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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서당개삼백년

“누가” 나를 좋아하는가, “누가” 나를 싫어하는가

by 북드라망 2018. 5. 9.

“누가” 나를 좋아하는가, “누가” 나를 싫어하는가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자공문왈 향인개호지 하여


자공이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좋아한다면 어떻습니까?”



子曰 未可也

자왈 미가야


공자가 말했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



鄕人皆惡之 何如

향인개호지 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싫어한다면 어떻습니까?”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자왈 미가야 불여향인지선자호지 기불선자오지


공자가 말했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 마을 사람들 중 선한 사람이 그를 좋아하고, 그 중 선하지 않은 사람이 그를 싫어하는 것만 못하다.” - 〈자로〉편 24장



=글자 풀이=

=주석 풀이=

《논어》를 읽으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모르던 여러 모습을 알게 된다. 그 중 하나가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는 나‘다. 하지만 공자의 말에 힘입어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던 마음을 다잡다보니, 평소에 내가 얼마나 칭찬과 꾸지람에 쉽게 흔들렸는지를 알게 됐다. 그럼에도 타인의 시선은 여전히 큰 문제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기는 하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선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또 시선에 끌려 다니기도 싫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논어》에 그려진 자공을 생각해보면 공자의 다른 제자보다도 인정욕망이 큰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자가 자천(子賤)을 군자(君子)라고 평한 것을 보고 자신은 어떤 인물이냐고 물어보는가 하면(子貢問曰 賜也 何如 - 〈공야장〉편 3장), 자하와 자장 중 누가 나은지를 묻는(子貢 問 師與商也孰賢 - 〈선진〉편 15장) 등 자공은 사람들을 자주 비교해서 묻곤 한다. 이러한 질문들을 계속 한 것은 자공 자신이 스승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질문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에 대한 얘기다. 주희에 따르면, 이 질문은 현(賢)에 대한 것이다. ‘현’이란 ‘높은 인격’이라고 풀 수 있다. 그러니까 자공은 마을 사람들 ‘모두’로부터 사랑받거나 미움받는 것이 높은 인격과 연결되는지를 물어본 것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특히 재테크와 언어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던 자공은 공자의 사신으로 활약하여 노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적도 있다. 아마도 이러한 능력 덕분에 자공은 뛰어난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하면서 자공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鄕人皆好之 何如)”라고 물은 듯한데, 여기에는 스승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하는 자공의 기대가 담겨 있다. 그러나 공자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未可也).”는 말로 자공의 기대를 깨버린다. 즉, 공자는 사람들 ‘일반’으로부터 타인의 인정을 얻었다고 해서 그를 ‘인격자’로 볼 수는 없다는 경계의 뜻을 전한 것이다.


특정 시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식으로서, 젊은이로서, 원대한 뜻을 품은 ‘지사’로서 등등 여러 위치 속에서 타자와 관계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관계를 고민한다는 것은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과 답을 도출해야 함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직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자신의 행동과 마음이 어떤지를 점검할 수 있다.


자공이 말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는 것”은 나름 자신의 위치에서 적절히 잘 실천한 결과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공자는 충분하지 않다고 얘기한 것일까? 주희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는 것”을 “반드시 구차하게 영합(迎合)하는 행실이 있어서일 것”이라고 풀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행동을 하면 된다. 가령, 탐욕스런 사람에게는 그의 탐욕에 동조해주면 되고, 시기와 모략을 하는 사람과는 함께 다른 사람을 험담하면 된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는 것”은 인격으로 사람의 마음을 감화한 결과가 아니라, 모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속인 결과인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싫어하는 것(鄕人皆惡之)” 역시 마찬가지다. 주희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싫어하는 것”을 “반드시 좋아할 만한 실상이 없어서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지사(志士)는 자신의 뜻을 굳게 지키는 와중에 소인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꼭 ‘지사’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의 마음도 얻지 못한다는 것은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자기고집을 강하게 고수한 결과일 뿐이다. 요컨대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는 것”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싫어하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세계를 확장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수동적이다. 때문에 공자는 인정 여부가 아니라 누구와 관계를 맺고 맺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얘기한 것이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훌륭하도다(賢哉)”, “군자로다(君子哉)”처럼 인격을 칭찬하는가 하면, “비루하도다(野哉)”, “소인이로다(小人哉)”처럼 비난에 가까운 꾸지람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칭찬이건 꾸지람이건 여기에는 제자들을 생각하는 공자의 마음이 담겨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공자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마음이 분명하게 공부를 향해 있다면 격려하고 칭찬하지만, 자기욕심, 편안함, 이익에 눈이 멀었을 때는 꾸짖어 바로잡는다. 즉, 중요한 것은 칭찬과 꾸지람 그 자체가 아니라, 누구로부터 칭찬과 꾸지람을 듣는가이다.


《장자》 〈산목〉편에 “군자(君子)의 사귐은 맑기가 물과 같고, 소인(小人)의 사귐은 달기가 단술과 같다(君子之交 淡如水 小人之交 甘若醴).”는 구절이 있다. 물은 투명해서 속이 모두 보인다. 군자는 투명한 물처럼 사귐에 어떤 꿍꿍이도 가지지 않는다. 상대방을 통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소인은 관계의 중심이 자신의 이익이다. 단맛에 이끌려 마신 술을 그 단맛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더 이상 마시지 않듯이, 상대방이 자신의 욕심을 채워주면 상대방을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을 싫어하는 것이 소인의 사귐이다.


공자가 말한 “마을 사람 중 선한 사람이 그를 좋아하는 것”과 “마을 사람 중 선하지 않은 사람이 그를 미워하는 것”도 같은 얘기다. 선한 사람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사욕(私欲)을 투사하지 않는다. 선한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상대방의 가치관, 삶의 태도 등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선하지 않은 사람은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이욕을 채우고자 한다. 그러니 선하지 않은 자가 선한 자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좋아하고 싫어하는가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 중 ‘누가’ 좋아하고 싫어하는가다. 이는 달리 말하면, 오직 스스로 훌륭한 인격을 갖춘 자만이 타인과의 관계를 능동적으로 맺어나갈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나는 그간 타인의 시선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고, 서로 좋은 소리만 하고 듣기를 원했던 나의 바람은 사실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에 다름 아니다. 불편함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것은 선한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 선하지 않은 사람과 관계를 끊을 용기가 없음을 뜻한다. 더 나아가서는, 나 자신이 ‘선한 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내 공부의 중심이 나의 인격 수련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에 머물러있음을 보여준다.


인격이 높다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능동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필요할 때는 누군가에게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하고, 관계를 입체적으로 맺을 수 있어야 한다. ‘누가 나의 친구인가’ 하는 질문은 바꿔 말하면 ‘나는 누구와 친구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다.


그동안 나는 힘들 때마다 나에게 싫은 소리하지 않고 따뜻한 말을 건네주었던 가족과 친구를 찾았다. 하지만 정말 문제를 마주하고 그것을 돌파할 역량을 기르고자 한다면 더 이상 따뜻한 말에 기대선 안 된다. 나의 성장을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그로부터 애정을 남김없이 받는 것. 그것이 설혹 가혹하다고 느껴질지라도 지금은 견뎌보고 싶다.


글_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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