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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은 지금

고미숙샘 '로드클래식' 인터뷰 : 길 위에서 결국 우리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by 북드라망 2015. 6. 15.

일부러 맞춘 것은 아닌데 『고미숙의 로드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가 나온 날, 경기도 수지 '문탁네트워크'에서 고미숙 선생님의 <로드클래식>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해서 뜻 깊게도 ‘로드클래식’을 수강하러 오신 분들이 가장 먼저 『고미숙의 로드클래식』을 만나 보실 수 있었지요.^^). 문탁의 강좌반장 지원과 고은, 웹진팀의 봄날 기자님은 너무나 훌륭하게도 수강생들의 예습을 위해(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곰샘과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문탁네트워크 홈페이지에 실려 있구요, 꼭 문탁에서 보시고 싶으신 분들은 요기를 눌러주셔요). 예습은 『고미숙의 로드클래식』을 읽으실 저희 북드라망 독자님들도 하시면 좋겠지요? 그래서 같이 보시자고 얻어 왔습니다.^^(예습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수업 시간에 충실한 것이겠지요? 그…그러니까 『고미숙의 로드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가 본 수업이다… 뭐, 그런 말씀입니다욥~ 데햇!)




'고전'은 삶과 세상을 연결해 주는 접착제,
'길'은 느닷없는 마주침




6월 3일에 시작하는 강좌 <로드클래식>의 개강에 앞서, 강좌반장 지원이와 고은이 그리고 웹진팀의 봄날기자가 고미숙 선생님을 만났다. 미국에서 돌아오시자마자 충남 서산으로, 어디로 다니시기 바쁜 고미숙샘을 세 사람이 남산강학원으로 찾아가 인터뷰시간을 가졌다. 지원의 정리로 '로드클래식' 에 대한 궁금함을 풀어보자^^


사진 왼쪽부터 봄날 기자 고은, 고미숙 선생님, 문탁의 강좌 반장 지원.



지원

고미숙 선생님께서 본격적으로 고전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신 것은 『열하일기』를 리라이팅 하신 뒤부터라고 알고 있습니다. 강학원과 감이당의 MVQ, 길벗 등의 활동들을 보면 선생님에게 ‘길’이라는 주제가 쭉 이어져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하일기』 리라이팅에서부터 '길에 나서야한다!'라는 생각까지의 흐름이 궁금합니다.


고미숙

『열하일기』를 처음 만난 것은 ‘길’이나 ‘여행’이라는 주제보다는 ‘문장’이라는 주제였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문제적인 글을 쓴 사람들에 대한 특집을 준비하고 있었다. 독일의 카프카, 중국의 루쉰 등. 한국에서는 연암의 열하일기를 꼽았다. 그런데 그렇게 꼽힌 이 글이 여행기다보니, 다른 여행기들과 비교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걸리버 여행기』, 『돈키호테』, 『서유기』 등 학교를 다니면 주워듣는 여행기들을 비교하며 읽었다. 이후 『돈키호테』를 주제로 강의를 한 적도 있고, 반응이 좋아서 『열하일기』 강의를 하며 곁다리로 『서유기』 얘기도 많이 했다. 이후의 과정을 보면 뜬금없이 『열하일기』와는 다른 맥락에서 『임꺽정』을 만났다. 집에 있을 때에는 백수 쓰레기(?)였던 칠두령이 길 위를 떠돌아다니며 살고, 길에 있을 때 멋있어 보이고 편안해 보이고, 길에선 살아 움직였다. 이런 생각들 속에서 우리 시대의 ‘청년백수’, ‘길 위의 청년’ 같은 주제가 떠올랐다.


그 후 신기한 일들이 있었다. 2003년 『열하일기』 리라이팅 이후 중국을 많이 다녔고, 2012년에는 중국에서 『열하일기』 다큐도 찍었다. 2013년에는 뜬금없이 코넬 대학에서 초청을 받아 미국을 가게 되었다. 이게 이상했다. 중국은 모르겠지만 나는 미국을 갈 이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비자도 어렵고, 반미 의식도 있고. 당시엔 여러모로 미국행을 위해선 실존적인 결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찌됐건 코넬 대학을 선두로 『열하일기』와 관련한 강의를 위해 이후 미국과 일본을 오갔다. 리라이팅 이후 10년 만에 뭔가 생긴 것이 신기했다. 당시에 나는 사실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정말 정신없이 해외를 다녔다. 그런데 그렇게 다닐 때마다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첫째로는 ‘정말 이 세계가 연결되어 있구나’하는 것을 실감하는 경험을 했고, 둘째로는 연구실 후배들과 같이 갔을 때 연구실에서 보던, 좀비라고 부르던 청년 세대가 펄펄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두 번째의 경험이 결정적이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국경을 넘는 신체’라는 생각을 했다. 작년에도 네 번이나 해외를 나갔는데, 지금은 역마살이 온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들을 시절인연이라고 부른다. 준비한 대로,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고은

‘국경을 넘는 신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신체를 가지고 살고 있는 걸까요?그리고 이것이 문제라면 길 위의 신체는 어떤 신체인가요?

 

고미숙

우리는 사회와 제도의 강력한 체제를 보면서 견고한 질서가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지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시스템은 형체가 없고, 우리는 그런 시스템에 근근이 들러붙어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국민의 95%가 역술가를 찾는다고 한다. 견고한 질서가 없어 사람들이 우연성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표가 아닐까. 우리의 일상은 우연성에 항상 노출되어있다. 서양의 ‘코스모스(질서)’와 다르게 의역학과 주역의 철학은 우주 시공간에서 ‘카오스(혼돈)’ 를 보았다. 특히 길 위에 나서서 보니 우리의 신체가 입자적 신체가 아닌 파동적 신체라는 것이 더 잘 느껴진다. 요새 10대, 20대는 늘 디지털에 접속해서 살아가니까 몸이 흐느적흐느적 거린다. 그렇지만 사유가 자유롭지는 않다. 그 안에서 '유연성의 바다를 헤엄쳐갈 것인가, 스마트폰 중독에 빠져버릴 것인가'하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더불어 학교를 자연스럽게 벗어나고 일자리가 줄고 있는 불안한 상황에서, 이 파동을 타고 세계를 유영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도 할 수 있다. 오히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 재밌지 않나? '로드클래식'들은 여행이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돌아다닐 수가 있나 싶을 정도의 여행기들이다. 책을 보면서 인간은 원초적으로 길에 나서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하더라도 길에 나서는 순간 변수를 피해갈 방도는 없다. 우연성에 나를 노출시키는 것, 뜻대로 되지 않는 것, 더불어 약간의 위험을 동반하는 것이 길 위의 신체다.





지원

『열하일기』, 『동의보감』 등 그간 선생님의 작업들은 주로 동양고전과 관련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강좌의 텍스트들은 주로 서양고전들입니다. 2012년 ‘유머와 열정의 패러독스, 열하일기’ 강의에서는 『걸리버 여행기』를 『열하일기』와는 ‘쨉도 안되는 여행기다’라고 표현하셨는데, 특별히 서양고전을 선택하게 된 이유나 전환점이 있을까요?


고미숙

‘서양고전’이라서라기보다는 ‘여행기’이기 때문에 엮인 책들이다. 그간 서양철학, 서양문화사를 일부러 안 다룬 것은 아니다. 나는 한국 고전문학 박사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서양적으로 공부를 해 왔다. 이론적 기반은 전부 서양철학이었다. 당시엔 그것을 읽고 적용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지적인 것이라 여겨졌다. 지금 생각하면 민망할 정도로 동양 문학에 서양 철학을 강제로 적용했다. ‘사설시조의 계급성’ 등, 맑스의 이론을 적용해 사설시조를 난도질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푸코, 들뢰즈 등 서양철학을 계속 공부했다.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서양고전을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상황들에 비해 동양고전,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 고전은 주목이 받지 못하고 있었다. 서양식 프레임을 깨야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고, 이것을 깨려면 동양적 사유를 충분히 길어 올려야 했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동의보감, 의역학을 공부하며 오히려 서양적 사고의 한계나 유래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처음엔 서양에서 배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이후엔 극복을, 그 다음엔 적대감을 가지게 된 것인데, 지금은 서양적인 사고, 서양문명의 배경 등이 조금씩 이해가 되어가는 것이다. 서양을 적대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서양과 섞여있다. 단적으로 뉴욕에 가보면 서울이 얼마나 메트로폴리스인지, 얼마나 서양적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밝혔듯 그것이 서양의 여행기 고전을 선택한 이유는 아니다.

'로드클래식'의 고전들은 서양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좌충우돌이다. 『돈키호테』가 물론 서양적인 많은 것을 갖고 있지만, 서양 안에 비서양에 가깝다. 그래서 <돈키호테>는 남미의 포스트 모던 문인들이 근대를 극복하기 위한 문학으로 굉장히 좋아한다. 소설 문법을 다 깨는, 도대체 이런 식의 사유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싶은, 정말 대책 없는 작품이다. 이는 셰익스피어나 괴테와는 다른 21세기적 문학이다. 『걸리버 여행기』도 황당하다. 스위프트는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신성 모독적인가!『서유기』는 말할 것도 없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미국 문학의 대표격인데, 화폐 바깥에 있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는 그런 주인공이 미국 문학의 대표다. 이런 작품들은 위대한 고전이지만 서양 문학의 정수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길에서 삐져나온 이단아 같은 것.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가 ‘여행’이라는 주제 때문일 것이다.





고은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시는 고미숙 선생님께서도 새로운 길 위에 계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길 위의 시간들에서 선생님이 직접 경험하신 것 들이 궁금합니다.


고미숙

작년에 길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아귀가 딱 들어맞아서 바로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 거의 생방송처럼 글을 썼다. 여행을 다니던 중이었기 때문에, 책을 끌어안고 가지고 다니면서 읽고 원고를 구성해냈다. 더군다나 '낭송Q'도 준비하던 중이었고 집안일까지 겹쳐서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기적같이 다 해내긴 했다. 거의 한 시간 전에 공부해서 강의하러가는 것과 같이 글을 썼는데, 이것 나름이 주는 생동감 같은 게 있다. 원고를 많이 쓰기는 했지만 아직 말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서유기』 같은 텍스트는 불경을 공부해서 단독으로 조명할까 생각중이다. 또 '낭송 로드스쿨'도 새로 만들 생각이다. 낭송하고 고전을 깊이 읽고 여행을 다녀와서 글로 묶어내는 학교, 실험이다. 아이디어는 아이디어로 계속 떠오른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시절과 접속이 되면 일들이 알아서 진행이 된다. 그러니까 사건이 사건을 만들어내고 나는 그 사이를 가로지를 뿐이다.




고은

월간 중앙에 연재하신 글에서 유목은 "절대성, 고정성이 사라지는 것이며 문명 한가운데에서 문명의 외부를 사유하는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특히 "시공간을 전혀 다르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라는 말이 감명 깊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강좌의 텍스트들은 전부 국경을 넘는 여행기입니다. 유목은 비일상적이고 물리적인 변화가 있을 때에서야 가능한 것인가요?


고미숙

유목은 비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을 다르게 변주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비정규직들이 낙타처럼 일하다가 외국에 가서 자신을 방전시키고 돌아오는 것, 이런 것은 여행이라고 볼 수 없다. 삶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여행에 가지 않고도 삶을 바꿀 수 있지만, 사람들이 순례를 떠나는 이유는 길에 나서지 않고 삶이 길임을 깨닫기 어렵기 때문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돌아오는 것을 일상에서 느끼기 어렵지 않나. 여행에서 힘을 길러, 돌아와 일상을 바꾸는 것이 여행이다.




지원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함께 많은 이들이 해외여행을 다니게 되고, 과거와 달리 해외여행을 위한 문턱도 많이 낮아졌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행은 너무 쉽게 ‘상품’이 되어버립니다. 고미숙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길’은 이러한 여행과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고미숙

어차피 길을 열게 된 것도 자본이다. 자본이 자유롭기 위해 국경의 문턱, 관세 등이 낮아졌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전 세계의 길을 열고, 만나고자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자본이 여기에 올라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상생 상극이다. 구석기 이래 기술문명과 인간 사이는 상생상극이다. 문제는 상생상극을 하며 ‘어떻게 자본에 포획되지 않는 여행을 할 것인가’인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청년백수들의 여행이 자본에 포획되기가 쉽지 않다. 이들에겐 포획될 자본도, 갈구하는 욕망도 없다. 게으르고 무능하다. 한 마디로 이용가치가 없다. 그런 것이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이다. 자본에 끌려가지 않고 문명을 교활하게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짜 문제는 기술에 익숙해져 몸을 쓰지 않는 것이다. 스마트 폰 데이터가 없으면 무력, 무능해지는 신체, 이것이 중독이고 포획이다. 이것(기술)도 쓰고 저것(몸)도 쓰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길을 여는 것이, 기술을 활발하게 하거나, 그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여행일 것이다..




10년 전, 내가 중학생일 때 이우학교에 고미숙 선생님이 강의를 오신 적이 있었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주제로 진행되었던 강의의 끝자락에 나는 엉뚱하게도 “책을 읽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나요?”라는 질문을 던졌었다. 한 바탕 웃음이 터진 뒤에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답변이 돌아왔었다. “있으면 해라. 없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건 나에게 꽤 큰 전율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10년이 지나는 동안 책 한권을 잡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슨 인연에서인지, 3년 전 군대에서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그 책들 중에 고미숙 선생님이 리라이팅 하신 '열하일기'가 있었다. 그리고 전역하자 마자 내가 문탁에서 처음만난 강의도 문성환 선생님의 <연암-『열하일기』> 강의였다. 이제는 내 삶에서도 책을 읽는 일이 떼어 놓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책은 내 삶을 바꿨다. 그런 말씀을 고미숙 선생님께 전하며, 어떤 대답이 돌아올 줄 알면서도 또 한 번 엉뚱한 질문으로 인터뷰를 마치고 싶었다.



지원

여행을 떠나기 위해 꼭 고전을 읽어야 하나요?


고미숙

나는 굉장히 실용적인 사람이다. 내가 고전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이롭고 재미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함께가는 혹은 여행지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많은 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어도 할 수 있다면 괜찮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그런 식의 상상력을 다 빼앗아 버렸다. 임꺽정은 책을 읽지 않아도 길 위에 나서는 것 자체가 상상력이었다. 이미 야생성을 몸에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가진 신체는 우리를 상품의 소비자로 만들 뿐이다. 고전은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접착제다. 거창하고 진지한, 심오한 것이 아니다. 즐겁게 삶의 새로운 형식을 발명하고 창안해 내는 것이다. 고전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해라. 길 위에 나서면 자연, 문명, 습속도 만나게 되겠지만, 결국 우리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고전은 사람을 공부하는 것이다.




 ps.
지원 : 나는 또 여행을 가고, 고전을 읽게 되지 않을까?
고은 :  인터뷰를 하면서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선생님이 뿜어내시는 길의 생동감만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번 강의에서 생동감의 실체를 자세히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리_지원(문탁 네트워크)


북드라망판(^^)『고미숙의 로드클래식』 고미숙 선생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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