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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만나러 갑니다

[돼지 만나러 갑니다] 흡혈귀가 나타났다!

by 북드라망 2024. 1. 9.

흡혈귀가 나타났다!
 

글_경덕(문탁네트워크)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올해 문탁네트워크에서 주역, 불교, 돌봄을 키워드로 공부한다.

 


낮은 자세

 

 "내일 아침돌봄 때 잔디 배 안쪽 상처를 가볍게 소독해주실 수 있을까요? 상태가 어떤지 사진으로 찍어 공유 부탁드립니다."


전날 올라온 무모 님의 지시 사항을 읽으며 아침 돌봄을 갔다. '상처를 소독하려면 잔디가 잘 누워줘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새벽이생추어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날 따라 잔디는 활기가 넘쳤고 돌봄이 끝날 때까지 드러누울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봄 기운이 넘실대는 5월이었다. 잔디는 여기 저기 올라오는 풀을 뜯거나 부드러운 흙을 코로 탐색하며 봄내음을 맡느라 분주했다.
 
잔디가 눕지 않으니, 내가 누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잔디가 움직이지 않는 틈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잔디가 멈추는 순간 가까이 다가가 몸을 납짝 엎드려 배에 소독약을 뿌렸다. 잔디는 자신이 내키지 않을 때 자기 몸을 누가 만지거나 몸에 차가운 액체를 뿌리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럴 때 잔디는 몸을 부르르 떨고 꾸웅 꾸웅 소리를 내며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특히 식사 중에 어딜 만지거나 약을 바르려고 하면 코로 음식을 마구 헤집고 그릇을 퍽퍽 친다. 그러다 밥그릇이 엎어져 음식을 전부 쏟을 때도 있다. (근데 그런 반응은 너무 당연하잖아? 밥 먹을 때 누구라도 건드리면 짜증나잖아?) 어쨌든 전달 받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나는 약을 뿌렸고 잔디는 싫은 소리를 내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나는 잔디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기회를 엿보다가 여러 번 소독약을 뿌렸다. 
 
소독을 충분히 해준 후에는 사진을 찍어야 했다. 처음에는 휴대폰만 배 밑으로 낮게 깔고 사진을 찍었지만, 찍을 때마다 초점이 맞지 않거나 엉뚱한 부위가 찍혔다. 할 수 없이 나는 완전히 누운 자세로 얼굴을 땅에 바짝 붙여 프레임과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그리고 잔디의 피부 상태가 잘 보이는 사진을 골라 무사히 일지에 업로드했다.
 

2023년 5월 11일 돌봄 일지
- 잔디 배에 소독약 뿌려주었어요. 누울 생각이 없어보여서 제가 누워서 사진을 찍어야 했어요! 피부가 군데 군데 빨갛게 올라왔어요.

댓)
무모 : 잔디 배 사진 보니 경덕님 자세가 상상되었어요. 수고 많으셨어요!
경덕 : 오늘 돌봄, 가장 낮은 자세로 임했습니다!

 


치유제, 진흙과 황토
새벽이와 잔디도 아플 때가 있다. 피부에 상처가 나고 염증이 생기면 연고를 바르거나 약을 복용한다. 다리가 접질러지거나 발에 이상이 생기면 다리를 절룩인다. 상태가 호전되지 않으면 주사를 맞을 때도 있다. 그리고 컨디션이 안 좋으면 집 안에만 머무르기도 한다.
 
새벽이와 잔디는 특히 피부가 취약하다. 돼지의 피부는 많은 것들로부터 위협을 받는다. 자외선으로부터, 온갖 벌레들로부터, 부러진 나뭇가지나 땅 속에 묻혀 있는 날카로운 것들로부터. 돼지의 피부가 원래부터 취약한 건 아니었다. 돼지의 연약한 피부는 축산업에 의해 강제 개변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새벽이의 연분홍빛 피부는 축산업에 의해 강제 개변된 결과로, 그가 인간에 의해 얻은 장애 중 하나다. (...) 축산업은 이들의 털을 벗겨 먹기 쉽게 혹은 동물들을 통제하기 쉽게 몸에서 털을 없애고 색을 빼는 등 강제적 변형을 가했다. (...) 본래 돼지는 갈색과 검은색의 짙은 빛 털이 수북하게 자라난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46쪽
 
"새벽이는 인간의 동물산업으로부터 '장애화'된 몸으로 태어나,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 축산업은 새벽이의 피부가 스스로 멜라닌을 생성할 수 없도록 피부를 품종개변했다." 같은 책, 48쪽 

 


활동가들은 새벽이와 잔디의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치료와 예방에 힘쓰고 있다. 피부 질환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흙을 바르는 것이다. 돼지는 땀샘이 거의 없어서 더운 날씨에는 체온 조절이 어렵다. 그런데 진흙은 햇빛을 차단하여 돼지의 체온을 낮춰준다. 또 자외선이나 벌레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주고 피부 질환을 예방하며 예민한 피부를 진정시키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햇볕이 뜨겁고 벌레가 들끓는 여름에는 새벽이와 잔디의 마당에 진흙 목욕탕을 만들어준다. 이전에는 '길 가다 재수 없이 밟는 축축한 흙탕물', '머드 축제에서나 볼 수 있는 이벤트 재료' 정도로만 진흙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진흙은 돼지의 피부를 케어하는 천연 치유제, 자외선 차단제, 쿨러의 역할로 먼저 떠오른다. 황토빛 진흙이 새벽이와 잔디의 피부에 듬뿍 묻어 있는 모습을 보면 훨씬 야생적이고 굳세게 느껴지기도 한다.
 


 
근데 진흙 목욕탕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새벽이와 잔디의 몸이 전부 잠길 만큼 목욕탕이 크지 않아 등이나 머리와 가까운 부위는 진흙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땐 활동가가 직접 황토를 발라주어야 한다. 황토를 바르기 전에 새벽이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잔디는 예민하게 반응하더라도 덩치가 작아서 크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새벽이는 친밀한 사람에게만 곁을 내어 주고, 오래된 활동가도 새벽이가 무심코 하는 행동에 다칠 수 있어(날카로운 엄니에 긁히거나, 돌진하는 새벽이와 충돌하는 경우)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귀 뒷부분은 자외선에 취약하고 피부암이 생기기 쉬운 곳이라 썬크림을 발라주어야 하는데, 얼굴과 가까울수록 새벽이가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h 활동가는 일지에 이렇게 남겼다.
 

- 새벽이가 누워있을 때 새벽이 공간에 들어가서 황토 뿌려줬는데 싫어하는 게 느껴졌어요. 머리 근처로 갈수록 싫어하는 표현을 했는데 황토를 뿌려야 건강에 더 좋으니까... 미안했지만 천천히 뿌렸어요. 그러다가 새벽이가 일어나려고 하자 저는 후다닥 도망갔는데, 다 도망치고 뒤를 돌아보니 새벽이는 다 일어나지도 않고 앉아서 저를 보고 있었어요.. ㅋㅋ 스스로 좀 웃기기도 하고 철망 없이 새벽에게 그정도로 가까이 간 건 처음이어서 신기하기도 했어요!

 


y 활동가는 화끈한 방법을 쓰기도 한다.
 

- 새벽이 황토를 발라줄 때 역시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머리쪽을 많이 발라주고 싶어서 이번에도 새벽이 집 지붕 위에 올라가서 머리 위에 황토물을 부었어요…새벽이에겐 미안하지만.. 이사갈 생추어리를 설계할 때 황토를 발라주는 등 새벽이 가까이에서 해야 하는 돌봄을 위한 공간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흡혈귀가 나타났다!
또 여름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새벽이와 잔디의 피부를 노리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파리와 등에이다. 등에 중에서도 동물의 몸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종류의 등에가 있다. 왕소등에와 북방등에는 큰턱과 작은턱이 칼날모양을 이루어 숙주동물의 피부와 혈관을 자를 수 있는 무서운 흡혈 곤충이다. 등에가 머물다 간 피부에는 상처가 남고, 상처에는 금세 파리들이 달라붙는다. 파리는 상처에 세균을 옮기고, 상처에 알을 낳을 수도 있다. 활동가들이 피부에 붙어 있는 파리와 등에를 보는 즉시 쫓아내도 그 녀석들은 금방 다시 새벽이와 잔디의 피부에 들러붙는다. 등에와 파리를 쫓기 위해 새벽이와 잔디의 피부에 벌레 기피제를 뿌리고, 상처가 난 피부에는 연고를 바른다. 하지만 이 때에도 새벽이에게 바로 다가갈 수 없는 경우에는 새벽이 눈치를 살펴야 한다. 그렇게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민첩하고 대담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 새벽이는 파리가 배에 많이 붙어 있었는데, 용기가 안 나서 들어가지 못했어요. (j 활동가)
 
- 둘 모두 약을 발랐어요! 새벽이는 누워있는 상태에서 왼쪽 배 전체적으로 발랐고 엉덩이는 바르니까 다리 움찔하길래 혹시 일어날까봐 제일 큰 상처에만 좀 발랐어요. 잔디 배는 새벽이에 비해 상태가 좋아보였고 군데군데 좀 빨간데만 발랐어요. 근데 턱 쪽도 좀 빨개서 약 발랐어요. (d 활동가)
 
- 잔디가 따온 풀을 먹는 동안에 후다닥 발라줬어요. 풀을 먹을 때 약을 발라서 예민해진 탓에 저에게 몸통 박치기를 했는데 바지에 잔디 코 자국이 찍혀서 웃겼어요. (b 활동가)
 
- 배에 소독약을 뿌리긴 했어요. 굉장히 싫어했지만 고루고루 뿌려줬습니다. 정중히 사과했어요. (h 활동가)

 


새벽이의 피부를 케어하는 돌봄은 난이도가 꽤 높다. 새벽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손으로 직접 새벽이를 만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새벽이가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스스로 내킬 때와 내키지 않을 때가 있다. 새벽이도 마음이 여유로울 때 누군가의 손길을 잘 수용하기 때문에 활동가들은 매번 새벽이 눈치를 살피며 새벽이의 몸과 마음이 느긋해지길 기다린다. 
 


 
 
벌레와, 함께 살 수 있을까?
 
어느 날 이런 공지가 올라왔다. 

- 잔디 안방, 새벽 안방에 파리끈끈이를 설치했어요. 지난 돌봄모임에서도 나눴지만, 파리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벌레물린 상처에 파리가 꼬이면 심각한 염증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몇 년 동안 소극적인 대처로 기피제를 뿌려보았지만 큰 효과는 없었어요. 새벽이 잔디 건강을 지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자 합니다. 곧 전기파리채도 시도해볼 예정이에요. 벌레와의 공존에 대한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니 불편한 마음이나 더 좋은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 등 자유롭게 나누어요.


활동가들은 새벽이와 잔디를 돌본다. 그리고 새벽이와 잔디를 위협하는 벌레들을 퇴치한다. '벌레와의 공존에 대한 고민'은 인간중심주의, 종차별주의에 대한 고민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불편한 마음'이나 '더 좋은 방법'에 대한 나눔은 어떤 사유와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우리는 '보호' 너머의 '돌봄'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고민을 나누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인간, 비인간 동료들과 계속 함께하는 것 또한 그 자체로, '돌봄'의 일환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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