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릉천, 삶을 굴신하다
어느 뻣뻣녀의 살풀이
<감이당 대중지성> 공부를 시작하면서 신체 단련을 하고 싶었다. 다른 학인들처럼 108배나 등산으로 시작해볼까 생각했지만, 재미가 없으면 금방 싫증 내는 스타일이라 망설여졌다. 고민하다 한국무용을 배워보기로 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리듬에 따라 몸을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몸이 단련되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은 적중했다.
한국무용은 굴신(屈伸)이 반복되는 하체 동작으로 이루어진다. 지속적으로 장단에 맞춰 다리를 굽혔다 폈다하는 동작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면서 발을 디딜 때는 다른 쪽 발뒤꿈치를 스치면서 발뒤꿈치부터 발바닥, 발가락 순으로 디딘다. 이런 동작이 음악의 리듬과 강약, 자기 호흡과 혼연일체를 이루면서 진행된다. 동작이 느리고 보폭이 좁아서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움직임이 느린 만큼 강밀도는 높고, 자기 호흡과 움직임을 일치시키려면 몸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
헌데 한국무용을 같이 배우던 언니 중에 이 중요한 ‘굴신’이 안 되는 뻣뻣녀가 있었다. 민요를 멋들어지게 불러재끼는 언니였는데 안타깝게도 몸으로는 리듬 타기가 영 힘들었다. 더욱이 이 뻣뻣녀가 좋아하는 춤은 살풀이. 살풀이는 음악도 다른 춤보다 느리지만, 굴신이 전면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춤이다. 무릎을 굽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엎드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일어나서 돌고, 살풀이 수건을 던졌다 잡아끌었다 하면서 팔과 다리, 어깨와 목 관절을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억....일어날 수가 없어!!
그런데 이 뻣뻣녀가 가장 좋아한 대목은 살풀이춤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 뻣뻣녀는 절규하는 듯한 구음(口音)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풀이 수건을 받쳐 들고 엎드려서 흐느꼈다. 구음이 잦아들고 일어서려고 하건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다리를 굽히고 다시 한 번 배에 힘을 주고 일어나 보려 하지만 몸은 천근만근. 하는 수 없다. 신주단지 모시듯 받들었던 살풀이 수건을 내리고 바닥을 짚고 일어날 수밖에. 그러다 음악은 저 멀리 가버리고 두 박자나 놓쳐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슬쩍 묻어가자. 뻣뻣녀는 리듬을 잃고 다른 사람들 뒤를 따라 엇박을 내며 뒤처진다.
뻣뻣녀의 살풀이는 늘 이런 식이다. 너무 심취하다 스텝이 꼬이고, 리듬을 타다 말고 엇박이 나고…. 살을 풀려다 살을 붙이는 꼴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뻣뻣녀를 위한 혈자리! 뻣뻣녀에서 탈출해 멋들어지게 살풀이춤을 추는 언니를 기대하며 오늘의 혈자리와 굴신의 관계를 탐사해보자.
굴신의 메커니즘: 담을 조율하는 간
굴신은 굽을 굴(屈)과 펼 신(伸)이 조합된 말이다. 말 그대로 굽혔다 폈다하는 동작을 말한다. 장단에 맞춰 때론 느리게, 때론 빠르게 다리를 굴신하는 한국무용은 무릎의 움직임이 잦다. 『동의보감』에 “무릎은 힘줄이 모이는 곳인데, 만약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지 못하고, 걸어갈 때 몸이 구부러져서 지팡이에 의존하는 것은 힘줄의 기능이 다 했다”고 하였다. 힘줄은 오장 중 간(肝)에 배속되는데 간은 힘줄을 생기게 한다. 그러므로 간에 병이 들면 힘줄에 경련을 일으킨다.
큰 힘줄이 열을 받으면 수축되어 짧아지고, 작은 힘줄이 습사(濕邪)를 만나면 늘어져서 줄어들지 않는다. 수축되어 짧아지기 때문에 땅기면서 펴지지 못하고, 늘어져서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약해지면서 힘이 없게 된다.
─『동의보감』, 「외형편」, ‘근’(筋) 법인문화사, 830쪽
힘줄이 오그라들거나 늘어지는 증상이 생기면서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굴신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 그렇다. 굴신과 간은 상호작용하는 사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오늘의 혈자리 양릉천은 족소양담경에 속해있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불쑥 간이냐고? 장부에 음양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을 터. 담은 간과 경맥으로 서로 얽혀 불가분의 표리 관계를 이룬다. 그러므로 『영추·본장』에서는 “간합담(肝合膽)”이라고까지 표현해놓았다. 담의 주요 기능은 담즙의 저장과 배설을 통해 음식물의 소화를 돕는 데 있다. “담즙은 간에서 생성되어 담에 저장되고, 성질은 차고 맛이 쓰며 황록색을 띤다. 음식물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소장으로 흘러 들어가 비위의 운화를 돕는다. 담즙은 간장에서 나온 것으로 맑고 깨끗한 액이다.”(배병철, 『기초한의학』, 성보사, 201쪽)
간, 담 때문이야;;;;;
비위의 운화를 돕고 소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담즙은 간의 소설기능에 의해 조절된다. 간의 소설기능이 정상이면 담즙이 정상적으로 분비되면서 비위의 소화·흡수기능도 왕성해지지만, 소설기능이 실조되면 간기가 울결되어 담즙이 순조롭게 분비되지 못해 각종 병증이 나타난다. 대체로 흉협 부위가 창만하고 아프고, 비위의 운화기능에도 영향을 미쳐 식욕부진, 복부창만, 대변당박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소설기능은 기운을 흩어주는 것인데 이것이 순조롭지 못하면 기운이 뭉쳐서 담(痰)이 되고 굴신이 어렵게 된다. 결국 뻣뻣녀는 간의 소설기능이 실조되어 담즙이 순조롭게 분비되지 못하는데 원인이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뻣뻣녀에게 한국무용은 도움이 되는 운동일까?
굴신, 유연하게 리듬을 타는 능력
한국무용의 기본자세는 굴신이다. 다리를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한국무용은 하체 근력을 키우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된다. 왼쪽과 오른쪽 다리를 부드럽게 연결하면서 중심 이동을 하기 때문에 균형감각과 척추 주위의 근육 힘도 자연스럽게 길러진다. 또 앞발을 딛는 발레와 달리 발뒤꿈치부터 딛는 동작은 몸을 펴는 데 도움이 된다. 요즘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죄다 거북이 목을 하고 있다. 컴퓨터 하느라, 스마트폰 들여다보느라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런 거북이 목은 몸을 점점 앞으로 나가게 만든다. 결국 척추가 바로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허리가 아프거나 여기저기가 쑤신다.
몸의 굴신이 잘되면 삶도 유연해진다!
그러나 발뒤꿈치부터 딛는 굴신은 하복부에 힘을 주게 되고 허리를 펴게 만든다. 이 동작을 물 흐르듯이 하는 것이 한국무용이다. 굴신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언니가 뻣뻣녀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흐름을 타지 못하는 데 있다. 어떤 방향이든 자유자재로 구부러지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 굴신은 유연하게 리듬을 타는 능력이다. 이것은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새로운 것, 익숙하지 않은 것에 뻣뻣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마음. 굴신은 생각을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게, 생기발랄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삶을 생생하게 만드는 탄력을 주는 것이다.
실제로 퇴행성 신경 질환의 대표격인 치매 환자의 경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오래된 기억은 잘 유지하는 반면 새로운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고 증세가 심해질수록 고집스러워진다. 그러고 보면 뻣뻣녀에게 한국무용은 몸을 유연하게,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운동이다. 굴신이 자유로워져 몸이 유연해지면 마음도, 생각도 유연해진다. 뻣뻣녀에게 한국무용도 좋지만 오늘의 혈자리 양릉천은 어떨까?
양릉천, 삶을 유연하게
양릉천은 바로 여기!
양릉(陽陵)은 양(陽)의 구릉, 즉 몸 바깥으로 융기된 곳을 가리킨다. 천(泉)은 물이 구멍으로부터 솟아나는 것. 하여 양릉천은 무릎 바깥쪽 높고 크게 솟아오른 곳의 아래에 있다. 그 기운이 샘물처럼 밖으로 흘러넘친다 하여 양릉천이라 이름 하였다. 양릉천은 8회혈(八會穴)의 하나다. 8회는 몸을 구성하는 요소를 말하는데 기, 피, 힘줄, 맥, 뼈, 골수 같은 것이다. 8회혈은 이런 데 병이 나면 사용하는 중요한 혈이다. 양릉천은 근기(筋氣)가 모이는 곳으로 근회혈(筋會穴)이다. 근육 관련 병에 양릉천을 찌르면 웬만큼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때는 먼저 양릉천을 취한 뒤에 다른 혈을 취한다.
양릉천은 족소양담경의 합혈(合穴)로서 오행상 토(土)에 속한다. 또 담의 목(木) 기운과 소양의 화(火) 기운을 함께 갖고 있다. 따라서 양릉천을 보해주면 목화토의 기운을 동시에 넣어주는 효과가 있다. 목화토 기운은 간의 소설기능을 원활하게 해 줘 담즙의 저장과 배설에 도움이 되고, 그로 인해 비위의 운화기능도 증진된다. 평소 오행 중 금수(金水)가 실한 경우 몸이 마르고 찬 체질이 많은데 관절통이나 상체가 차서 나타나는 감기, 어깨결림, 소화불량 같은 질환에 걸리기 쉽다. 이런 분들은 양릉천을 보해주면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뻣뻣녀도 몸이 마르고 찬 체질이었다. 추위를 많이 타고, 몸을 움츠리고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소화가 잘 안되서 늘 가슴이 답답하다 그랬다. 한국무용으로 몸을 유연하게 단련하고, 양릉천으로 내부의 기운을 소통시키다 보면 뻣뻣녀에서 유연녀로 거듭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몸과 외부 사이의 ‘활발발’(活發發)한 소통이 가능하게 되고 리듬에 맞춰 살풀이춤을 신명나게 추지 않을까? 언니, 당장 해보실라우.
이영희(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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