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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루크레티우스와 만나다』 리뷰 ② 지복至福을 향해서

by 북드라망 2023. 7. 5.

『청년, 루크레티우스와 만나다』 리뷰 ②

지복至福을 향해서

이동은(문탁네트워크)

 


민호님과는 다른 곳이지만 인문학 공동체에서 지내는 나로서는 민호님이 루크레티우스와 운명적으로 만나서 글을 쓰게 된 것이 아니라는 얘기가 너무(!) 이해됐다. 뭐랄까, 인문학 공동체에서 내 의지로 되는 일은 몇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루크레티우스에 대해서 글을 쓰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읽으면서 민호님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둘 다 자연에 대해 알아가고자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민호님이 논리를 전개해나가듯 차분히 식을 전개해나가는 공학을 공부했기 때문일까?

 

사실 나는 서양철학 쪽으로 잘 아는 편이 아니다. 특히나 고대 그리스 철학은 더더욱! 세 글자가 넘어가는 이름을 잘 기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려워하는데 ~코스, ~우스, ~테스, ~데스…로 끝나는 이름들이 쏟아지면 머리가 띵하다. 그 이름들이 익숙해질 정도로 오래 바라본 적도 없고,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그 정도로 유심히 알고 싶어 한 적도 없다. 그래도 친절한 민호님의 글 덕분에 고대 그리스 철학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었다.

 

원자는 오늘날 입증되고 관찰되어 기술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연구되는 대상이지만 고대인들에게 보이지 않은 ‘원자’는 치열한 질문과 논쟁으로 도출된 사유의 산물이었다. 그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을 깊이 고뇌했던 이유는 그들에게 자연을 탐구하는 것이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존재하는 이치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나의 존재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라고나 해야 할까. 하지만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은 기존의 ‘존재’를 밝히기보다 ‘생성’에 초점을 맞춘 철학으로, 확언으로 고정된 세상의 진리가 아니라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한 사유였다. 본문에서는 이를 ‘변화하는 세상을 모순 없이 설명해내고 감각을 온전히 긍정해내기 위해서’라고 표현한다. 

 

‘감각을 긍정한다’라니? 고대 그리스에서는 세상을 구성하는 여러 성질을 우리가 느끼는 몇가지 감각으로 구분했다. 가장 대표되는 성질이 물, 불, 흙, 공기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감각들은 여러 성질 중에서 몇 대표되는 것일 뿐, 세계의 원리를 설명해 낼 수는 없다. 따라서 루크레티우스가 긍정하려는 감각은 ‘성질들이 가지는 어떤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원리를 사유하는 것이 세계를, 그리고 곧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감각’이라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감정과도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떤 마음 상태에 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책에서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감각’했다고 해야 할까? 내가 읽어낸 두려움은 루크레티우스 시대의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민호님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기도 하고, 내가 느꼈던 두려움이기도 했다. 두려움은 때로 불안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나 비난, 그리고 외면으로 드러났다. 민호님은 보이지 않는 것을 열렬히 탐구했던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으로 매번 형태와 깊이가 달라 미지의 대상인 두려움을 이겨내고 싶어했던 것은 아닐까?

 

내게 자유를 실현시키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연학 공부다. 가슴 벅차오르는 아름다운 말씀이나 마음을 녹이는 위로들, 기분전환을 가져오는 이런저런 이벤트들보다 이 딱딱한 텍스트들이 더 힘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나 자신과 이 우주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나의 관념은 어떤 환상들에 기대어 있었는지를 하나하나 해부해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루크레티우스를 만나고 생각이 피어난 봄을 지나면 민호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앞부분의 과학 이야기가 참 멋지긴 했지만 그래도 민호님의 이야기만큼 감동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ㅎㅎ) 루크레티우스가 세상의 근원을 파헤쳤던 것이 세상을 이해를 위한 것이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원자에 대한 탐구는 거대한 세계의 흐름을 바라보는 방법이자 나를 바라보는 방법이기도 했다. 루크레티우스가 ‘사물의 본성’에 대해 고민했던 일이 잘 살아가는, 아름답기 위한,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과 연결되어 있던 것이었다면, 민호님이 환경과 자립, 가족과 연애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민호님의 이야기를 보면서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이 사람들의 지복을 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을 다 읽은 나도 이제는 그 지복을 함께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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