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야 할 진리는 특별히 없어요
질문자1 : 동·서양의 진리탐구의 차이와 스님의 공부법이 궁금합니다.
서양 고전을 읽고 있는 장자 스쿨 학인입니다. 고전들이 던지는 질문은 “진리를 어떻게 탐구할 것인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동양과 서양이 진리 탐구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정말 다르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특히 서양 같은 경우는 진리를 탐구할 때 반드시 엄청난 고통과 비극이 수반되면서 드라마틱한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식의 양상을 취합니다. 하지만 동양, 특히 불교 경전들을 보면 평화롭고 마음의 고요함 속에서 깨우치는 모습이 보이는데요. 이런 차이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게 궁금하고요. 두 번째로는 정화 스님 같은 경우도 서양의 과학과 동양의 불교를 융합하셔서 말씀을 많이 주시는데 학문적 경계선의 구분 없이 동서양을 횡단하여 접속하는 스님의 공부법이 궁금합니다.
정화스님 : 우선 진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불교 쪽에서는 찾아야 할 진리가 특별히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있는 모든 학인 분들이 시간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1905년에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누구에게나 항상 똑같은 시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은 다 자기 몸무게, 중력, 다른 것들이 합쳐져서 내부적으로 다 다른 시간을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똑같은 시간을 찾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근원적으로 불가능해요. 근데 그 이전에는 이와 같은 시간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찾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어요.
보르헤스 같은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요. 모두가 『장자』라는 책을 다 읽는데, 읽는 게 아니고 장자를 다 베껴 쓰는 거라고 그대로. 그런데 장자가 쓴 『장자』하고, 내가 베껴 쓴 『장자』하고 다른 책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책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 있고, 거기에 접근하는 게 아니고, 책은 접속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색깔로 거기에 있는 거예요. 거기. 근데 접속하지 않으면 그냥 뭔가가 하나 있는 거고, 사람이 거기에 접속하는 순간은 접속하는 사람의 생각과 만나서 거기서 자기 나름대로 『장자』라고 하는 책이 쓰이지. 근데 우리는 이제 “장자는 이랬을 것이다.”라고 그걸 찾으려고 하면 접속하는 사람마다 장자가 다 다르니까. 이번에 어떤 분이 책을 여러 권 냈더군요. 장자에 대해서 신문 서평을 보니까, 그 분도 하시는 말이 고형렬씨 인가? 시인이 쓰셨는데, 지금 장자를 쓰라고 하면 또 다른 『장자』가 나올 거라고. 그러니까 내가 『장자』를 읽는 게 아니고 『장자』하고 나하고 읽기라는 행위를 통해서 새로운 『장자』가 써진 거예요. 불교라던가 노장이라던가 하는 사람들은 섭리를 그렇게 보는 거예요. 자기가 접속하면서 그 순간에 진리가 생기는 거예요.
근데 저쪽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것 말고, 순수하게, ‘어떤 주관이나 객관이 개입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노력을 하는 것이죠. 아까 말한 대로, 접속하는 순간 변해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변하지 않는 진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계속 고통스러워요. 찾으려고 하면 사라져. 그래서 예전에는 이제, 그 책에서는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세상에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요. 서양식으로 말하면 사물은 시간이 멈춰 있는 상태나 흐르는 상태나 불변의 요소로서 나한테 다가오는 어떤 것들이 사물이라고 파악을 한 거예요. 그런데 “세상에는 그와 같은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되어가는 사건만 있다. 우리라고 하는 것이 사람이라고 하는 사건만 있다. 내 머리에서 생각이 일어나면 또 내가 다른 사건을 일으키고 있네?” 이런 것만 있는 것이고 더군다나 이것이 홀로 사건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고 외부의 접속과 어떤 접속의 라인이 만들어지느냐에 따라서 내 안에서도 계속 사건이 달라져요. 근데 A라는 사건으로 존재할 때의 나, B라는 사건으로 존재할 때의 나 말고 다른 나를 찾는다? 그럼 나는 B로 존재하는데 A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이런 순간마다 전부 다 자기가 되어가는 사건으로 존재하질 못하고 있는 거예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찾는 거예요. 계속 자기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하고, 생각하는 자기는 이때는 사물로서의 자기, 실제 되어가는 자기하고 계속 괴리가 생깁니다. 이런 것을 에리히 프롬은 자기로부터의 소외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소외가 일어나는 사람들은 전부 뭘 하냐면 우상 숭배를 하는 거예요. “이런 나가 되고 싶다!”라고 하는 순간 이 나는 우상 숭배라는 거예요. 집단이 되면 그것은 신이 돼요. 그리고 신과 나 사이가 멀어지는 만큼, 자기한테 멀어지는 이 간격이 바로 소외, 소외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전부 다 우상숭배로 가고 있어요.
저쪽에서는 컵이면 컵일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어가지고 우리가 접속을 하지 못하지만 찾으려면 찾을 수 있다고 본거고, 아까 말한 대로 불교나 노장은 그런 건 없다. 우리가 컵이라고 보는 순간 컵이 탄생하는 것. 그러니까 이것이 컵으로 존재해야 되는데 다른 것으로 존재하면 두렵잖아요. 컵으로 존재해야 되는데. 내가 이런 나로 존재하길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게 근본적으로 불가능해요. 그냥 모든 것들은 되어가는 것인데, 그럼 혼자 되가는 게 아니고 온갖 인연이 겹쳐야 되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필연과 우연이라고 있어요. 예를 들면, O2하고 수소가 만나서 물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이전 관계, 수소와 산소라고 하는 필연적 요소가 있어요. 근데 이 두 개가 우연히 만나면 물이 돼요. 물은 더 작은 단위들의 우연적 결합입니다. 이 사이는 되어가는 과정에서 끼어드는 것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예측하는 대로 미래가 우리에게 다가올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방금 말한 대로 예측을 하고 무엇을 하는데, 이 사이에는 일정한 길이 있고, 되어가는 데도 뭔가가 있는데, 우리가 예측한대로 안 되는 것은 우리 예측 밖의 그것을 그렇게 될 수 있는 힘이 외부에서 작용한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걸 신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래서 신의 섭리가 우리, 개인의 역사에 개입한다고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연적인 요소 자체를 계산할 수 없고, 두 번째는 컵이라는 존재 자체가 계속 되어가는 존재, 변형되었기 때문에 어떤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요소, 우리의 사고 면에서 그런 것들을 전부다 사물로 파악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사물로 파악하는 순간 이미 자기가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에요. 자기가 자기로 못 사니까 괴로운 것이죠. 근데 그때 자기는 전부다 자기 생각이 만들어놓은 자기에요. 실제 자기가 아니라. 언어에 의해서 요구되어지는 자기죠. 언어에 존재하는 자기는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어요.
불교는 원하는 것이 하나 있으면 번뇌가 하나 생긴다고 해요. 원하는 것이 하나가 있으면. 나 자신한테도 그냥 재밌게 할 뿐이지 그것이 어떤 식으로 되어지기를 원한다고 하면 실패할 확률이 엄청나게 높아요. 이 때 이것을 그냥 합리화를 시키는 거예요. 그럴 때 이제 옛날에는 ‘외부의 어떤 힘들이 개입해서 그렇게 했다. 우리는 나약한 존재다.’ 이렇게 합리화를 시키는 거예요.
그러고 두 번째는 이제 그런 것들이 우리한테 굉장히 깊숙하게 쌓여 있어요.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은 굉장히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도록 우리한테 심어놓은 게 굉장히 많아요. 그것이 이제 정치권력, 경제권력, 종교권력, 요즘 같으면 언론권력들이 우리한테 매일 메시지를 전합니다. 무슨 메시지입니까? “우리 체제가 강고해질 수 있는 상태로 생각하세요.” 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예요. “당신 생각이 틀렸습니다. 우리가 지식도 있고 뭣도 있으니까 우리가 만드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 것이 근본적으로 서양에서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 진화론과 그 다음에 시공간에 대해서, 시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적으로 불변의 요소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공간 또한 그런 것도 아니고, 사람도 사람이라는 외부적 사물로서의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진화론이 이야기하는 말이에요. 거기다 구멍을 막 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 내고 보니까 이제 사물들을 그 전엔 그런 줄을 몰랐어도,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사람들에 의해서 서양에서 늦게 구멍 내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불교나 장자에서는 그런 것을 과학적으로 접하지 않고도 그렇게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또 사유의 태도를 보니까 아닌 것 같다고. 요즘 말하는 명상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경험을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 안에 강고하게 갖춰진 실체론적 사고를 전환하기 위해서는, 제 말보다 과학자들의 말씀이 훨씬 권위가 있어요. 왜 권위가 있느냐면, 과학자들도 거짓말 엄청 많이 해요. 거짓말 많이 하는데,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다고 자기들 스스로가 말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나한테 비판하고, 내가 했던 것을 네가 해볼 수 있어서 드러나지 않으면 거짓말이 금방금방 탄로 나요. 그럼 바뀌어요. 그래서 1905년에 밝혀진, 예를 들면 ‘시간이란 절대적으로 누구한테나 똑같은, 동시적인 사건이라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건에 따라서 동시도, 조건에 따라서 미시도 계속 함께 있다.’ 라는 말들은 지금 1905년부터 백 몇 십 년 지났잖아요. 단 한 번도 그 말에 어긋난 시간이 발견된 적이 없어요. 이처럼 진화론이 나온 지가 150년, 160년 정도 됐는데, 160년 동안 모든 생물학적 증거 중에서 진화론에 어긋날 만한 이론은 단 한 건도 안 나왔고, 매년 진화론을 훨씬 더 강고하게 증명할 수 있는 말들이 나올 뿐만 아니라 DNA가 발견되고 나서부터는 더더욱 그런 것이 있죠. 그래서 DNA 하나의 정보만 보면 필연적인 요소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무엇하고 손을 잡느냐. 아까 우리가 같은 장자를 읽는데 접속하는 사람에 따라 장자가 달라진다고 그랬잖아요. DNA 유전정보도 하나만 보면 필연 같아요. 그런데 이 하나가 어떤 것과 접속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떼어놓고 보면 필연적인 요소지만, 접속의 우연성을 개입할 때는 이 필연 속에서 우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을 많이 갖추고 있어야 돼요. 그래서 인간의 사고는 거의 필연을 우연으로 해석할 수 있는 빈 공간을 엄청 많이 만들어 놨어요. 그래서 실제 제 마음 거울의 첫 번째에 비치는 여러분의 이미지는 추상화처럼 보여요. 그 추상화를 통해서 요즘 뭐 선 다스리는 게 있죠. 그게 보여요. 그러면 그 빈 공간을 제가 경험했던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자꾸자꾸 칠하기 시작해요. 이렇게 해서 이것이 이렇게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그, 절대 변하지 않을 것조차도 무엇과 만나면 무엇이 되도록 여유 공간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사물로서의 자기를 찾는 사람은 괴로움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죠. 그 다음에 되어가는 것으로서 자기를 사는 사람은 되어가는 순간순간을 살 수밖에 없어요. 무엇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되어가는 거예요.
질문자2 : 요즘 명상, 참선, 위빠사나 수행 같은 걸 이야기하는데요. 그게 구체적으로 다른 게 있어서 이름이 다른 건지 아니면 비슷한데 이름을 다르게 붙인 건지 알고 싶습니다.
정화스님 : 그냥 약간의 차이정도 밖에 없어요. 호흡관찰을 하느냐 무슨 다른 관찰을 하느냐 하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뇌가 사건 사물을 보는 방법은 명상에 이름만큼 특별한 차이가 생길 수 없어요. 그래서 그냥 인연 된 데 가서 인연 따라 하면 되요. 위빠나사하고 가나하고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편하고 가까운 곳에 가서 사기를 치는지 안치는지를. 사기를 안친다고 확실해 지면 거기서 하면 되어요. 별 차이 없어요.
글_장자스쿨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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