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의 도리로 차서있는 말을!
重山 艮 ䷳
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
등에서 멈추면 그 몸을 얻지 못하며, 뜰을 걷더라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 허물이 없으리라.
初六, 艮其趾, 无咎, 利永貞.
초육효, 발꿈치에서 멈추는 것이라 허물이 없으니, 오래도록 올바름을 유지하는 것이 이롭다.
六二, 艮其腓, 不拯其隨, 其心不快.
육이효, 장딴지에서 멈추는 것이니 구삼을 구제하지 못하고 따르게 되어 마음이 불쾌하다.
九三, 艮其限, 列其夤, 厲, 薰心.
구삼효, 한계에 멈추는 것이라 등뼈를 벌려 놓음이니 위태로움이 마음을 태운다.
六四, 艮其身, 无咎.
육사효, 그 자신에서 멈추는 것이니, 허물이 없다.
六五, 艮其輔, 言有序, 悔亡.
육오효, 광대뼈에서 그침이라, 말에는 순서가 있으니, 후회가 없어진다.
上九, 敦艮, 吉.
상구효, 독실하게 멈추는 것이니 길하리라.
사람간의 관계에서 말처럼 중요한 게 있을까.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한다. 이왕이면 천냥 빚을 갚는 말을 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원수지지 않는 말만 해도 다행이다. 온라인에서 서로 얼굴도 모르는 채 쉽게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요즘 같은 디지털시대엔 더욱 그렇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쏟아내는 말들. 대부분 공허하게 흩어지고 마는 말들이지만 말이 말을 만들고, 말이 씨가 되고,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입을 봉하고 살아갈 처지가 아닌 한, 말을 통한 소통으로 일상은 이루어진다. 누구와 어떤 말을 어떻게 얼마큼 하고 사는가가 그 사람의 일생의 모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내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순간 딴 생각을 하다가 맥락을 놓치거나 단어를 잘못 알아들을 때가 꽤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잘 듣지 못할 때 그 상황에 맞는 말이 나올 리 없다. 그런데 별 한눈팔지 않고 들었는데도 그 때 그 자리에 딱 적합한 말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때론 장황하게 말을 하고 때론 필요한 말인데도 안 한다. 맥락의 핵심에서 비켜나 있는 것이다. 아마도 함께 공부하고 생활하는 장이 아니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을 일이다. 그러나 일상을 말과 행위로 소통해야 하는 장에서 맥락의 핵심 속에서 듣고 말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 멈춤의 도리로써 말(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간(艮)괘의 육오효가 남다르게 다가온 이유이다.
육오효의 풀이를 보자. “광대뼈에서 그침이라, 말에는 순서가 있으니, 후회가 없어진다.(六五, 艮其輔, 言有序, 悔亡.)” 멈추되 광대뼈에서 멈추라, 그러면 말에 순서가 있고 조리가 있으리라! 여기서 의미하는 광대뼈는 무엇이고, 멈춘다는 건 또 무엇인가. 무엇을 멈추라는 것인가. 육오효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멈춤에 대해 알아야 한다.
괘사의 첫 마디인 ‘간기배(艮其背)’는 등에서 멈추라!이다. 등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다. 등지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정이천은 이것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멈추면 욕심 때문에 마음이 요동하지 않아서, 멈추면 곧 편안하다”(정이천, 『주역』, 1030쪽)고 했다. 보아도 보지 못한 듯 외물과 접촉해 흔들리지 않으니(行其庭 不見其人) 사사로운 내가 없다(不獲其身)는 뜻이다.
간괘는 몸으로써 멈춤의 도리를 말한다. 몸과 마음은 떼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하는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과 만난다. 외부 사물과의 접촉은 마음과 생각을 일으킨다. 대부분 외물에 대한 좋고 싫음의 느낌이나 감정, 판단 같은 것들이다. 그 중심엔 ‘나’라는 자아의식이 있다. 내 마음, 내 생각, 내 말, 내 감정… 등. 이런 ‘나’는 정이천의 표현에 따르면 ‘욕심이 싹트는 사사로운 나’이다. 간괘의 멈춤은 이렇게 몸을 가진 존재 조건에서 비롯된 욕심, 요동치는 마음과 사사로움을 멈추라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멈춰야 하는가. “멈춤의 도는 오직 때에 달려 있으니, 나아가고 멈추며 움직이고 고요할 때에 적합하게 하지 않으면 허망한 거짓이다.”(위의 책, 1031쪽) 오직 때에 달려있다는 멈춤의 도. 말이든 행위든 제 때 나아가고 제 때 멈추는 합당한 때가 있다는 말이다. 아니면 ‘허망한 거짓(妄)’, 즉 망령된 말과 행위가 된다. 또 간괘의 상(象)은 두 개의 산이 겹쳐진 모습이다. 이것을 보고 군자는 생각이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思不出其位)고 했다. 간괘는 밑에 있는 음(陰)들이 자라나다가 위에 있는 양(陽)에게 저지당해 멈추게 되는 상이다. 보아도 잡된 사념에 빠지지 않고 외물에 이끌리지 않는 그치고(止) 그친(止) 지극한 멈춤의 상태다. 이런 멈춤의 상태일 때 단단하고 듬직한 산처럼 지극히 ‘안정되고 중후하며 견고하고 진실’하게 된다. 멈추되 합당한 때와 합당한 자리에서 멈추라는 것.
이제 이 멈춤의 도리를 말에 대해 적용해보자. 육오효의 멈춤의 자리는 광대뼈다. 광대뼈는 몸의 윗부분에 있으니 입을 보조해 말이 저절로 나오는 곳을 의미한다. 광대뼈에서 멈춘다는 의미는 합당한 때와 합당한 자리에서 말하고 멈춘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경거망동하지 않고 순서를 따라 조리 있게’, 차서있는 말(言有序)을 한다는 것!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제멋대로 끼어드는 파편같은 생각들이 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어떤 생각의 흐름에 휩쓸려 간다. 생각이라기보다는 순간적인 망상에 가까운 것들이다. 이런 저런 과거나 미래, 불안, 걱정, 좋고 싫음의 분별 등 말 그대로 잡념들이다. 이것은 내 의지에 반해서 일어나는 생리적인 몸의 현상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몸이 다르듯 나타나는 양상이나 정도도 다 다르다. 내게는 쓸데없는 불안이나 걱정의 성향이 잠재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정말 실체없는 미세한 불안이나 걱정 따위들이다. 그런 것들이 순간순간 두서없는 잡념이 되어 습관처럼 나타나는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일 뿐이다. 알아차리고 멈추어 ‘지금 여기 이 순간’의 현장에 집중하는 것! 맥락에서 떠나지 않는, 차서있는 말을 하기 위한 첫 번째 멈춤의 도리다.
그러면 이야기를 잘 들었는데도(들었다고 여기는데도^^;) 때론 맥락의 핵심에서 비켜간 말이 나오는 건 왜일까? 이야기의 핵심을 아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동떨어질 수 없다. 상대방이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고민하고 생각하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 마음이 얼마만큼 대상을 향해 열려 있는가, 집중되어 있는가에 따라 맥락에 가 닿을 수 있는 정도는 다르다. 마음은 에너지다. 마음 쓰는 곳에 에너지가 몰린다. 남의 말을 들으며 사념으로 빠지는 것도, 불안이든 걱정이든 무엇이든 자기문제를 떠올리는 것도 대상보다는 자신에게 더 에너지가 쏠려있다는 말이다. 그 중심에 남에 대한 관심보다 ‘자기’, 즉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 자리잡고 있는 거다. 그렇게 자기 안에 머물러 있을 때 타인의 입장이나 맥락의 핵심이 잘 보일 리 없다. 자기입장이 더 크게 앞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말의 도리가 강조된 육오효는 군주의 자리다.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정확히 듣고 제대로 전후사정 맥락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 자리다. 그런데 양의 자리에 음이 왔다. 음유한 자질로 사심에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중(中)의 자리에서 중도에서 멈출 수 있는 덕을 가지고 있다. 그 중도의 덕은 ‘자기’ 중심의 사심을 비워낸 것! 이 비워냄은 멈추어 자신의 사심의 정체를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매 순간 올라오는 자기중심적인 마음과 생각들을 알아차리고 멈추는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 비워낸 자리에 지금 이 순간의 인연조건과 관계 속에 있는 타자들이 들어온다. 맥락의 흐름 속에 함께 있게 된다. 그럴 때 조리있고 차서있는 말로 후회함이 없게 된다(悔亡). 멈춤의 도리가 알려준 소통의 기술이자 지혜이다.
글_안혜숙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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