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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카프카와 함께

카프카의 일기 : 굶기의 예술

by 북드라망 2017. 8. 2.

카프카의 일기 : 굶기의 예술


일기는 자신이 노출되어 있는 위험스러운 변신을 예감할 때, 작가가 스스로를 되돌아보기 위해서 작성한 일련의 지표들이다. 그것은 여전히 나아갈 수 있는 길, 다른 길을 들러 살펴보고 때로는 앞지르는 일종의 순찰의 길이다. 떠돎이 끝없는 임무가 되는 다른 길.(모리스 블랑쇼,「‘일기’에의 의지」,『문학의 공간』)


1. 어느 단신 광대


카프카는 후두 결핵으로 죽기 직전에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최후로 교정을 보고 있던 작품집이 『어느 단식 광대』(1924)이지요. 이 안에 수록된 작품 「어느 단식 광대」에는 굶기에 도전하는 예술가가 나옵니다. ‘매 순간’ 굶음으로써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곳에 이르려고 했던 단식 광대. 먹음을 벗고, 의복을 벗고, 인간으로서의 에티켓과 갖가지 사회적 말투를 벗고, 자신에게 주어졌던 모든 이름을 떨치며. 광대는 굶기를 통해 어디론가 ‘가고자’ 했습니다.



이 예술에 가장 방해가 되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의 허기는 장애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한 벽은 바로 죽음이었지요. 죽어버리면 굶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식 광대가 죽고 난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피를 뚝뚝 흘리며 먹이를 탐하는 야수였어요. 카프카는 ‘굶음 그 후’가 아니라, ‘굶기 그 자체’를 열망하는 예술가를 그렸습니다. ‘겨우 야수나 되자고 굶는단 말인가? 정말이지 죽지 않고 굶어갈 방법은 없는 걸까?’ 카프카는 이것을 고민했습니다.



2. 길 위의 생


카프카는 왜 굶기의 과정에 집중했던 걸까요? 그가 쓴 다른 작품에도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변신」에서 외판원은 갑충이 되어갑니다. 「시골 의사」는 환자의 집을 갔다 나와서는 죽을 때까지 벌거벗은 채 길 위에 서 있게 됩니다. 「돌연한 출발」이나 「황제의 칙명」도 문과 문을 넘어, 또 넘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카프카의 변신담, 여행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변신의 전후가 아니라, 변신 그 자체에 집중해야만 할 것입니다.


카프카는 내용에서 과정을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과정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엄청난 양의 습작을 남겼지요. 그가 쓴 각각의 단편들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기도 하지만, 서로 맞물리면서 새로운 의미의 차원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장편은 미완이었습니다. 심지어 카프카는 장편의 출간을 거부했는데요. 그는 한 권의 책이라는 이유로 쓰기가 중단되고, 저자의 이름 아래 글이 종속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의 장편은 영원히 쓰여지고 있는, ‘과정으로서의 형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카프카의 삶도 ‘과정’에만 충실했다고 볼 수 있지요. 약혼과 파혼을 거듭하면서도 결코 결혼이라는 문턱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정하기도 했지만 늘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직장, ‘노동자 재해 보험공사’가 자신의 피를 말린다며 괴로워하긴 했어도, 병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기 전까지는 회사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카프카는 늘 떠나지만, 도착을 꿈꾸지는 않는 길 위의 사나이였습니다.



3. 일기, 굶기의 예술


카프카는 일기에서 연극을 보고 친구를 만나는 등의 일상을 기록하기도 하고, 작품의 인물들 주요 장면을 연습하거나 민족 문학론, 유대 문제 등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보내기 전에 편지의 초안을 잡기도 하고, 꿈인 듯 몽상인 듯 환영을 그리기도 했지요. 장편 소설의 부분 부분을 실험하기도 하고요. 1912년 9월 22일과 23일에는 일기를 쓰다가 「선고」라는 작품을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중요하게 생각한 테마를 여러 차원으로 변주하는 등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소재와 형식을 통해 일기를 썼습니다. 일기 위에서 문자는 가다가 말고, 달리다가 멈추고, 다시 되돌아가다가 숨어버리는 등. 어딘가를 한정 없이 다닙니다.


카프카의 일기를 하나의 문학 형식으로 볼 수 있을까요? 과정으로서의 문학. 그렇다면 이 일기가 습작 노트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차이는 흘러가는 날짜가 표기된다는 점일 테지요. 그런데 이 날짜, 이 시점은 일기의 내용을 배반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원래 일기가 시점을 초월하는 글쓰기이긴 하지요. 가끔 우리는 오늘, 어제의 일을 쓰기도 합니다. 카프카도 새벽에 일기를 썼지요. 사실 그의 일기는 기본적으로 날짜와 큰 관계가 없습니다. 날짜를 쓰기는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체코 독립을 향한 민족주의자들의 투쟁, 보험 회사의 중요한 임무, 가족과 친구들과의 결혼이나 재산문제, 심지어 그 자신의 약혼과 파혼의 경과에 대한 설명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카프카의 일기는 시점이 필요 없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고, 심지어 대부분은 꿈, 환상이었습니다.




날짜가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표식이 아니라면, 어떤 다른 역할을 했던 걸까요? 카프카에게 일기란 일상에서 우리가 치루어내지 않으면 안되는 금기, 규정, 습관을 하나하나 떠나는 일이었고, 그는 그 떠남 속에서 우리를 우리답게 해주던 모든 것들을 의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카프카는 이 날짜 지표들을 이용해서 걷다가 멈추고, 그러다가 다시 시작되는 쓰기를 특정한 시점에 묶어두려고 했습니다. 일상을 완전히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카프카는 쓰기에 완전히 몰입해서 작품 안으로 걸어들어가버리려는 욕망을 ‘날짜’를 표기하면서 끊어내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굶어서 죽어버리기가 아니라, 세상을 비판하면서 글 안에 함몰되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간절히 원한 것은 계속 ‘굶는 일’ 그 뿐이었습니다. 카프카의 삶을 회고했던 밀레나의 편지를 읽어봅시다. 카프카는 진정 굶는 자, '지금' 자기 생의 방식을 걸고 넘어지는 자였습니다.


확실히 우리는 모두가 겉보기에는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린 언젠가는 허위·맹목·열광·낙관론·확신·비관론, 또는 그 무엇으로 도피해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사람은 결코 감싸주는 피난처로 도피한 적이 없었어요. 그 어느 곳으로도요. 그 사람은 거짓말이라고는 할 줄을 몰랐어요. 술 마시고 취하지도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는 손바닥만한 은신처조차 없었어요. 엄호물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는 우리로서는 보호받고 있는 그 모든 것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옷 입은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벌거벗은 사람 같아요. 그리고 그의 금욕은 전적으로 非영웅적입니다……. 영웅주의란 언제나 허위이며 비겁한 것입니다. 자신의 금욕을 하나의 목적을 위해 도구화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놀라운 형안과 순수를 지녔고 타협은 도저히 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금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사람이지요……. 저는 알고 있어요. 그가 생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금 여기 이런 생의 방식에 저항한다는 걸.(막스 브로흐,『프란츠 카프카 평전』중에서 재인용)


카프카는 일기에 이렇게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카프카는 무엇을 인식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글_오선민(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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