다. 말하자면 그 사이에 자리 잡을 말들의 다양성에 아빠와 딸의 관계, 그 성패가 갈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에 무수한 아빠와 딸들이 그저 ‘아니’와 ‘응’ 사이만 오가고 있지 않나. 나와 우리 딸도 그럴 수 있겠지만, 아빠는, 여느 아빠와는 다르다고 자부하는 이 아빠는, 결코 그리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게 아빠가 대충 뭉개며 안아올리지 않고, 아기띠를 팡팡 치며 나름의 설득을 시도하는 이유다. 그렇다. 이 세계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대화하는 수밖에 없다. 흑.
_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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