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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베짱이의역습

참을 수 없는 교양의 공허함

by 북드라망 2018. 2. 6.

참을 수 없는 교양의 공허함



새로운 교양주의의 도래?


“얼굴과 사지에 쉰 개나 되는 얼룩을 칠하고 거기 그렇게 앉아 나를 놀라게 했으니, 오늘을 살고 있는 자들이여!/ 너희가 연출한 색채의 놀이에 교태를 부리며 흉내를 내는, 쉰 개나 되는 거울을 주변에 두고 말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자들이여, 진정, 너희 자신의 얼굴보다 더 그럴싸한 탈을 너희는 쓸 수 없으리라! 그 누가 너희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지난날의 기호들로 가득 쓰이고, 그것들을 새로운 기호로 덧칠한 채. 이렇게 너희는 기호를 해독해내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너희 자신을 잘도 숨겨왔다!/ (…)/ 너희가 쓰고 있는 베일을 뚫고 온갖 시대와 민족이 다채롭게 내다보고 있구나. 온갖 습속과 신앙이 너희 자태 속에서 다채롭게 지껄여 대고 있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 누군가가 베일과 덧옷, 분칠과 거동을 벗어버린다면, 겨우 새들이나 놀라게 할 정도의 것이 남게 되리라.”(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교양의 나라에 대하여〉, 책세상, p202~203)




니체가 살았던 19세기 유럽, 앎은 신분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귀족들의 특권이었던 지식이 부르주아를 위시한 대중들의 영역으로 내려온 것이다. ‘시대에 맞지 않는(unzeitgemäß)’ 인간인 우리의 니체는, 모두가 ‘인류의 위대한 진보’라며 떠받들었을 법한 이러한 현상을 삐딱하게 바라본다. 그가 보기에 신분이라는 견고한 뿌리로부터 해방된 앎은 고작해야 새로운 집단의식의 형성으로 귀결되었을 뿐이다. 지식의 대중화와 함께 앎은 체화하고 연마해야 할 무엇에서 소유의 대상으로, 독특한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는 도구에서 집단성을 표시해주는 일종의 ‘유니폼’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앎을 니체는 ‘속물 교양’이라고 명명한다. 삶과 문화로부터 유리된, 허구적이고 비생산적인 지식. 속물 교양인들은 과거의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양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 자신의 빈약함을 가리는 베일, 덧옷, 분칠에 불과하다. 이들의 앎에서 ‘무엇을 위해? 어디로? 어디에서?’ 따위의 질문은 실종되었다. 무엇도 직접 탐구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주어진’ 모든 지적이고 문화적인 유산의 상속자로 여기는 당대 교양주의의 ‘왜소함’을 니체는 혐오했다. 그가 보기에 이들이 자랑하는 교양주의란 결국 무리 속에 숨어 여론을 재생산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먹방’이 한물간 지금, 대세는 ‘교양예능’이다. 이제 우리는 마음도 살찌우고 싶다. 《알·쓸·신·잡》을 비롯한 ‘교양예능’들의 흥행과 《지·대·넓·얕》, 《빨간책방》 등의 ‘교양 팟캐스트’의 부상, 그리고 허지웅, 조승연, 채사장 등 ‘지식 셀러브리티’들의 등장. ‘교양’은 말 그대로 ‘핫’하다. 음식사진들로 도배되었던 SNS를 자신이 읽은 시 구절을 찍어 올린 사진들이 대신하기 시작하고, 상대의 지성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뜻의 ‘사피오 섹슈얼’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새로운 교양주의의 도래일까?



나는 ‘진보 꼰대’가 싫어요!


예나 지금이나 ‘지식’, ‘지식인’과 같은 단어들은 내게 그다지 긍정적인 울림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단어 자체부터가 벌써 촌스럽고 올드해 보인달까? 특히 ‘지식인’이라는 말에 부여된 특권 내지는 무게감(?)에 대한 반감은 내 또래들 대부분이 공유하고 있는 부분인 것 같다. 물론 우리가 지성 일반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지식이나 지식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자임하는 ‘전체성’이다. ‘민족’이나 ‘역사’, ‘정의’, ‘진보’ 같은 거대한 말을 들먹이며 우리에게 역사적 위치를 부여하고 특정한 방향성을 강요하려 드는 모든 것들.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부당한’ 권력이나 반지성적이고 비이성적인 폭력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강요된 올바름’이고 그러한 ‘올바름의 강요’다.


내가 다닌 대안학교는 권위에 의해 행해지는 신체적 체벌과 언어폭력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특정 교사의 독단으로) 행해지는 곳이었다. 그래봐야 보잘 것 없는 수준이지만 제도권의 학교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많은 자율이 허용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거기서 억압을 느꼈다고 하면? 물론 그 억압은 나를 위에서 찍어 누르는 강제적 힘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적·윤리적 당위로 무장한 교사들(어른들)에 대해 느끼는 답답함 내지는 환멸감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이념적으로 ‘진보적’이고 소위 ‘깨어있다’고 불릴 법한 사람들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소수자와의 연대를 강조하고 다양성을 포용하고자 노력하는…. 그러나 그들의 감성과 그들의 일상적 행위가 드러나는 방식은 보수적이기 짝이 없었다. ‘자고로 학생이라면 …’, ‘적어도 학교에서는 …’, ‘그래도 대학은 가야…’, 나는 그들로부터 이런 말들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자주 자신들이 부정하는 권위를 스스로 재생산하고 또 거기에 의지하곤 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이념과 실천 사이의 모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이념과 감성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올바름’이 있고 ‘나아가야 할 길’의 방향성이 주어져 있다. 내 눈에 ‘진보어른’들은 중심과 질서를 욕망하고 생산한다는 점에서 그들이 맞서 싸운 ‘부당한’ 권력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였다. ‘부당한’ 권위와 ‘정당한’ 권위는 우리의 행위를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하려고 든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학교와 선생들에게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이념의 보수성이 아니라, 말하자면 감성의 진부함이었다. 지금 20대들이 가장 혐오하는 집단 중 하나가 바로 ‘진보 꼰대’다. ‘진보 개저씨’로 불리는, 자기쇄신을 하지 않는 386세대들. 우리는 그들이 내세우는 ‘정의’와 그들의 다수적(남성적?) 감수성 모두에 무의식적 차원의 저항감을 느낀다. 앎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사적(?) 위치를 이해하게 하고, 우리에게 비전을 제시해주고,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는 지식과 지식인에게 거부감을 느낀다. 구루나 멘토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우리가 훨씬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지식인은 허지웅 같은 인물들이다. 허지웅은 결코 대변하려 들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하려는 이들과 싸운다. 우리는 파편적일지언정 우리에게 문화적 풍요로움과 낯선 관점, 소소한 통찰을 제공하는 ‘지식 소매상’을 원한다. 우리의 지식인,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지식 셀럽들은 모두 ‘지식인의 의무’로부터 자유롭다. 누구도 이들 앞에서 ‘의무’를 들먹일 생각은 하지 않을 거다. 정치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이들을 비난하는 건 이미 촌스러운 짓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차라리 ‘총체적 지식인’을 자처하지 않고, 앎을 자신의 올바름을 강요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려는 태도야말로 이들의 정치적 입장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지식은 ‘교양’보다는 ‘취향’과 연관된다. 우리에게 지식은 무리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무리와 자신을 구별해내는 기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위대한 소설’, ‘위대한 영화’가 아니라 ‘내가 본 소설’, ‘내가 본 영화’다.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맥락’과 ‘역사성’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소설을 둘러싸고 형성된 ‘나의 맥락’이지 그것이 놓여있는 시대적·역사적 맥락 따위가 아니다. 모두가 공인하는 그 작품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 작품으로부터 ‘내가 느낀 것’이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당장 삶을 다르게 느끼게끔 하는 멋진 구절 하나를 원하지, 개념의 맥락이나 철학사 전체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파편적인 앎들을 모자이크하듯 이어 붙여 각자의 취향과 세계를 구성한다. 우리는 마치 웹서핑을 하듯 이곳저곳을 떠다니며 우연적으로, 그리고 유연하게 이러저러한 앎들과 접속한다. 우리의 앎은 역사적인 맥락, 집단의식, 윤리적 당위, 정치적 당파성, 학문적 권위 같은 것들로부터 자유롭다.


한 마디로 우리는 ‘세련된 지식인’을 원한다. 우리의 지식 셀럽들을 보라. 그들은 결코 ‘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팟캐스트 《지·대·넓·얕》의 진행자인 채사장은 ‘인문학 공부 하지 마라’라는 제목의 공개강연을 한 적이 있다. ‘인문학’을 공부와 책 읽기에 한정함으로써 또 다른 강박관념을 만들어낼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그림을 그리고, 친구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등의 방법으로 삶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들라는 것이다. 그렇다. 공부조차도 당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에 꼭 해야 할 일이나 꼭 알아야 할 지식 같은 것은 없다. 그런 게 어디에 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은 대개 타인에게 자신의 이상이나 삶의 양식을 강요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이 내세우는 ‘보편’과 싸운다. 우리는 지식을 소유함으로써 보편적 ‘교양’과 ‘상식’을 갖추기보다는 파편적 앎들을 임시적으로 점유해가면서 지적이고 세련된 ‘나’를 구성하길 원한다.



참을 수 없는 교양의 공허함


그렇다. 한때는 나도 지식 셀럽들과 그들의 삶에 끌렸다. ‘진보 꼰대’들과는 달리 그들은 무게 잡지 않고 신선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거창한 (정치적·시대적·윤리적)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들의 지식을 재료로 삼아 작은 기쁨을 생산할 뿐이다. 난 이들의 태도가 차라리 솔직하고 정직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하게 될(하고 있는) 공부도 큰 맥락에서 보면 이들의 활동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고 글을 써서 사람들과 소소한 즐거움을 나누고 거창하지 않은 통찰들을 길어 올리기. 당위나 당파성 따위는 버리고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자유롭고 가볍게 살기. 어떤 집단의식에도 동조하지 않고 감정에 호소하지도 않고 타인에게 상처입히지도 않으면서 고고하게 나의 지성과 취향을 향유하기.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을까...


그런데 요즘 들어 나는 조금 혼란을 느끼고 있다. 그 가벼움과 솔직함이 썩 유쾌하거나 고귀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 푸코, 들뢰즈, 루쉰... 일천하게나마 이들을 읽으면서 나는 다른 지식인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싫어한 ‘진보 꼰대’도 아니고, 내가 추종했던 ‘세련된 지식인’도 아닌, 모든 도그마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자기로부터 떠나는 실험적 지식인을.


우리 역시 새로운 생각을 쉽게 받아들이고, 다른 앎들과 유연하게 접속하며, 타자를 함부로 규정지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지성을 상징하는 것은 온갖 전집들과 사전들이 빽빽하게 구비되어 있는 서재가 아니라 구글의 텅 빈 초기화면이다. 우리는 접속하고 가로지르며 소통한다. 새로운 플랫폼들을 활용하여 익명의 타자들과 교류한다. 문제는, 이 자유로운 접속과 소통에 뚜렷한 경계가 그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접속하고 소통할수록 나를 떠나기는커녕 ‘나 자신’이 점점 더 견고해진다는 사실이다. 난 이래! 이게 내 취향이야! 니가 뭔데? … ‘프라이버시’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는, 앎에서조차 어떤 사적인 영역을 상정한다. 아무리 열심히 소통하고 논쟁적으로 토론하더라도 거기에는 항상 넘어서는 안 될 불가침의 영역이 있다. ‘내 생각’, ‘내 견해’라는 소중한 무언가가 있는 거다. 그래서 대개 논쟁은 견해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소통은 취향의 일치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의 세련된 지식인들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성역 없이 비판한다. 허지웅을 보라. 그는 ‘깨시민’, ‘노빠’, ‘나꼼수 팬덤’ 등과 대립각을 세우며 진보진영의 성역을 건드렸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어쩐지 다칠 각오를 하고 덤비는 자의 거침없음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간단히 비웃어버리는 냉소주의자의 허세처럼 보인다. 그들은 ‘나’라는 사적인 바운더리에 몸을 반쯤 숨긴 채 타자들과 접속하고 소통하고 또 투쟁한다. 반쪽짜리 접속과 소통과 투쟁이다. 내 견해의 오류를 지적할 수는 있지만, 누구도 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건 누구도 바꿀 수 없는 ‘내 생각’이니까. 우리는 서로를 규정하려들지 않고 가르치려들지 않고 바꾸려들지 않는다. 철두철미한 反계몽주의. 그것이 우리의 ‘쿨함’이다. 그러니까 쿨함이란 어떤 것도 굳이 무릅쓰지 않으려는 것, 혹은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의 접속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자유로움은 자기 자신에 대한 더없는 집착으로, 세련됨은 무엇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비겁함으로, 타자에 대한 배려는 자기 변환의 무능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낯선 생각들을 받아들이고 익명의 타자들과 소통하지만 사실 어떤 관계의 변형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느 길로 가도 만나게 되는 것은 ‘나’다. 그렇게 우리의 앎은 끊임없이 우리 자신만 재생산하고 있지 않은가? ‘진보 꼰대’들이 스스로가 맞서 싸운 ‘악(보수)’에 반응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무게 잡고 간섭하는 꼰대들에 대한 거부와 부정 속에서 스스로를 그럴 듯하게 치장하는 데 골몰하고 있는 건 아닌가? ‘강요된 올바름’을 깨고 다른 높이에서 낯선 공기를 마시기보다는 올바름을 갖는 일 자체를 두려워하면서 은밀하게, 우리의 또 다른 올바름을 고착화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나’라는 껍데기 속에 갇힌 채 우리는 점점 왜소해져만 가고 있는 건 아닌가?


니체가 19세기 ‘속물 교양’을 비판했던 것도 그런 ‘왜소함’ 때문이었다. 니체의 눈에 박식함으로 무장한 그들이 왜소하게 보였던 것은 속물 교양인들이 ‘주어진 것’ 안에 머무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자체로 ‘시도’이고 ‘실험’이었던 온갖 시대와 민족의 문화들을 박제시킨 채 그것을 그저 ‘소유’하려 들었다. 자신을 떠나지 않으려는 자에게 앎은 장식품일 뿐이다.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으면서 안전하게 “지난날의 기호들” 위에 “새로운 기호”를 덧칠하는 자들. 지식이 소유와 소비의 대상인 한 필연적으로 공허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소유란 계속해서 더 새롭고 놀라운 것을 소유함으로써만 충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접근할 수 있는 앎의 영역은 무한히 넓어지고, 교양의 폭은 더없이 화려해졌지만, 우리는 별로 기쁘지 않다.


우리, 21세기의 교양인들은 여전히 앎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사실 ‘자기 자신’이라는 건 없다. 우리는 ‘프라이버시’를 신봉하면서 ‘나’라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영역을 소중히 여기지만 ‘내 생각’이란, 나아가 ‘나’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들은 이미 내부가 되어버린 외부와의 부단한 소통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그러한 소통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끊임없는 전쟁상태로서의 삶을 긍정하기보다는 몇몇 앎들을 소비하고 소유함으로써, 그것들로 자신을 꾸미고 포장함으로써 삶을 기만하고 있는 것인지도.


나의 공부는 어디에 와 있나? 내가 지향한 ‘세련된 삶’이란 무엇이었던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부와 글쓰기는 ‘세련됨’을 허용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특히 글쓰기는 내가 멈춰선 지점이 어디고 내가 몸을 사리는 순간이 언제인지를 너무나 잘 보여준다. ‘자기 안에 머물기’를 허용하지 않는 거다. 그러나 나는 머뭇거리고 있다. 겉치레와 자기과시로서의 앎이 유치하고 공허하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아직, 나는 두렵다. 내가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게 되는 것이.


글 : 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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