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서당개삼백년

수신(修身), 정치의 시종(始終)

by 북드라망 2018. 3. 28.

수신(修身), 정치의 시종(始終)



子曰 "君子 懷德 小人 懷土 君子 懷刑 小人 懷惠"

자왈 군자 회덕 소인 회토 군자 회형 소인 회혜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1. “군자(君子)는 덕(德)을 생각하고 소인(小人)은 처하는 곳을 생각하며,

군자(君子)는 형(刑)을 생각하고 소인(小人)은 은혜(恩惠)를 생각한다.”


2.“군자(君子)가 덕(德)을 생각하면 소인(小人)은 처하는 곳을 생각할 수 있고,

군자(君子)가 형(刑)을 생각하면 소인(小人)은 그 은혜(恩惠)를 생각할 수 있다. - 〈이인〉편 11장


=글자 풀이=

=주석 풀이=

이 구절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구분하는 기준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군자와 소인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이르는 말이었다. 이에 따라 해석하면, 이 구절은 군자(통치계급)가 덕(德)으로 정치하면 소인은 안정된 삶(土)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선을 그대로 지금에도 적용하긴 어려울 듯하다. 분명 우리도 국회나 대통령 차원에서 결정되는 정치적 현안에 큰 영향을 받지만 동시에 우리 또한 여러 방식을 통해 정치적 역량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자를 따라 군자와 소인을 정치적 계급이 아니라 인격 수준에 따른 개념으로 해석하기로 한다.


유가의 정치론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덕치주의(德治主義)다. 통치자가 덕(德)을 닦는 것, 곧 수신(修身)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 된다는 것. 이를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다. 이처럼 고대 중국에서는 수신을 통치자가 최우선적으로 갖춰야할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런 관점은 우리 근대인에게 많이 낯설다. 우리는 대개 정치인을 그의 스펙으로 판단한다. 그가 속한 정당이 어딘지, 그의 행보, 발언, 경력 등등이 어떠했는지가 우리의 판단기준이 된다. 얼핏 지금 우리의 기준이 공자가 말하는 수신보다 정치인을 판별하는 데 있어서 더 객관적인 기준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뛰어난 스펙은 ‘좋은 정치’의 필요조건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가?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구절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공자가 말하는 군자와 소인을 통해 살펴보자.


군자(君子)는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기 위해 수신(修身)하는 존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공자가 군자를 회덕(懷德) 즉, 덕을 닦는다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덕(德)을 ‘인격’ 정도로 생각하지만, 공자시대 인격은 자질, 능력과 결부된 것이었다. 즉, 군자가 자신의 덕을 닦는다는 말은 인격을 함양시킴으로써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갖춘다는 뜻이다. 어떻게 덕을 닦는 것이 통치와 연결된다는 것일까? 나라를 잘 다스린다는 것은 백성에게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백성이 있어야 세금이 걷히고, 부국강병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능한 인재가 국가를 경영해야 하고, 그러려면 무엇보다 통치자가 간신배의 아첨에 흔들리지 않고 인재를 공평무사하게 등용할 수 있는 자기중심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중심은 자신의 사욕(私欲)을 단속하고, 내적 규준을 엄격하게 지킴으로써만 세울 수 있다. 회형(懷刑)은 군자가 사욕을 단속하며 스스로를 얼마나 엄격하게 다스리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형(刑)은 보통 ‘형벌’, ‘형법’ 등 외부적 힘이나 강제성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군자가 자신의 마음을 엄격하게 단속하는 내적 규범을 뜻한다. 이처럼 수신이란 자신을 통치하는 역량이고, 이 역량이 뒷받침되어야만 타인에 대한 사심없는 통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반면, 소인(小人)은 사욕에 따라 이익을 탐하는 존재다. 공자는 소인의 특징으로 회토(懷土)와 회혜(懷惠)를 말한다. 토(土)란 ‘소인이 머물고 있는 세계’로, 자기 세계 안에서 편안함을 구하는 것이 회토다. 이런 소인은 군자와는 반대로 오직 자신의 이익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 그러다보니 충신의 간언보다는 당장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탐관오리를 가까이한다. 탐관오리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백성들이 ‘수족 둘 곳 없는’ 삶(〈자로〉편 3장 中)을 살게 되고, 결과적으로 백성들은 떠나고 나라는 약해진다. 이처럼 자기 이익을 추구하느라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지 못하는 것이 소인이다. 공자는 이런 소인의 어리석음을 회혜로 표현한다. 혜(惠)는 타인이 베푸는 은혜를 뜻한다. 소인이 자기반성 없이 계속 이익을 탐하는 것은 일이 자신에게 좋은 쪽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인은 어려움을 겪을 때 그것을 자신의 내적 규범에 따라 극복하기보다는 요행히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요컨대, 통치자가 덕을 닦는 행위는 자신의 인격을 완성시키는 동시에 타인의 인격을 이루어주는 일이다. 통치자가 덕보다는 이익을 채우느라 급급하다면 정치는 부정부패로 가득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모든 정치의 시작이 되는 통치자의 수신을 강조한 것이다.


정치의 출발을 군자의 수신에 두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 삶의 척도가 ‘이익’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는 인생의 성공을 결정하는 척도고, 부자가 인생의 훌륭한 스승으로 추앙받는 시대다. 공자의 언어를 빌린다면, 가장 ‘소인다운’ 사람이 존경받는 시대가 지금이다. 공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소인으로 득실거리는 이 무도한 세상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을 법하다. 소인들은 소인들을 원하는 법. 정치의 문제는 어쩌면 ‘회토’하고 ‘회혜’하는 우리의 ‘소인적 욕망’에서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닐까.


자취하고 있는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 경기도에서 중소기업에 재직하는 청년들에게 연금을 지원한다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보자마자 부럽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동안 난 복지정책을 제정하는 것이 좋은 정치를 실현시키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역시 소인적 욕망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군자처럼 마음을 단속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삶의 국면국면에서 ‘이익’은 여전히 큰 유혹이지만 그나마 공부하면서 조금씩 단단해지는 것 같다. 감히 군자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삶의 방향이 소인에서 군자로 넘어가는 중이라고 자위하고 싶다.


글_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