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리뷰 ⑨
우주를 믿는다면 두렵지 않다!
정건화(규문, 『청년, 니체를 만나다』 저자)
이 책을 가로지르는 키워드 중 하나는 ‘두려움’이다. 책의 저자이자 나의 친구인 민호는 “내 안의 형체 없는 두려움을 어떻게든 이해해볼 수 있을까 하는 바람”(264쪽)을 붙잡고 루크레티우스에 관한 글을 써내려갔다고 한다.
두려움이라. 민호는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두려움이란 무엇일까? 두려움이라고 말하고 보니,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두려움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두려움의 층위는 참으로 다양하다. 안락한 보금자리를 보장받지 못할까봐 두렵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할까 두렵고, 사고나 질병이나 노화로 몸이 이전과 같지 않을까봐 두렵고, 소중한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날까봐 두렵다. 종종 우리는 자극과 쾌락과 행복을 추구할 때조차 그것들이 사라지고 훼손된 상태에 대한 혐오와 공포에 지배되고 있는 것만 같다. 두려운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삶이 버겁게 느껴진다. 높은 물가와 복잡한 사회적 관계의 압력 속에서, 다치기 쉬운 몸과 마음을 지닌 채, 생존과 자존감을 확보하려 모두가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다!
그런데 이런 두려움에는 실체가 있을까? 우리는 두려워할 만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걸까? 얼마 전에 읽은 한 전문 부랑자의 여행기는 삶이란 버거운 것이라는 나의 생각을 깨줬다. 저자는 카우치 서핑, 덤스터 다이빙, 히치하이킹 등을 통해 6년간 60여 개국을 여행하며 ‘숨만 쉬는 데에도 돈이 필요하다’는 법칙에 온 몸으로 저항했다. 저자는 강박적으로 삶을 통제하려 하는 대신에 낯선 이들과의 마주침에, 도움의 손길에, 우연한 사건에 스스로를 내맡겼다. 그리고 그러한 마주침으로부터 생존수단이 아니라 질문하고 사유하고 더 멀리 나아갈 계기들을 발견했다. 그럴수록 “삶은 더욱 재미있어졌고, 점점 더 쉽게 느껴졌다”(이하루, 『사회적응 거부 선언』, 파도문고, 23쪽)고 저자는 말한다. 어쩌면 삶이 본래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 있는 가치나 태도가 삶을 두렵고 버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민호가 들려주는 루크레티우스 이야기도 비슷한 깨우침을 준다. 고대원자론의 관점에서 세계의 본질은 마주침과 비껴남이라고 한다. 이건 삶이 매번 우리의 기대와 예측으로부터 빠져나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표상에 집착하는 방식으로 생의 본질을 외면하려 한다는 데 있다. 우리 자신의 기대와 표상에 부합하도록 삶을 통제하려 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불안과 공포는 강화되고 재생산된다. 영원할 거라는 환상과 영원해야 한다는 집착이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민호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놀라움은 우리의 집착과 환상을 고발하는 데 있지 않다. 마주침과 비껴남이 행복의 걸림돌이나 슬픔의 원인이기는커녕, 우리의 삶에 풍요를 가져다주는 무한한 원천이라는 통찰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자연의 흐름은 요동과 ‘더불어’ 계속되고 있다. 요동은 오히려 그 리듬이 단조롭지 않고 더 풍성하도록 만들고 있다. (……) 우리가 우주를 믿는다면, 우리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방향 전환, 알 수 없는 이끌림, 마음결의 진동들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다른 코스모스에서 보내오는 신호 혹은 노크일 수 있다. 클리나멘은 이탈인 동시에 돌입이다. 그것은 다른 질서를 열어내는 열쇠구멍이지 무질서로 떨어지는 함정이 아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용기를 준다.”(성민호,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북드라망, 141쪽)
원자들의 끊임없는 마주침과 비껴남. 성민호-루크레티우스는 반복해서 이것이 혼돈과 무질서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경로 이탈이 카오스로 여겨지는 것은 하나의 경로를 절대시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경로, 질서, 조화는 그것들로부터 빠져나가는 흐름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어떤 직선도 요동을 포함”(성민호,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북드라망, 146쪽) 한다. 마주침과 비껴남은 질서를 해체하는 힘일 뿐 아니라 질서를 생산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이 말은 우리가 ‘나’로 환원되지 않는 무수한 마주침들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또 우리가 그러한 마주침들에 열려 있는 한 언제 어디서든 다른 관계를 형성하고 다른 질서를 구축하고 다른 이야기를 구성하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민호가 지금 내 뒤쪽 책상에서 강의 준비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도 마주침과 비껴남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문득 평생 하지 않던 공부가 하고 싶어져 규문에 왔고, 민호 또한 우연한 이끌림에 따라 대학과 성공의 노선으로부터 이탈해 이렇게 공부를 하고 있다. 마주침과 비껴남이 있었기에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여기에 이를 수 있었다. 또 미세한 방향 전환과 알 수 없는 이끌림이 있었기에 기존의 생각에 갇히지 않고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질문할 수 있게 된 것일 테다. 나로 환원되지 않는 힘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기에 ‘지금’은 더욱 값지다. 우주를 믿는다면, 지금의 요동을 또 다른 돌입으로 삼을 수 있다면,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더라도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는 우주를 믿는다는 것이 자신의 두려움에 정직하게 직면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은 두려움을 모른척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자질구레한 마음의 동요와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부터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에 이르기까지, 민호는 우직하게 자기 두려움을 직시하며 나아간다. 그렇게 꼬부랑길을 헤쳐가며 조금씩 더 솔직하게 스스로 집착과 환상에 마주할 수 있게 되어간다. 단숨에 도약하려는 조급함 없이 자기 자리를 신중하게 직시하는 것. 이것이 우주를 믿는 자의 정직하고 담백한 태도라는 것을 배웠다. 민호의 글쓰기가 정직하게 나아간 길들을 따라가며 나 또한 나의 두려움과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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