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의 언어, 전사의 언어
니체가 트윗을 한다면?
#사내는 전쟁을 위해, 여인은 전사에게 위안이 될 수 있도록 양육되어야 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 사내의 행복은 ‘나는 원한다’는 데 있다. 여인의 행복은 ‘그는 원한다’는 데 있다.
# 더 높은 문화는 사회의 서로 다른 두 계층, 노동하는 계층과 여가를 지닌 계층, 즉 참된 여가를 가질 자격을 지닌 계층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또는 좀더 강하게 표현하면 강제노동 계급과 자유노동 계급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 인류가 전쟁하는 것을 잊어버렸을 때 인류에게 여전히 많은 것을(아니면 그때서야 정말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공허한 열망이며 아름다운 영혼의 상태다.
# 나는 이들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과 섞이고 혼동되고 싶지가 않다. 정의가 내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고.
누가 연상되는가? 미소지니스트? 노예제나 계급모순을 정당화하는 수구 우파 지식인? 제국주의자? 파시스트? 그렇다. 실은 모두 니체가 쓴 글들이다. 위의 인용구들은 분명 니체 자신이 직접 쓴 것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맥락과 무관하게 저 말들만을 취해서 니체를 규정하는 데 쓸 수는 없다. 니체가 이런 구절들을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올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뻔하다. 여성혐오자, 전쟁광, 파쇼 등의 꼬리표와 함께 산 채로 ‘박제’되었겠지. 최근 SNS 상에서 ‘박제’라는 말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누군가 ‘개념 없는’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달면 스크린샷을 찍어서 영구보존하는 동시에 그것을 여기저기 퍼 나름으로써 망신을 주고 ‘디지털 낙인’을 찍는 행위를 ‘박제’라고 부른다. 이런 식으로 부분을 잘라서 취하면, 니체는 파시즘의 사상적 지주로 매장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요즘 SNS에서는 싸움이 한창이다. 싸움의 구도는 대개 이렇다. 언어표현의 폭력성이나 ‘언피씨(un-Political Correctness)’함을 문제 삼는 이들이 한 쪽에 있고, 그러한 지적질의 오만함과 편협함을 비아냥거리는 이들이 반대편에 있다. 최근 유아인의 트윗을 둘러싼 ‘언쟁’만 해도 그렇다. 사건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무엇으로부터 촉발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싸움의 핵심에는 서로를 규정하는 말들만 난무한다. “개소리 포장해서 멋있는 척하는 전형적인 한남짓 그만”이라는 비아냥에 “증오를 포장해서 페미인 척하는 메갈짓 그만”이라는 말이 맞섰고, “여혐”에는 “파시스트”라는 말이, “잠재적 범죄자”라는 규정에는 “폭도”라는 말이 맞섰다. 자신을 규정하려드는 타인의 말에 분노하면서 자기 역시 타인을 재단하는 말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지루한 말싸움.
솔직히 혼란스럽다. 나는 ‘소수자’를 자임하며 단어 하나를 트집잡아 타인을 ‘파시스트’에 준하는 무엇으로 낙인찍는 이들을 보면서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아무 말’이나 해대는 자들을 지지할 생각도 전혀 없다. 문제는 이들의 싸움 자체가 너무나 반생산적이라는 점이다. 서로를 낙인찍고 박제하는 싸움은 상대를 이해시키지도, 투쟁의 경계선을 새로 그리지도, 싸움의 구도를 변주해내지도, 서로를 변화시키지도 못한 채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서로가 내뱉은 말들을 무기로 각자의 논리만 강화시키면서.
얼마 전부터는 친한 친구 중 하나가 ‘병신’을 비롯한 몇몇 표현들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말하는 이의 의도가 어떻든 그러한 단어들에는 소수자에 대한 비하가 함축되어 있으며, 혐오와 차별은 바로 이런 일상적이고 무의식적인 표현들 속에서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좋다. 구구절절 옳은 얘기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무엇이 타자에 대한 배제를 만들어내는 ‘타락한’ 단어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순결한’ 단어인가? ‘좋은 단어’와 ‘나쁜 단어’를 구분하는 일람표를 누가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런 방식으로 선악의 견고한 구분과 규범을 언어에 주입하고 그것을 잣대로 타인을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언어를 통한 폭력이자 언어에 대한 폭력이 아닐까?
해석, 언어를 의심하는 힘
말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전쟁에서 정작 누구도 전쟁터이자 무기이고 포위공격의 대상이기도 한 ‘언어’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올바른 표현과 부적절한 표현, 상대의 논리와 나의 논리, 너를 규정하는 말과 나를 규정하는 말일 뿐이다. 이들의 싸움에는 언어란 정보를 전달하고 의미를 드러내는 투명한 매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누군가의 단어선택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상대가 내뱉은 ‘병신’이라는 단어는 내가 문제 삼는 ‘바로 그 단어’이며, 그가 사용한 단어는 내가 문제라고 여기는 ‘바로 그 정신 상태’를 재현한다는 것.
“문화 발전에서 언어의 의미는 인간이 언어 속에서 다른 세계와 맞서는 자신의 세계, 하나의 자리를 수립한 데 있다. 인간은 그곳을, 다른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자신이 그 위에 군림하기 위한 확고한 자리로 간주했다. (…) 실제로 인간은 언어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언어를 창조하는 자는 자신이 사물에 대해 단지 기호를 부여할 뿐이라고 믿을 만큼 그렇게 겸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사물에 대한 최고의 지식을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책세상, 11절)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언어를 발명하면서 고유한 공간을 수립했다. 언어란 인간이 다른 세계에 맞서서, 그 위에 군림하기 위해 구성해낸 자신의 세계다. 그러니까 언어는 인식과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투명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의 자리를 구성함으로써 세계에 개입하고 세계를 뒤바꾸는 강력한 무기인 것이다. 언어와 세계는 서로가 서로에 개입하는 긴장 관계 속에 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언어의 단일성으로부터 세계의 단일성을 유추해낸다. 말을 갖다 붙임으로써 그 현상에 내재해 있는 의미를 끄집어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말의 단일성은 사물의 단일성에 대해 아무것도 보증하지 못한다.”(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책세상, 14절) 우리가 언어를 통해 명명하기 전에 그러한 현상이나 사건의 의미는 선험적으로 결정되어있지 않다. 언어는 그 자신과 일대일로 대응되는 무언가를 사후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거꾸로, 언어에 의해 대상은 비로소 ‘대상’으로서 출현한다.
단일한 대상이나 의미와 본드를 바른 것처럼 찰싹 붙어있는 게 아니라면, 도대체 ‘말’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 의미를 출현시키고 대상과 관계 맺지만 결코 의미나 대상으로 완전히 환원되지는 않는다. 하나의 단어는 인접한 다른 단어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것이 놓여있는 장(場)을 형성하는 모든 비(非)언어적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고유한 뉘앙스(=힘)로 현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매번 아주 구체적인 힘으로 작용하지만 어디로도 환원될 수 없는 모호함을 그 본질로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란 그 자체로 해석이다. 고정된 ‘언어’란 없으며, 언어 이전에 특정한 의미를 담지한 채 ‘언어화’되기를 기다리는 ‘중립적 대상’도 없다.
결국 언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뉘앙스다. 특정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의 고유한 힘의지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에 대해 제기해야 할 질문은, 그것이 ‘정치적 올바름’에 부합하는가의 여부 아니라 거기 내포된 힘이 어떤 유형의 힘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힘인가, 부정적이고 반동적인 힘인가? 새로운 영토를 구성하면서 우리 자신으로부터 떠나가도록 만드는 힘인가, 아니면 양자택일의 구도를 강요하고 재생산하면서 영토에 갇히게 만드는 힘인가? 우리를 가볍게 만드는 힘인가, 무겁게 만드는 힘인가? 그것은 서로의 힘을 고양시키고 기쁘게 만드는가, 아니면 힘을 빼앗고 무기력하게 만드는가?
‘우리’ 선희는 어디에?
홍상수의 영화 <우리 선희>의 마지막 장면. 선희를 아끼는 세 남자는 선희가 떠난 창경궁에서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인다. ‘각자의 선희’만을 알고 있는 이들은 선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면서 ‘우리 선희’를 구축한다.
“걔가 성격이 좀 내성적이라 마음을 잘 안 열어요. 오래 됐는데도 사실은 걔 속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똑똑하기는 해요 걔가.”/ “그래 알아, 똑똑하지.”/ “머리 좋지. 안목도 좋고.”/ “오, 너도 아는구나?”/ “그럼요, 후배인데 좀 알죠.”/ “고놈 참 귀엽지, 또라이 같기도 하고.”/ “되게 솔직해요, 진짜 용감하고.”/ “그래, 그런 것 같다. 사람들 보는 눈은 참 똑같구나.”/ “맞아요.”
저들처럼 우리는 몇 개의 단어들을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동일한 실체에 도달해 있다고 믿는다. ‘내성적이지만 똑똑하고 안목이 있으며 또라이 같으면서도 용감하고 솔직’하다는 언어적 규정 속에서 이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용감하다’는 말의 뒤편에서 문수는 자신을 버려두고 홀연히 떠나는 선희의 뒷모습을, 재학은 우산 아래서의 짧은 키스를, 최교수는 자신에게 추천서를 다시 써달라고 조르는 그녀의 얼굴을 본다. 이런 각자의 단편적 경험들이 어느 순간 ‘우리 선희’로 실체화되는 것이다.
재밌는 건, 이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선희에 대한 규정이 말들의 상호복제와 반복, 모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거다. 재학은 ‘내성적이지만 안목이 있다’고 하는 최교수의 말을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고, 문수는 선희로부터 들은 충고를 자기가 방금 떠올린 생각인 양 떠들어대는 식이다. 부유하는 말들. 선희는 떠나고 남겨진 것은 말들뿐이다. 그러나 선희를 규정하는 말들 속에 선희는 없다. 말들이 그녀를 붙드는 바로 그 순간에도 선희는 “저한테 진짜 중요한 건 내가 누군지 아는 거예요”라고 말하며 자신을 규정하는 말들로부터 미끄러지는 중이다. 그런 점에서 선희는 어디에도 없다. 삶은 매순간 언어의 규정성을 빠져나가는 과정 중에 있으며, 동시에 언어 또한 고정된 의미로부터 끊임없이 달아나고 있다.
유아인이 장문의 글을 올려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하면서 기이한 논쟁의 열기는 정점을 찍었다. 누군가는 그의 선언을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강요하는 ‘맨스플레인(mansplain)’의 전형적인 예라고 받아들였고(이른바 ‘유아인이 허락한 페미니즘), 누군가는 그가 ‘가짜 페미니스트’들을 혼내줌으로써 정의를 구현했다고 여겼으며, 심지어 어느 정신과 전문의는 유아인의 글을 읽고 ‘경조증’ 증상을 의심했다.
‘유아인’은 어디에 있는가? 유아인 또한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각자의 언어로 유아인의 실체를 붙들기라도 한 것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서로가 서로를 언어로 낙인찍으면서 거기에 ‘진실’이 있다고 믿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진실’이란 사실 각자의 언어가 만들어낸 ‘상상’ 혹은 ‘신념체계’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두 방향의 힘, 두 개의 폭력
우리가 말을 통해 주고받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힘이다. 니체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언어의 투명성을 의심했다. 그렇다고 그가 언어 자체를 회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니체는 언어를 의심함으로써 언어에 실재성을 되돌려준다.
니체의 글들을 보라. 그의 글은 어떤 총체적 앎을 드러내고 전달하기 위한 도구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언어를 가지고 앎의 체계를 세우는 대신 각각의 단어를 음표삼아 일종의 악보를 썼다. 그의 악보에서 ‘단어=음표’들은 고정된 의미로 환원되지 않고 다른 ‘단어=음표’들과 함께 독특한 선율을 이룬다. 니체가 그의 글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것은 체계화된 앎이 아니라 글쓰기가 만들어내는 선율이자 힘이었으며 뉘앙스였다. 니체 읽기가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니체는 독자에게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독자인 우리는 그의 악보를 연주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 그의 글을 해석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이미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의 해석은 우리 자신의 허구적 동일성을 강화시키거나 대상의 의미를 고정시키고 실체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해석되어야 할 ‘니체’와 해석하는 ‘나’의 거리가 변주될 때, 다시 말해 니체읽기가 자신의 변형을, 나아가 니체의 변형까지를 수반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니체를 ‘연주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의 글은 폭력적이다. 비판과 상징, 역설의 글쓰기를 통해 우리의 익숙한 사고방식을 단숨에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니체는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믿으며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이 우리를 구속하는 족쇄임을 폭로하고, 우리가 안전한 영토라고 믿고 있는 곳이 사실은 이질적인 것들의 투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터임을 보게 한다. SNS상의 말들 역시 폭력적이다. 논쟁하는 자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혐오’로, ‘○○충’으로 규정한다. 상대를 언어적 규정성에 가두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과 올바름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폭력성은 타인을,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의 언어적 규정성이 만들어낸 조야한 세계에 감금한다. 나를 ‘나’로부터 떠나게 만드는 폭력과 나를 ‘나’에 가두는 폭력.
우리는 SNS를 통해 언제나 타인들과 ‘접속’되어 있다. 그러나 상처와 서로를 규정하는 말들, 그리고 자기논리만을 재생산하는 ‘접속’이란 절교선언에 다름 아니다. 소통에 반하는 소통, 지극히 반생산적인 소통. 소통하기 위해 어쩌면 우리는 먼저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판관의 제스처를 중단하고, 자신의 무기부터 다듬을 것.
글 : 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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