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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소설 읽는 수경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 씨』 야만적인, 너무나 야만적인

by 북드라망 2017. 3. 24.

고전비평공간 규문(링크)에서 활동 중인 수경샘(지은책 바로가기)의 '소설 읽는 수경 연재를 시작합니다!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 씨』

야만적인, 너무나 야만적인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 씨』를 읽었다. 한 권의 단편집과 한 권의 (경)장편소설을 읽는 사이 호감도가 급상승해 신작 출간 소식을 접하자 주저함 없이 구입했다. 전작들이 그랬듯 이번에도 이야기는 짧았고, 그래서 금세 읽어버렸고, 그래서 아쉽고 아쉬웠다. 시 같고 음악 같은 문장에 취해 있다 문득 정신 차리고 보니 그새 내가 작품 하나를 다 읽어버렸더라.




아, 시 같고 음악 같은 문장이라고 써버리면 아직 읽지 않은 이들의 오해를 살지도 모르겠다. 짧은 치마에 스타킹을 신고 비뚜름한 자세로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요컨대 여장한 노숙자를 화자로 내세운 이 작품은 실은 그/그녀의 냄새 나는 이야기, 읽고 있노라면 기분 참 더러워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나로선 바로 그 점에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 그도 그럴 것이 백민석 이래(십년 만에 그가 귀환했다.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조만간…) 이렇게 불쾌한 화자가 불러제끼는 노랫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이 때문이다.


여장 부랑자 앨리시어, 악몽 같은 체취를 몸에 두르고서 사거리에 서 있는 이 존재는 허공을 향해 “그대”라고 호명한 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한 번 화가 나면 기어코 ‘씨발년’이 돼버리는 엄마, 그런 엄마를 피해 도망갔다 모래언덕에서 질식해 죽은 어린 동생, 그들과 함께 살던 쓰레기-마을 ‘고모리’. …그래, 당신 짐작이 맞다. 이 작품도 수많은 한국 현대소설들처럼 도시 재개발과 가정 폭력을 소재로 취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화자가 우리로부터 가장 먼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 것. 앨리시어는 전통적 리얼리즘 서사를 이끄는 점잖은 화자가 아니라 욕하고 말 멈추고 했던 말을 반복하는 미친년/놈이라서, 우리는 말이 지시하는 ‘사실 정보’가 아니라 ‘말 자체’에 놀아나게 된다. 여기 있는 말들은 소위 ‘객관세계’를 경험케 하는 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하지만 병신 앨리시어의 끔찍한 목소리는 나로 하여금 하나의 ‘정서’를 겪도록 했다. 그러니까 미친 엄마의 세찬 주먹질과 급우들의 놀림과 무시에 종일 시달린 어린 형제가 ‘씨발’, ‘자지보지’라고 소곤거리는 그 어둔 방의 정서를.


형, 오늘 개 봤어?

……왜.

봤냐고.

봤다.

보지 말고 자지.

뭐?

보지 말고 자지.

자지 말고 보지, 보지 말고 찌, 자지, 자지 말고 보지, 보지, 하고 앨리시어의 동생은 웃는다.

- 28쪽


여우는 기다렸다. 장례식이 끝나고, 인간들이 자신을 가둬두었던 방의 문을 여는 때를 기다렸던 거다. 마침내 문이 열렸을 때, 여우는 진정한 여우가 되어서, 씨발, 이러면서, 인간을 덮쳤던 거다. 씨발 썅년의 맛을 보여줄까, 씨발을 맛을 보여줄까, 씨발, 내가 씨발, 나는 씨발, 이러면서 온 집안을 완전 씨발 상태로 만들어버리고 씨발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

- 35쪽


『야만적인 앨리스 씨』를 읽는다는 건 그러니까 이런 문장들을 읽는 일이다. 충분히 멋진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괴물 같은 인종의 호흡이 어느새 서사를 흐들흐들 풀어버리는 광경을 보았으므로. 그래서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들을 했다. 아, 나도 이런 씨발스런 문장을 쓰고 싶구나. 하지만 아 그래도 현실에서는 야만적인 앨리스가 손 내밀고 내게 비틀거리며 오지는 말아주었으면. 아, 그래서 앨리시어가 지껄이다 말고 자꾸 그랬구나. “그대 어디까지 왔나.” 우리 청결주의자들, 결코 앨리시어의 “그대”가 되고 싶지 않은, 그가 서 있는 곳을 피해 빙 돌아서 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보고 말았다.


글_수경(고전비평공간 규문)



야만적인 앨리스씨 - 10점
황정은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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