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리뷰 ⑦
한 줌의 간절함에서 시작되는 자연학
안현숙(남산강학원)
과학과 행복?
남산강학원 청년 윤하가 규문에서 공부하시는 민호쌤의 신간 소식을 전하며 리뷰를 써보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원고를 받기 전 책 이름을 분명 몇 번이고 또박또박 말해주었건만 이상하게도 입에 잘 붙지 않았다. 루키우스? 루크라테스..? 몇 번이고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루크레티우스. 나에겐 영 낯선 이름이었다.
루크레티우스는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 사람이다. 본업은? 자연철학자, 그러니까 자연의 본성과 이치를 탐구하는 사람이었다. 자연 탐구에 있어서 그의 주 무기는 원자론이었다. 그는 자연에 대한 탐구가 인간을 탐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좀 더 쉽게 말해보자. 우리는 자연 탐구를 흔히 ‘과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탐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곧 행복해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니, 이를 ‘행복’이란 단어로 치환해보자. 루크레티우스는 즉 ‘과학을 하면 행복해질 수 있어요~’라고 말했던 셈이다. 과학과 행복? 우리 시대에는 이 두 단어가 그닥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지금의 과학은 대개 객관적이고 건조한 팩트 정도로 여겨지지 않나. 우리에게는 이러한 과학이, 루크레티우스에게는 삶을 지복하게 하는 도구였다니!
‘과학’과 ‘자연학’은 다르다
왜 나는 ‘과학과 행복’ 이 두 단어가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걸까? 평소에 과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기에? 난 과학이라고 하면 장비로 가득한 연구실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실험을 하는 딱딱한 과학자가 떠오른다. 관찰과 실험을 통해 입증 가능한 결과를 내는 사람들. 우리 일상과는 꽤 동떨어진 전문가의 영역이라고 느껴진다. 그리고 난 평소에 ‘과학실험 결과가 그랬대~‘ 하면 의심 없이 믿고는 한다.
허나 좀 이상한건, 이렇게 과학적 사실을 맹신하고 있긴 하나 이것이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난 고딩 때 화학시간에 원자론을 배웠었다. 그리고 아직도 원소 주기율표를 외울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앎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삶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과학을 믿기는 하지만 막상 삶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허울뿐인 믿음이다.
그런데 고대 사람들은 이것과는 아주 다르게 과학을 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고대 과학에서 삶의 변화와 행복을 전제하지 않은 탐구가 없었고, 탐구 활동을 수반하지 않은 채 올바르게 살기란 불가능했다. 어떤 학파나 마찬가지였다. 하늘, 땅, 도시, 동물, 몸, 영혼이 무엇으로 되어있고 어떻게 운동하는가에 대한 앎은 다이렉트로 삶의 방향 설정에 연결되었다. 즉 과학은 윤리와 한 몸이었다! ... 탐구는 탐구하는 자를 바꿔 놓는다. 그렇게 윤리적 힘을 지닌 앎은 푸지올로지(자연학 혹은 생리학)라고 불렸다. (26쪽)
와! 고대 과학은 애초에 출발부터가 삶을 변화시키고 행복해지기 위함이었다. 심지어 과학 탐구 없이는 올바르게 살기 불가능할 정도라고까지 말한다. 고대 과학은 저 멀리의 전문가 영역으로 취급되거나 힘없는 어떤 앎이 아니라, 일상에 깊게 침투하여 기어이 자신을 바꿔내기에 이르고 마는 아주 적극적인 힘을 가지는 것이었다.
나는 남산강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자연학이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다. 과학과 자연학이 무슨 차이인지 궁금했다. 자연학은 쉽게 말해 ‘과학+윤리’가 섞여 있는 단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자연학’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데까지 이르러야만 하고,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변형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어야만 한다. 내가 알던 건조한 과학에 비해 고대의 자연학은 너무도 풍요로워 보인다!
자연학, 자기 운동의 주인 되기
생기 없는 ‘과학’이 생기발랄한 ‘자연학’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루크레티우스는 뭐라고 말했을까? 나는 일단 루크레티우스가 말하는 두려움이 눈에 들어왔다.
루크레티우스의 진단은 두려움이었다. 혼탁하고 겁에질린 영혼이 우리를 중독과 폭력, 체념과 미신의 굴레로 몰아가고 있음을 직시한 자는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 멈추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우리를 떨게 하는 모든 것들, 즉 신들, 천재지변, 지옥, 죽음은 본디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된 것인가? 요컨대, 두려움에 대한 루크레티우스의 처방은 '사물의 본성'에 대한 탐구다. (48쪽)
세상은 모르는 것들투성이고, 모르는 것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그러니 산다는 것은 곧 두려움이기도 하다. 솔직히 사는 게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지 않나. 고대인들에게 크게 두려운 것 중 하나는 자연이었을 것이다. 제멋대로 비가오고, 번개가 치고, 깜깜해지고. 왜 그런지 도무지 알 수는 없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자연과 우주기원을 신을 통해 해석해내는 것이었다. 비, 바람, 천둥, 번개 등 자연의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대 자연철학자들은 더 이상 신에게서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맡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두 눈으로 자연을 직접 관찰하고, 자연현상 자체에서 모든 운동과 변화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즉, 자연철학자들은 자신의 삶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해보겠노라 결단한 것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 중에서도 이 당시 자연철학자들의 태도와 닮아 있는 부분이 있어서 참 재밌었다.
무게가 원자 자체에 내제된 특질로 설정된 이상, 원자는 자기 운동의 중심을 다른 어딘가가 아니라 자신 안에 지니게 된다. 그렇기에 원자는 부여받은 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허공과 관계하고 다른 원자들과 관계한다.(125쪽)
원자는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다. 루크레티우스는 각각의 원자는 자체의 무게가 있다고 보았다. 그 무게로 인해 원자는 허공을 움직일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원자는 자기 운동의 주인이다! 이 당시 자연철학자들이 선취하려던 모습과 닮아 있어서 신기하기도 했다.
자연철학자들은 눈앞에 펼쳐진 변화무쌍한 자연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관찰하며 세상을 점차 파악해갔다. 자기 운동의 주인인 원자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과 관계 맺어 나갔다. 그런만큼 두려움은 사라져갔다. 세상과 삶의 변화무쌍함을 미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갈 수 있는 길, 그래서 더 많은 순간을 기쁨으로 채울 수 있는 길은 자연학과 더불어 열린다.(28쪽)
한 줌의 간절함
우리 시대 과학이 무미건조한 것은 더 이상 그것이 자기 운동의 주인이 아니어서 일까? 이 책에서 ‘한 줌의 간절함’(263쪽)이라는 문구가 기억난다. 나는 자연학에서도, 루크레티우스에게서도, 민호쌤에게서도 어떤 공통된 힘을 느껴졌는데 그게 바로 이 ‘한 줌의 간절함’인 것 같다. 세상을 이해하고 싶다는 간절함, 두려움에 맞서보겠다는 절실함,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구원해보겠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이 마음들은 자연스레 치열한 사유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어코 자기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 책은 민호쌤이 루크레티우스의 자연학(원자론)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치열하게 본인의 삶을 사유해 나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어머니, 연애, 우정 등등. 민호쌤의 이야기들은 두려움과 막막함에서 시작되지만 치열한 사유를 통과하고 나면 두려움은 더 이상 예전의 두려움이 아니게 된다. 민호쌤의 세상에 삶에 대한 치열한 사유 과정이 궁금하시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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