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머레이 주연 ‘세인트 빈센트’
우리는 모두 선인이며 악인이다
- 관계의 선순환을 구축하자
가장 오래된 도덕적 판단. ― 우리 가까이에 있는 어떤 인간의 행위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우선 우리는 이런 행위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주목한다. 우리는 이 행위를 오직 이러한 관점에서만 본다. 우리는 이 행위가 초래하는 결과를 그의 의도로 간주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이러한 의도를 갖는 것을 그의 지속적인 성질로 간주하며 이때부터 그를, 예를 들어 '유해한 인간'이라고 부른다. 이런 추론은 삼중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 모든 도덕의 기원이 다음과 같은 혐오스럽고 비소(卑小)한 추론에 있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 해로운 것은 악한 것(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다. 나에게 이로운 것은 선한 것(그 자체로 기분을 좋게 하고 유익한 것)이다. 나에게 한 번 또는 몇 번 해를 입히는 것은 그 자체로 적대적인 것이다. 나에게 한 번 또는 몇 번 이익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 우호적인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서광)』 중에서
영화 <세인트 빈센트>는 순전히 조연인 멜리사 맥카시 때문에 선택한 영화였다. 미드 시트콤 <마이크 앤 몰리>―고도 비만 남녀 주인공의 케미가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게 하는―를 보고 팬이 된 후, 멜리사 언니가 출연한 영화도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찾아보고 있다(미드에 익숙해진 후유증(?)인지 45분 넘어가는 영상물을 끊지 않고 쭉 이어보기가 쉽지 않아서 최근에는 영화를 잘 못 본다……;;).
“60살 철부지와 10살 애어른, 인생을 알게 해준 특별한 내 친구”라는 영화 포스터 카피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쉰 살이 넘는 나이차를 넘어 두 사람이 특별한 우정을 나누는 영화이다. 아빠와 이혼한 엄마(멜리사 맥카시 분 >_<)를 따라 새로운 동네에 이사온 올리버(제이든 리버허 분). 어찌어찌하다 괴팍한 옆집 할아버지(빌 머레이 분)가 일하는 엄마 대신 보모가 되고, 이 특별한(?) 보모 할아버지와 함께하며 올리버는 어른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왼쪽부터 엄마(멜리사 맥카시), 올리버(제이든 리버허), 빈센트(빌 머레이), 다카(나오미 왓츠)이다.
사실 영화 초반에 올리버가 전학간 학교에서 신부(그러니까 bride가 아니라 priest)인 선생님이 ‘성자’(saint)에 대한 수업을 하며 우리 주변의 ‘성자’를 찾아보자고 할 때 이미 누구나 영화 제목에 명시된 괴팍한 할아버지 빈센트가 올리버의 ‘성자’로 지목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미 잘 알고 있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느낌이라 싱거울 수 있지만, 그래도 소소한 재미를 느끼며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빈센트 할아버지는 주변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못되고, 이기적이고, 진상인 캐릭터다. 은행에서는 대출이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통장 잔고는 오히려 마이너스인데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은 ‘경마’다. 그러면서 임신을 해 인기가 떨어진 건 물론이고 스트립클럽에서 해고(?) 위기에 있는 성매매 여성 다카(나오미 와츠 분)와 매주 관계(?)를 가지고, 자주 들르는 바에서는 친구인 바의 주인이 그의 건강을 생각해 술을 더 못 마시게 하자 화를 내며 진상짓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빈센트가 이런 모습만 지닌 사람이었다면 아무리 올리버가 그를 좋아한다 해도 ‘우리 주변의 성자 찾기’에 빈센트 이름을 올릴 생각은 못했을 터. 빈센트를 따뜻한 사람으로, 훌륭한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소수지만) 있다. 대표적인 이가 바로 빈센트의 아내가 있는 요양원 직원인 아나. 아내가 요양원에 있는 8년 동안 매주 아내의 빨래를 직접 가져가서 해오는 모습을 보아온 그녀에게 빈센트는 사랑이 가득한 헌신적인 남편이다.
올리버는 성인은커녕 불량인생으로 보이는 빈센트에게서 ‘성자’의 면모들을 발견해 냈다. 그리고 이 ‘발견’이 가능했던 건 올리버가 빈센트에게 가졌던 호의와 애정 덕분이다. 결국 어떤 배치, 어떤 관계, 어떤 국면 속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빈센트는 선인도 악인도 되지만, 그 두 모습을 모두 만났을 때 어떤 쪽에 더 무게를 실어 그 사람을 바라볼 것인지는 그에 대한 애정에 달려 있다는 걸 올리버는 보여 준다.
한 눈에도 괴팍하고 더러워서 피해야 할 것 같은 빈센트와 올리버의 우정이 시작된다.
살아가다 보면 아무리 좋은 사람에게도 실망스러운 면이나 싫은 면을 보게 된다. 또 그보다는 훨씬 드문 일이지만, 싫은 사람에게 호의를 가질 만한 부분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런데 이 실망스럽다거나 싫다거나 나쁘다는 판단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우리는 흔히 어떤 ‘판단’은 이성적으로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감정’이 이미 ‘이성’ 이전에 강력하게 마음을 움직여 판단에 영향을 준다. 특히 자주 만나거나 심리적으로 가까운 관계일수록, 그의 어떤 행동에 대한 나의 반응은 ‘감정’에 붙들려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사실 한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가능한 ‘이성적 판단’이 내 일이 되었을 때는 쉽지 않아진다. 나만 하더라도 예컨대 친구가 부부싸움을 하고 하소연하는 경우, 친구 남편의 입장도 친구의 입장도 모두 이해가 되면서 서로 양보할 지점이 참으로 ‘잘’ 보이지만, 내가 누군가와 다투게 될 때는, 내게 나의 입장은 너무 선명하고 분명하고 올바른지라, 상대는 무조건 ‘틀린’ 게 되어 버리기 일쑤다.
한편, 내가 A후배에게는 정 많은 좋은 선배이고, B후배에게는 성마른 싫은 선배라면, 그 관계 속에는 감정을 그렇게 구축해 온 상호관계의 역사가 있다. 이를테면 A후배랑은 취향도 비슷하고 감성도 비슷하여 저절로 끌리는 부분이 많아 같은 사안에도 내 반응이 호의적으로 나가게 되었고, 그런 반응이 선순환을 이루었다면, B후배랑은 뭔가 말의 호흡도 다르고 소통방식도 달라 서로를 피곤하게 여기게 되어 반응도 짜증스럽게 나가게 되었고, 그 반응이 악순환을 이루게 되는 식이다. 일단 감정의 선순환에 들어서게 되면 웬만한 싫은 행동도 이해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데 반해, 악순환에 들어서면 좋은 행동, 선의의 행동도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불순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기가 쉽다.
그렇다면, 관계에서 감정의 선순환을 많이 다져놓는 것이 필요할 터이다. 물론 세상살이의 이치상 모두와 그런 관계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노력하지 않을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세운 규칙이나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악인인 것은 아니며, 단지 나와 지금 (일상의 혹은 감정의) 호흡이 잘 맞지 않을 뿐이다. 내가 누군가와 호홉을 잘 맞추지 못할 때 그에게 나 또한 그렇게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누구는 어떻다”라는 평가를 한두 번의 자기 경험으로 말하는 데 조금 신중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 신중함만큼 ‘선순환’의 여지도 늘어나게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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