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직업적 글쓰기’를 접겠다고 한 고종석은 내가 좋아하는 에세이스트이자 소설가다. 소설을 많이 쓴 편은 아니지만, 그의 단편들(『제망매』와 『엘리아의 제야』로 묶여져 있다)은 나름의 맛이 있는 좋은 작품들이었다(고 기억한다). 얼마 전 그의 ‘마지막 소설’이라는 광고문구를 단 『해피 패밀리』 속 한민형의 다음과 같은 말은 글쓰기와 그 주체에 대해 잠시 상념에 잠기게 만들었다.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 글쓰기는 그 주체를 미화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심지어 자학적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학적 글의 저자는 그 자학으로서 자신을 미화한다. 자기혐오를 제 윤리성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다. 글을 보고 반한 사람은 많지만, 만나본 뒤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거의 예외없이 실망하게 된다. …… 그래서 글과 사람을, 책과 사람을 분리하는 것이 내겐 삶을 순탄히 이어나가는 데 중요한 방어기제다. 어떤 책을 읽으며 그 책 저자의 삶을 거기 포개놓는 순간, 책 속의 내 세계는 무너지고 만다.
여기에 동의하든 안 하든 덧붙이고 싶은 말들이 마구 머릿속에서 엉키다가 문득 벤야민이 떠올랐다. 예전에 ‘글쓰기’에 대해 한 벤야민의 말이, 내가 글을 책으로 만드는 직업이 아니라 글을 써서 먹고살면 어떨까 고민했던 때에 수첩에 적어놓고 다녔던, 그 말이 떠올랐다.
후안 그리스, <책>
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더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고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걷는다는 것도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구의 실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실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그것이 목적에 맞추어 정확하게 이루어지든 아니면 마음 내키는 대로 부정확하게 이루어져 소기의
목적에서 벗어나든─ 길을 가는 사람의 평소 훈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 나쁜 작가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는 이러한 아이디어 속에서 마치 훈련을 받지 못한 조악한 주자가 스윙이 큰 암팡지지 않은 육신의 동작 속에서 허우적대듯 자기
자신의 정력을 탕진해 버린다. - 26쪽 「글을 잘 쓴다는 것」
벤야민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대학 1학년 때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철학사전에서 찾아본 기억이 있으니 그 언저리 즈음에 벤야민 이름도 알게 되었지 싶다. 하지만 이 책을 언제 가지게 되었는지는 비교적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선물로 받은 이 책의 첫장에 선물한 이가 내게 써준 짧은 메모가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메모에 날짜는 남겨져 있지 않지만, 선물해 준 이와 내가 친하게 만났던 시기가 1년 남짓이었기 때문에 그 어름에 이 책도 내게 건네진 게 분명하다.
보통 일상을 공유하는 장에 함께 있지 않은 사람과 오래 만나는 일을 나는 잘 못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친구나 중학교 때 친구처럼 만난 지 오래된 이들과 긴 시간 관계를 맺고 만나고 심지어 ‘절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좀 경이롭게 느껴졌다. 일상을 공유하지 않으면 생각이 달라지고 할 말이 적어진다. 그러다 보면 예전에 함께 했던 이야기들이 주요 화제로 떠오르는데, 그게 반복되는 걸 잘 참지 못하는 것 같다.
아무튼, “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더 말하지 않는다”, 이 말을 적으면서 했던 생각 혹은 다짐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게다. 포즈를 취한 것을, 혹은 남의 생각을, 내가 생각한 것이라고 착각하며 혹은 스스로를 속이며 적지 않기.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
- 356쪽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들」
지금 내게는 ‘벤야민’ 하면 떠오르는 문장은 위 인용문이다. 이 문장은 사실 고병권이 쓴 글 속의 인용문으로만 보았던 것인데, 이번에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잡으면서 직접 책 속에서 문장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철학테제’로 알려졌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관련된 노트들 속의 저 문장을 고병권은 폭주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브레이크를 걸 총파업을 이야기하는 글 속에서 인용했었다.
지금 내게 저 글은 역사나 사회의 브레이크로 읽히기보다 당장 내 삶의 ‘비상 브레이크’, 내 삶의 어떤 혁명에 대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렇다. 미친 듯이 돌아가는 사회도 사회지만, 지금 내게 시급한 것은 나도 제어할 수 없이 가속도가 붙어 달리고 있는 자의식, 증오, 욕심, 나태, 원망, 허기 등에 브레이크를 잡는 것이다. 왜 이런 폭주기관차에 나를 태웠냐고 부모를 친구를 사회를 원망하는 것만으로는, 혹은 필경 충돌하고 말 그 기관차에서 특등석에 탄 듯 자신만 혜택(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이데올로기적이 것이든)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자위하는 것만으로는, 삶의 허기를 채울 수 없을 것이다.
멸치가 싫다
그것은 작고 비리고 시시하게 반짝인다
시를 쓰면서
멸치가 더 싫어졌다
안 먹겠다
절대 안 먹겠다
고집을 꺾으려고
어머니는 도시락 가득 고추장멸치볶음을 싸주셨다
그것은 밥과 몇개의 유순한 계란말이 사이에 칸으로 막혀 있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항상 흩어져 있다
시인의 순결한 양식
그 흰 쌀밥에서 나는 숭고한 몸짓으로 붉은 멸치를 하나하나 골라내곤 했었다
시민의 순결한 양식
그 붉은 쌀밥에서 나는 결연한 젓가락질로 하얘진 멸치를 골라내곤 했다
대학에 입학하자 나는 거룩하고 순수한 음식에 대해
밥상머리에서 몇달간 떠들기 시작했다
문학과 정치, 영혼과 노동, 해방에 대하여, 뛰어넘을 수 없는 반찬 칸과 같은 생물들에 대하여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 결국 한 말씀 하셨습니다
"멸치도 안 먹는 년이 무슨 노동해방이냐"
그 말이 듣기 싫어 나는 멸치를 먹었다
멸치가 싫다, 기분상으로, 구조적으로
그것은 작고 비리고 문득, 반짝이지만 결코 폼 잡을 수 없는 것
왜 멸치는 숭고한 맛이 아닌가
왜 멸치볶음은 죽어서도 살아 있는가
이론상으로는, 가닿을 수 없다는 반찬 칸을 뛰어넘어 언제나 내 밥알을 물들이는가
왜 흔들리면서 뒤섞이는가
총체적으로 폼을 잡을 수 없다는 것
그 머나먼 폼
왜 이토록 숭고한 생선인가, 숭고한 젓가락질의 미학을 넘어서 숭고한가
멸치여, 그대여, 아예 도시락뚜껑을 넘어 흩어져준다면,
밥알과 함께 쏟아져만 준다면
그 신비의 알리바이로 나는 영원토록 굶을 수 있었겠네
두 눈 속에 갇힌 사시의 맑은 눈빛으로
다른 쪽의 눈동자를 그립게 흘겨보는 고독한 천사처럼
- 「멸치의 아이러니」 全文
예전처럼 많은 시집을 사보지 않게 된 지금도 시집이 나올 때마다 일단 장바구니에 넣고 보는 몇몇 시인이 있다. 황동규, 김광규, 함민복, 장석남, 진은영……. 이 시는 시집에 실리기 전에 다른 데서 먼저 봤었는데, 어디였는지 기억이 가물하다. 소설가 김연수가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칼럼에서였던 듯하다. 『훔쳐가는 노래』는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사서는 맨 끝에 실린 ‘작가의 말’을 먼저 읽고, 뒤표지에 가득 실린 심보선 시인이 쓴 글을 그 다음 읽고, 목차를 본 뒤에, 어쩐지 막상 시는 읽지 않고 오랫동안 가방 안에만 넣고 다녔다. 가방 안에서 이 시집을 빼들었을 때도 또 어쩐지 시는 읽지 않고 진은영 시집에 반드시 있는 각 부의 시작 부분에 그녀가 뽑아 넣어 놓은 에피그램들만 읽고, 다시 또 ‘작가의 말’을 읽고 도로 넣곤 했다. 왜 벤야민의 ‘비상 브레이크’를 보다 진은영의 ‘멸치’가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다(라고 쓰고 보니, 아니다, 사실은 알 것 같다). 이 시를 시집에서 찾아 펼쳐 놓고 다시 읽어보니, 글쓰기와 주체, 글을 쓴다는 것, 폭주하는 삶에 그냥 브레이크도 아닌 비상 브레이크를 잡는다는 것이 모두 이 시 안에 점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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