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몸의 길을 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길 내기
우리 집의 연례행사 중 최악의 행사는 단연 김장이다. 2박 3일 동안 200포기에 가까운 배추를 다듬어 절이고 씻고 양념하는 일이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조카들 시험기간을 피하느라 12월 중순경에 김장을 했다. 날씨는 매섭게 추운데 시간을 못 맞춰서 절인 배추를 새벽에 씻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모두들 집에 돌아가서 감기몸살을 앓았다.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추워지기 전에 김장을 하자고 단단히 별렀다.
김장의 계절, 겨울이 왔다!
11월 말, 여섯 가족이 막내 여동생 집에 모였다. 날씨는 따뜻했다. 하지만 우리는 털 달린 장화, 기모고무장갑, 워머, 비닐 앞치마까지 모두 챙겨 입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웬걸? 배추와 무를 알아보러간 제부가 감감무소식이었다. 부랴부랴 차를 타고 배추를 예약한 밭으로 몰려갔다. 고개를 두 개나 넘고 물어물어 찾아간 배추밭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 눈 속에 우리 배추가 있다면 안 봐도 비디오 아닌가? 그랬다. 틀림없이 우리 배추는 몽땅 얼어있었다. 전전날 내린 폭설에 배추 겉잎이 물기를 머금고 살포시 얼어버렸다. 삼사년 전인가? 살짝 언 배추로 김장을 했다가 배추가 물러져서 낭패를 본적이 있던 식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래 가지고는 안 된다. 이 배추로는 안 된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두 작심하고 뒤돌아서는데 엄마의 한마디!
“사위 체면도 있는데, 이걸 이래 놓고 가면 안 된다. 고만 싣고 가자.”
배추밭주인이 투덜거리는 소리도 소리지만, 이 아까운 배추를 두고 엄마는 그냥 돌아서지 못했다. 모두들 김장 생각만하고 제부 생각은 못했다. 김장을 모여서 하자고 한 것도 이참에 식구들 얼굴 한 번 더 보자고 시작한 건데…. 부랴부랴 트럭에 배추를 싣고 오면서 대책회의가 벌어졌다. 언 배추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새로 배추를 어디서 구할 것인가? 옥신각신 끝에 언 배추는 중국집을 운영하는 제부형님 식당에서 소비하기로 했고, 새 배추는 농협마트에서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매번 예측할 수 없는 김치의 운명은?
매번 김장때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구멍이 생긴다. 날씨가 따뜻하면 배추에 문제가 생기고 배추가 괜찮으면 날씨가 따라주지 않는다. 허나 이 예기치 않은 구멍들이 매번 새로운 김장 맛을 만들어 내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은가? 기껏 작지만 알차고 맛있는 고랭지 배추를 예약했는데도 정작 쓰지 못하고 다른 배추로 김장을 하니 말이다. 이 구멍들이 만들어낸 파장은 양념에도 영향을 미친다. 매년 그때의 날씨와 배추상태에 따라 양념의 매운 정도가 차이가 났고, 선호하는 젓갈도 달라졌다. 심지어 배추에 양념을 묻히는 정도까지 차이가 났으니, 이 정도면 ‘변주하는 김장, 어떻게 김장이 안 변하니?’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 각양각색의 변주를 조율하는 사람이 있다. 애초에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런 대가족이 모여서 김장을 담그자는 생각조차 못했을 터. 몇 년째 이 일을 느끈히 해오고 있는 사람은 막둥이부부다. 때맞춰 고추를 사들여 빻아놓고, 그해에 쓸 젓갈을 준비한다. 몇 접이나 되는 마늘을 까놓고 여섯 가족이 모여 먹을 음식을 준비한다. 올해는 만두버섯전골과 황태찜!(얼마나 맛있던지, 지금도 침이 고인다.) 다른 가족들은 알아서 음식을 하나씩 해 오고 2박3일 동안 나눠 먹는다.
온 가족이 모여 김장을 담그다보면 겉으로 보기엔 화기애애할 것 같지만 틈만 나면 이런 저런 일들이 생긴다. 사람이 열 댓 명이 모여 먹고 자고 일하는데 아무 일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어떤 놈은 꾀부리고 일 안하고, 어떤 놈은 힘내라고 준 술을 받아먹다 취해버리고, 어떤 놈은 매실액 가지러 갔다 함흥차사고…. 이럴 때마다 우리는 틈틈이 욕하고 별명도 붙이고 일하면서 논다. 가히 왁자지껄한 한바탕 마당놀이가 펼쳐진 셈이다. 막둥이부부는 이 마당을 연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의 네트워크를 펼칠 장(場)을 열고 사람과 사람을 엮어준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막둥이부부는 우리 가족의 매니저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 몸에도 이런 역할을 하는 곳이 있다. 그렇다. 오늘은 우리 몸의 매니저를 만나보자.
우리 몸의 원조 매니저, 삼초
매니저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관계의 길을 내는 사람이다. 우리 몸에서 장부와 장부를 연결하고 길을 내는 역할을 하는 곳은? 그렇다. “형체는 없으나 작용을 지녀 모든 기를 통솔하는 곳”, 삼초가 그것이다. 『동의보감』에 삼초는 “음식물의 길이며, 기(氣)가 생성되고 소통되는 곳”이라고 하였다. 살아간다는 것을 몸으로 거칠게 표현하면, 음식물을 섭취해서 에너지를 얻고 나머지는 내보내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삼초는 몸 전체의 리듬에 관계를 만들고, 살아감의 베이스가 되는 장부가 아닐까? 삼초가 음식물의 길(살아감의 베이스)이 될 수 있는 것도 우리 몸의 모든 기를 주관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기는 이 길을 여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상초(上焦)의 기는 위(胃)의 상구(上口)인 분문(噴門)에서 나와 식도와 나란히 위로 올라가서 횡격막을 뚫고 지나 가슴속에서 퍼지고, 다시 횡으로 달려 겨드랑이 아래에 이르러 수태음폐경(水太陰肺經)의 분야를 따라 순행하다가, 수양명경(水陽明經)으로 되돌아와서 위로 올라가 혀에 이르렀다가 아래로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을 타고 내려와서 영기(營氣)와 함께 양분(陽分)을 25회 순행하고, 음분(陰分)으로 가서 또한 25회를 순행하여 1주기를 마친 다음 다시 수태음폐경에서 만나는데, 이것을 위기(衛氣)라고 한다.
─『동의보감』, 「내경편」, 삼초부, 법인문화사, 441~442쪽
가슴 속 횡격막 위에 자리잡은 상초는 심폐(心肺)의 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만일 상초가 없다면 어떻게 심폐의 영기와 위기를 돌릴까? 중초 또한 횡격막 아래에서 배꼽 위에 자리를 잡고 음식물을 부숙시킨다. 중초의 길은 “음식물의 기미(氣味)를 받아들여 소화시킨 다음 조박(糟粕, 찌꺼기)을 분별하고, 진액을 증발시켜 정미로운 것으로 변화시킨 다음 위로 폐맥(肺脈)에 주입시키고 다시 혈액으로 변화시켜서 몸을 봉양”한다. 여기서 단독으로 경맥 속을 운행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영기다. 하여 중초는 우리 몸의 중앙을 차지하면서 비위의 작용이 활발하다. 만약 비위의 길을 여는 중초가 없다면 어떻게 음식물을 부숙시킬까? 마지막으로 하초는 배꼽 아래를 말한다. 하초는 “장부를 돌아 갈라져 방광으로 주입하여 그 속으로 스며든다. 따라서 수액과 곡물은 비위 속에서는 같이 머물다가 조박이 되어 함께 대장으로 내려가 하초가 되어 수액을 삼투시키면서 수곡이 함께 내려가 쓸데없는 즙을 분비해 버리고 하초를 따라 방광으로 스며든다.” 만약 하초가 없다면 어떻게 진액을 삼투시키고 쓸데없는 것은 버리고 스미게 할 수 있을까?
삼초는 매순간 몸과 삶의 길을 만들어낸다.
상초와 중초, 하초를 설명하는 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장부의 기능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상·중·하의 길을 설명한다. 아닌 게 아니라 상·중·하로 구분해 놓은 것도 장부의 기능에 따라 임의로 구분한 것일 뿐이다. 일테면 인생을 유·소년기, 청·장년기, 노년기로 구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인생을 어디까지가 유·소년기고, 어디까지가 청·장년기로 구분할 수 있을까? 인생은 그냥 살아감이 있을 뿐이다. 매순간 인생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삼초도 이와 마찬가지다. 인생의 길을 걸어가듯 매순간 길을 만들어내고 몸의 동선을 포착한다. 하여 우리 몸의 다양한 선분들을 연결하고 그 선분은 몸 전체를 관통한다. ‘삼초의 길 내기’는 우리 몸 전체를 움직이는 힘이다. 그런데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혼융하는 불, 상화가 필요해
오행상 삼초는 화(火)의 기운이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길처럼 화는 사람의 움직임을 주관한다. 그러므로 화가 없으면 사람은 활동할 수 없다. 그런데 한의학에서 화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몸 안에 있는 화, 군화(君火)가 있고 다른 하나는 자연 세계의 화, 상화(相火)가 있다. 하늘로부터 받은 상화와 몸에 있는 군화가 서로 작용함으로써 우리 몸은 움직일 수 있다. 『동의보감』에는 군화와 상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화는 속은 음이고 겉은 양으로서 움직임을 그 주된 속성으로 한다. 이름을 가지고 말하자면 형체와 실질이 상생하여 오행에 배합되므로 군(君)이라 한다. 지위를 가지고 말하자면 허무(虛無)에서 생하여 제자리를 지키고 명(命)을 받아 그 움직임에 기인하여 가히 드러날 수 있으므로 상(相)이라고 한다. 천(天)은 생물을 주재하므로 항상 움직임에 근본을 두는데, 이렇게 항상 움직임에 근본을 둘 수 있는 까닭은 다 상화(相火)의 작용에 따른 것이다.
─『동의보감』, 「잡병편」, 화(火), 법인문화사, 1170쪽
여기서 군화는 “형체와 실질이 상생해서 오행에 배합된다”고 했으니 태어나면서 지니고 있는 불이다. 왜냐하면 태어남 자체는 오행이 배합된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화의 설명을 보면 이와 다르다. “허무에서 생하여 명을 받아 그 움직임에 기인하여 드러날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상화는 아무것도 없는데서 천지간의 움직임에 기인해서 생기는 불이란 뜻? 그렇다. 천지간에는 만물이 생겨나고 천변만화하는 움직임이 늘 있다. 그래서 더불어 생긴 불이라서 서로 상(相)자를 써 상화(相火)다. 그렇다면 삼초는 이 중에 어떤 불일까? 감이 오는가? 그렇다. 삼초는 더불어 생긴 불, 상화다.
삼초는 병화(丙火)에 속한 부(府)가 되므로 그것이 발동할 적에는 근원이 없는 상화(相火)가 된다.
─『동의보감』, 「내경편」, 삼초부, 법인문화사, 442쪽
상화가 근원이 없다고 해서 우습게보면 큰코다친다. 상화는 천지의 기운과 교류하기 때문에 그 움직임에 변화가 많고 작용력이 크다. 그래서 상화의 불길은 쉽게 일어나 몸에 치명타를 안기기 일쑤다. 이 때문에 『동의보감』 여기저기에선 상화를 조심하라는 경고메세지가 책을 펼치면 나온다.
화(火)란 만물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니, 쇠를 녹이고, 흙을 말리고, 나무를 활활 태우고, 물을 말리는 것은 다 화(火)의 작용이다. 화사(火邪)로 생긴 병은 그 해가 심히 크고, 그 변화가 심히 빠르며, 그 증세가 심히 뚜렷하고, 그 죽음이 심히 빨리 닥친다.
─ 『동의보감』, 「잡병편」, 화(火), 법인문화사, 1170쪽
화를 조심하라는 경고메세지 섬뜩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동력이 없다면 우리 몸은 그 어떤 생성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냥불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칙~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꽃 가운데가 검게 비어 있지 않은가? 불꽃은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지만 그 안은 고요하게 비어 있다. 이 가능성의 공간, 천지만물과 혼융되어 비어 있는 공간. 불은 그 비어 있는 공간에서 길을 낸다. 우리 몸의 길 내기, 상화가 필요하다.
지구! 몸의 길 내기, 사람의 길 내기
오늘의 혈자리 지구(支溝)는 수소양삼초경의 경혈(經穴)로서, 오행상 화(火)에 속한다. 소양상화의 기운과 삼초의 화 기운, 오행에서도 화에 속하니 트리플 화의 혈자리다. 지구의 이 강력한 화 기운은 병적으로 정체를 빚는 기혈을 흩어준다. 어혈이 뭉쳐 있거나 타박상으로 멍이 들어있을 때 재빨리 혈을 흩어놓는다. 그래서일까? 상중초의 길이 막혀 아픈 흉협통에도 좋고, 하초에 기화가 잘 안되어 생기는 변비에도 좋다.
지구의 지(支)는 육달월(月)을 붙여 지(肢)라고도 한다. 팔을 말한다. 구(溝)는 도랑이다. 도랑이란 말은 지구가 팔의 근육과 근육 사이에 있어서 마치 도랑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그렇다면 지구는 어디에 있을까? 지구는 손목에서 위로 3치 올라가 두 뼈 사이 오목한 곳에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삼초는 오장육부의 길을 낸다. 이 길 내기는 천지의 기운과 몸의 기운이 만나서 생기는 상화의 기운을 쓴다. 지구는 이 강력한 화 기운으로 장부의 기를 소통시키며 길을 낸다. 지난 학술제 때 고샘은 “나는 원조매니저다”는 주제로 강연을 하셨다. 수유+너머에서 남산강학원을 거쳐 감이당에 이른 여정을 재미있게 들려주셨다. 나는 그때 느꼈다. 고샘은 배움의 네트워크를 좋아한다는 것을,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더욱이 사람을 더없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난 말하고 싶다. 우리 집 원조 매니저 막둥아, 고맙다. 그리고 공동체의 원조 매니저 고샘, 참말로 고맙심대이~~~
이영희(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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