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 - 기억에 관한 무참한 이야기
제목이 너무 감각적이라 선택이 머뭇거려지는 경우들이 있다. 이 작품도 그랬다. 현대 여성작가가 ‘슬픈 짐승’이라는 제목으로 쓴 소설… 작품을 보지 않고도 ‘촉’이 왔다. 표지를 봤더니 첼로 뒤에 누운 여인(남자 다리 같지는 않다)의 벗은 다리 사진이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뭣에 씌었는지 책을 주문했고 도착한 그날부터 읽기 시작했다. 결과는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문학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현실에서라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인간을 이해하게끔 만들어버리는 그 마력과도 같은 힘에 대해.
간단히 말해 이 작품은 짧은 사랑과 긴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중년의 여인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발작 이후 몇 가지의 장애를 겪기 시작한다. 그때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까 스스로 묻고서 여자는 이렇게 답한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남편과 다 자란 딸이 있는 그녀는 자신의 일터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단번에 빠져들고, 이제 삶은 그와의 밀회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어느 날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간 남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발작 이래 다른 것들이 그랬듯 사랑의 기억조차 사라져버릴까 두려운 그녀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제 모든 걸 건다. 이 여자는 자신이 몇 살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백 살일지도 모르고 혹은 생각보다 아직 젊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나이가 먹는 내내 그 방 안에서 남자가 시트에 남긴 정액의 흔적을 들여다보고, 남자가 남긴 안경을 써 일부러 제 시력을 망가뜨리고, 자꾸만 바뀌는 그와의 대화 내용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또 그린다. 이따금 생활비를 인출해 식료품을 살 때를 제외하고 그녀는 남자와 정사를 나눈 그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
발작은 하나의 징후였을지 모른다. 이를 통해 그녀는 삶의 균열을 감지하고, 그래서 불안해지며 그런 만큼 생에 대해 보다 큰 갈증을 느낀다. 자신을 살아 있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죄수처럼 자기 내부에 갇혀 살던 “사랑이 해방되어 우리들 자신인 감옥을 부수고 나오는 데 성공”할 때뿐이라고 그녀는 단언한다. 해방된 사랑이 미쳐 날뛰니 자신은 기꺼이 그것의 식민지가 되어 그에 따른 행복과 불행을 만끽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하여 연인이 떠나고 나서도 그녀는 그 사랑을 끝내지 않는다. 그녀의 선택은 차라리 사랑에 대한 기나긴 애도였다. 이렇게 하여 한 마리 슬픈 짐승이 탄생했다. 스스로 유폐된 짐승, 사랑이 끝나고 그것을 애도하는 것밖에는 남은 게 없으며, 매우 기꺼이 이를 받아들인 짐승이.
이제 내가 깨어 있도록 붙잡아둘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간신히 몇 걸음을 옮겨 식육식물들 사이의 내 자리로 간다. 낯선 바람이 내 얼굴을 스피며 식물들의 잎새를 희롱한다. 이파리들 사이에 눈들이 반짝거린다. 여기저기에서 나를 지켜보는 눈들. 그것은 짐승들의 눈이다. 그들이 식육식물들 사이에 앉아 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지키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짐승들이 온다. 크고 작은 짐승들이 조용히 다른 짐승들 사이에 앉는다. 나는 그들 한가운데 누워 있고 그들이 무섭지 않다. 나는 그들 가운데 한 마리 짐승이다. 짐승인 나의 몸을 휘감는 긴 팔과 뭉툭한 코를 가진 갈색 털의 원숭이다. 그렇게 나는 누위 있다.
글쎄… 나는 이런 종류의 인간이 싫다. 하나에 대한 열정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부서뜨리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인간 말이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녀가 그렇게 되어가는 모습을 모두 지켜본 덕에 이제 나는 안다. 그렇게 함으로써밖에는 달리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는 죽음으로 보이는 길을 택함으로써만 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 역시 때때로 그렇게 버티지 않던가. 살아 있음에 대한 생생한 감각은 찰나에 왔다 사라지고, 그런 뒤 남은 시간을 버티기 위해 우리는 모두 애면글면 그 시간을 현재진행형으로 돌리고자 한다. 그러니 그녀가 좁은 방에서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에 대해 행하는 어떤 가치 판단도 무효하리라. 세상에는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고, 제 선택을 이렇게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 있는 거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완벽하게 멀어지고 잊힌 채 살아도 아무렇지 않은 여자들이. <세상이 이런 일이>류의 프로그램에서는 그들을 끝까지 기이하고 흥미로운 종으로 취급하는 데 그치지만, 적어도 소설은 그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덕분에 독자들 역시 이해라고 부를 만한 것 근처에 도달하고 마는 거다.
한 인간의 고통 어린 선택을 이해하는 데 있어 문학만큼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무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래서, 존재의 무참함을 무참함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게 하는 그런 힘이 소설에는 있다고, 또 이렇게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글_수경(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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