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양이냐 세습이냐
토용(문탁네트워크)
세습되는 권력
전근대사회에서 권력은 세습되어 왔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치열한 다툼 속에 태자로 세우기 위한 모략과 살인은 다반사였다. 대부분은 장자 계승이 원칙이었으나 왕의 아들이면 누구나 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자식을 태자로 세우기 위한 후궁들의 암투는 때로 역사를 핏빛으로 물들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런 일은 춘추전국시대 흔하게 일어났다. 진(晉) 문공이 왕위에 올라 춘추오패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태자였던 자신의 형 신생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세습이 꼭 자식에게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상(商)나라의 경우는 형제 계승이었다. 탕왕 이후 형제로 계승되었는데, 왕이 죽으면 왕위는 동생에게로 간다. 동생이 죽으면 왕위를 물려준 형의 장남에게 계승되고, 그 다음 왕위는 다시 형제간에 계승된다. 그러니까 삼촌에게 왕위가 갔다가 다시 조카에게 가는 방식인데 이런 계승방식의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왕의 아들이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을 경우가 많아서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상나라 말기에는 형제계승의 전통은 사라지고 아들 계승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상나라 형제계승의 유산은 상나라 후손의 나라인 춘추시대 송나라에서 잠깐 나타났던 적이 있다. 『좌전』의 기록을 보면 송 선공이 동생 목공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목공이 죽으면서 왕위를 자신의 아들에게 주지 않고 형 선공의 아들에게 준 것이다. 형제계승의 또 다른 형태도 있다. 몽고는 형제들이 경쟁해서 부친을 계승하는 테니스트리의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재산과 지위를 계승하는 관습이었지만 형제간의 살육이 비일비재하여 정치적 혼란이 많았다.
장자계승이든 형제계승이든 어쨌든 모두 혈연계승이다. 그런데 이런 혈연계승이 아닌 다른 형태의 권력이양, 즉 선양의 기록이 『서경』에 보인다. 그 주인공은 요(堯)와 순(舜)인데 도덕정치를 펼친 이들은 정권교체도 남다른 형식으로 한 것이다.
선양이 있었다
요에서 순, 순에서 우(禹)로의 왕위계승은 혈연세습이 아니었다. 요는 말년에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후계자를 찾는다. 신하 사악(四岳)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사악은 덕이 없다며 사양을 한다. 요가 귀천을 가리지 말고 인물을 천거하라고 하자 신하들은 순을 추천한다. 그 이유는 순이 그의 부모에게 보인 효성 때문이었다. 온갖 악행으로 자신을 죽이려던 부모를 효성으로 감화시킨 순의 덕은 이미 요의 귀에까지 들렸다. 순의 신분은 미천했으나 요의 선택 기준은 오직 덕이었다. 요는 먼저 두 딸을 시집보내 순이 가정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시험해본다. 그리고 3년 동안 순에게 나랏일을 시켜본 후 제위를 물려준다. 순은 섭위(攝位)의 형태로 28년을 통치하고 요가 죽고 나서 정식으로 제위에 올라 50년을 더 다스렸다.
요에게는 아들 단주(丹朱)를 비롯해 쟁쟁한 신하들이 있었다. 그러나 단주가 말싸움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제위를 물려주지 않는다. 신하들은 어떤가. 어느 정도 덕이 있는 사악을 제외하고 공공(共工), 곤(鯀) 등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그들이 공손하지 못하고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등 사람들과 화합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가 후계자를 선택하는 기준은 덕과 화합할 줄 아는 능력이었다. 요는 순이 가진 덕과 능력이 천하를 이롭게 해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순을 선택했다. 그래서인지 <순전(舜典)>은 순의 통치로 천하가 안정되어 가는 내용으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덕이 있는 자에게 선양을 하는 모습은 순이 우에게로 제위를 물려주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
순의 나이 93세가 되자 순도 요와 마찬가지로 우에게 섭위를 명한다. 그러나 우는 자신은 덕이 없어 백성들이 따르지 않으니 고요(皐陶)에게 양보하겠다고 말한다. 고요가 훨씬 적합한 인물이고 백성의 신망을 많이 얻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서경』 「우서虞書」는 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한 편이 <고요모皐陶謨>이다. 모(謨)는 『서경』에 쓰이는 문체 중 하나로 군신이 서로 상의하는 아름다운 말(嘉言)과 선정(善政)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고요모>는 우와 고요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부분 고요가 우에게 군주가 밝혀야할 덕과 행동 및 올바른 정치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내용이다. 우는 굉장히 겸손한 태도로 고요의 말을 경청한다. 이런 것을 볼 때 고요의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고, 이 때문에 우가 고요에게 자리를 양보했던 것이다.
비록 고요가 형벌을 잘 밝혀 인륜의 가르침이 펼쳐질 수 있도록 도운 아름다운 공이 있으나 순은 우에게 물려주려는 마음에 변함이 없었다. 무엇보다 우는 치수사업을 성공시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킨 위대한 공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는 치수에 힘쓰느라 결혼 후 겨우 4일 집에 있었고 아들 계(啓)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 우가 8년이 걸린 치수기간 동안 세 번이나 자기 집 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맹자의 말도 있다. 순은 그 누구도 우가 가진 재능과 공로를 뛰어넘지 못한다고 여겼다. 우의 공적 때문에 자신이 덕교를 펼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공적과 함께 우는 자신의 공로를 뽐내지 않는 어짊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순이 우에게 섭위하게 된 이유이다. 우는 17년 동안 섭정했다. 『사기』에서는 순이 죽은 후 우가 순의 아들 상균을 피하여 양성으로 갔으나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상균을 떠나 우에게 조회하러 왔다고 한다. 순이 단주를 피한 것과 같은 스토리가 재현된 것이다. 이로써 선양은 아름다운 하나의 전통이 된다.
선양이 정말 있었을까?
그런데 요에서 순, 순에서 우로의 선양이 정말 자발적 권력이양이었을까? 혹시 순의 무력 정권 탈취는 아니었을까? 부자세습이 아닌 덕이 있는 자에게 정권을 넘긴다는 선양에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요의 시대가 아직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형태가 아니라 부족사회여서 가능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는 한 부족에서 다른 부족으로 돌아가면서 권력을 가졌을 수도 있다. 다만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실제 선양했다는 『서경』의 기록과 다른 것도 있다. 고대 역사서인 『고본죽서기년』에서는 순이 요 말년에 요를 구금하고 왕위를 찬탈했다고 한다.(『선양과 세습』, 사라 알란, 재인용) 요에서 순으로의 선양에 대해 사실은 순이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했다는 것이다. 요순의 시대는 부족사회였고 한 부족 내에서만 세습을 통해 정권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순에게 있어서 세력이 강한 다른 부족의 권력자들은 정치적으로 경쟁 관계이자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사흉(四凶)의 처벌 형태로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순은 같은 세력이었던 공공과 환도를 북쪽과 남쪽으로 분산해서 멀리 유배를 보낸다. 곤은 동쪽 우산에 가두고, 삼묘는 서쪽 변방으로 몰아낸다. 『서경』은 죄를 지은 사흉의 처벌 이후 천하가 복종했다고 기록한다.
선양의 형태로 권력이 이양되었지만 모두가 순순히 순에게 복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덕 있는 사람에게 선양한다는 아름다운 모습 속에 감추어진 피비린내 나는 정권투쟁이 있었을 것이다. 『한비자』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순은 요를 핍박하고 우는 순을 핍박하였으며.....남의 신하이면서 그 군주를 시해한 자인데도 천하가 그들을 칭찬하였다.”(「설의」)
선양은 민심의 결과다
선양에 대한 의구심은 전국시대 제자백가들 사이에서도 퍼져있었던 것 같다. 여러 전적들에서 선양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그 중 맹자와 그의 제자 만장의 대화를 보자.
만장 : 요가 천하를 순에게 주었다 하니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 : 아니다. 천자는 천하를 남에게 줄 수 없다.
만장 : 그렇다면 순이 천하를 소유한 것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
맹자 : 하늘이 주신 것이다.
맹자는 요에서 순으로의 선양을 하늘의 뜻이라고 말한다. 요가 순에게 28년 동안 나라를 맡겼을 때 순이 잘 다스려 백성들이 편안했고, 요가 죽은 뒤에 순이 요의 아들 단주가 제위에 오를 수 있도록 피해주었으나 제후와 백성들이 모두 순에게로 몰려왔다는 것이다. 하늘의 뜻은 곧 민심으로 알 수 있으므로 순이 제위에 오른 것은 하늘이 허락한 것이지 결코 순이 요의 아들을 핍박하여 찬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맹자는 선양을 천명과 연결한다. 하늘은 순이 보여준 덕과 통치능력을 통해서 천하를 순에게 주려는 뜻을 보였다. 민심이 순에게로 쏠린 것은 바로 하늘의 허락을 의미한다. 순에게 천하를 준 주체는 요가 아니라 하늘이고, 그 권력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것은 민심이다. 맹자는 ‘하늘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을 통해서 보고, 우리 백성이 듣는 것을 통해서 듣는다.’(『서경』 <태서泰誓>)를 인용하여 하늘의 뜻이 백성을 통해서 드러남을 분명히 했다.
선양이 깨지고 세습이 시작되다
이런 아름다운 선양의 전통은 계속 이어졌을까? 그럴 리가. 그랬다면 선양이 이렇게 특별한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선양의 전통은 우에게서 깨진다. 처음에는 우도 요와 순처럼 아들이 아닌 익(益)에게 양위한다. 그런데 『서경』에는 우에서 익으로의 선양에 관한 기록이 없고, 『사기』에 그 내용이 보인다. 익은 고요의 아들로 고요는 순과 백성들에게 매우 존경받은 인물이다. 익도 우가 치수사업을 할 때 산림과 어업을 관장하는 관리로서 우를 도와 나라에 큰 공이 있었다. <대우모大禹謨>에서는 익이 순과 우와 함께 정사를 논한다. 익의 위치가 보통의 신하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익의 덕성도 순과 우처럼 제위를 물려받기에 충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정권은 아들 계에게로 갔을까? 선양은 왜 실패했을까?
계가 제위에 오른 것에 당연히 반대하는 세력이 있을 터. 그에 관한 기록은 <감서(甘誓)>에 있다. <감서>에서는 유호씨의 반란에 계가 하늘의 벌을 대행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에서는 유호씨가 복종하지 않아 계가 멸망시켰다고 한다. 모두 유호씨가 계에게 복종을 하지 않아 정벌했다고 하지만 그 이유가 계승을 반대한 것인지 단순한 반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만약 계승을 반대한 것이라면 그 이유는 아마도 요→순, 순→우 라는 선양의 전통을 어겼다는 것에 있었을 것이다.
맹자는 제위가 계에게로 간 이유가 익이 우를 도와 정사를 펼친 기간이 짧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순은 28년, 우는 17년 섭정을 했으나 익은 그 기간이 7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오랫동안 은택을 베풀지 못했다는 것이다. 순이 이루어놓은 정치적 공적, 우의 치수사업에 비해 익이 보여준 업적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서경』에 계가 백성을 이롭게 한 일이 기록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기』에서는 계가 현명하여 백성들이 계에게 복종했다고 한다.
맹자는 계로의 계승을 선양과 세습의 측면에서 따지지 않는다. 하늘이 현자에게 주고자 하면 현자에게 주는 것이고, 아들에게 주고자 하면 아들에게 주는 것이라며 앞서 선양에서 민심에 따라 권력이 이양되는 논리를 그대로 가져온다. 백성들이 ‘우리 임금의 아들’이라고 칭송하면서 계에게로 간 것은 하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민심이다. 선양이든 세습이든 결정은 하늘, 즉 민심에 있다는 것이다.
선양론이 현자에 대한 존숭으로
맹자는 선양의 조건으로 ‘덕’과 ‘천자의 천거’를 제시한다. 맹자의 논리에 따르면 공자가 순과 우에 버금가는 덕을 가졌지만 천하를 소유하지 못한 이유는 천자의 천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천자가 재상으로 등용해서 공자가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풀 기회가 있었다면 선양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세습의 시대에 아무리 뛰어난 현자라도 선양의 방식으로 왕이 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유학자들은 선양을 어떻게 재해석하여 자신들의 정치담론에 가져왔을까?
세습의 시대에 천자의 아들이 반드시 현자일 필요는 없다. 걸, 주 같은 폭군만 아니라면 무능하더라도 지위를 계승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군주 옆에 뛰어난 신하가 있으면 된다. 맹자는 그 대표적인 예로 상나라 탕왕과 그의 재상 이윤의 예를 든다. 이윤은 탕왕이 죽은 후 아들 태갑이 정치를 제대로 못하자 3년 동안 대신 정치를 맡아서 했고, 그를 가르쳐서 제대로 된 왕으로 만든 후 물러났다. 맹자는 이윤의 사례를 통해 선양에 내포된 의미와 가치를 군주와 현자가 함께 통치하는 이상적인 모델 속에 담아내었다.
유학자들은 선양의 전통을 현자에 대한 존숭으로 확장시켰다. 덕 있는 자에게 통치권을 이양한다는 선양은 내면의 높은 덕을 가진 현자의 존숭으로 이어진다. 현자의 존숭은 선양이라는 권력계승 형식에서 찾아낸 유학자들의 자기 정체성이다. 상나라의 어진 재상이었다는 이윤과 부열, 주나라의 주공, 소공 등의 예를 통해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지향해야 할 길을 찾았고, 그 이론적 근거가 선양담론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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