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 사용 설명서
아마 주역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는 无咎(무구)일 것이다. 无咎(무구)란 ‘허물이 없다’ 는 뜻이다. 처음에 주역을 접했을 때 ‘허물이 없다고? 파충류들이 벗는 그 허물? 당연히 없는 거 아닌가….?’ 싶었다. 허물에 ‘자신의 실수로 생긴 부끄러운 일’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몰랐었다.^^ 아무튼! 无咎(무구)는 모든 괘에서 거의 한 번은 무조건 나온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허물을 달고 산다는 말이다.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허물이다. 처음에는 하도 많이 나오니 자연스럽게 이 말에 관심이 갔다. 하지만 외워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나중에는 无咎(무구)는 ‘그냥 허물이 없는 건가 보다’ 하고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런데 최근에 허물을 생각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지금 나는 복지관에 있는 도서관에서 근무 중이다. 도서관에 배정 받은 지는 한 6개월 정도 됐다. 하지만 일을 워낙 대충하는 바람에 아직도 모르는 것도 많고 실수하는 것도 많다. 그래서 매주 사서 선생님한테 한소리 듣는다. 특히 월요일에는 사서 선생님이 나오지 않는 날이어서 나 혼자서 도서관 업무를 본다. 이 날은 사서 선생님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 평소보다 더 풀어진다. 사람이 몇 명 왔는지 체크도 안 하고(최근에 코로나 때문에 체크하고 있다.) 1층 반납도서함 확인도 안 하고, 의자 정리도 안 하고! 그래서 다음날에 사서 선생님이 출근하시면 내가 빼먹고 간 일들을 체크 하시며 혼내신다. 그럴 때마다 참 부끄럽다. 하지만 그것도 그 순간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부끄러웠던 감정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싹! 사라진다. 감이당에서 혼나면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갈라지는 것 같은 느낌인데 복지관에서 혼나는 건 부모님의 귀찮은 잔소리 같은 느낌이다.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안 들어도 그만인 소리로 느껴진다. 내가 일을 대충해도 나에게 큰 피해가 오질 않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아주 사소한 실수였다.
하지만 작은 허물도 쌓이면 나중에는 큰 허물이 되는 법! 최근에 사서 선생님의 깊은 화가 느껴졌다. 참다 참다 진짜 마지막으로 참은 듯한 말투로 ‘도대체 내가 한 말을 뭘로 듣고 있는 거야? 언제까지 이렇게 대충할래?’라고 하셨다. 다음에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정말 큰일 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때야 위기감이 생겼고 나를 한번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와야 허물이 생긴 이유를 돌아보려고 한다니…. 전형적인 소인의 모습이다.^^;) 나는 도서관에, 아니 복지관에 애정이 없었다. 나의 에너지를 복지관에 쓰는 건 너무 아까웠고 차라리 이 에너지를 아껴서 퇴근 후 내가 하는 주역이나, 책 읽기에 쓰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복지관에 관심도 없고 마음을 내고 있지 않은 나의 모습이 보였다.
주역에서는 자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그런 그릇이 아닌데 높은 자리에 있거나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허물이 생기고 흉하다고 한다. 나는 복지관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만큼은 공부하는 청년이기 전에 사회복무요원이다. 요원으로서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잘 정리하고, 대출, 반납도 꼼꼼하게 체크하고, 청소도 열심히 하는 것이 나의 임무다. 하지만 나는 그저 시간만 때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도서관 근무에 더 힘을 쓰며 감이당 공부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전에는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책을 읽든 대출을 해가든 나랑 뭔 상관이야? 싶었다. 하지만 내가 도서관에 진심을 내고 관리하면 어떨까? 이용자들이 도서관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고 그로 인해서 더 자주 오고! 이용자들의 입소문을 타 더 많은 사람이 온다면? 그건 사실 엄청 기쁜 일일 것이다. (전에는 오직 나의 편함만 추구했기에^^:) 이렇게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하자 전에는 안 보였던 일들이 조금씩이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사서 선생님이 시키지 않아도 일주일에 한 번씩 들어오는 잡지를 정리하고, 반납 들어온 책들이 많으면 미리 정리하고, 책상을 먼저 닦는다. 시키는 일을 할 때도 기쁜 마음으로 움직여진다. 확실히 부끄러운 일이 생기니 처음에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이걸 계기로 나를 돌아보고 혼난 이유를 찾아보고 개선하려고 노력하자, 뭔가 새사람(?)이 되는 기분이다.^^ 전보다 도서관에 있는 시간이 조금 즐거워졌다.
나에게 복지관이라는 공간은 재미도 없고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공익근무를 하는 시간이 정말 아깝다고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이 공간이 나의 변화로 인해 조금씩 생기가 돌고 있다. 하기 싫었던 일 속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고 이용자가 왔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짜증, 부정적)을 돌이켜보기도 하고, 사서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야 관심이 간다.^^; 이렇게 보니 도서관에서 느꼈던 감정이나 행동, 관계, 대하는 태도 등 수많은 것들을 무심코 지나치고 있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감이당 말고 다른 현장에서 공부한다는 걸 생각도 못했고, 그것이 뭔지 느낌이 잘 안 왔다. 하지만 이번에 사서 선생님의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통해 내 잘못된 태도를 보게 됐다. 그리고 감이당에서 제대로 공부를 하고 있다면 도서관에서 일하는 내 모습도 변하는 게 당연하다. 불성실한 태도를 통해서 내가 있는 현장을 공부터로 만든다는 게 무엇인지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나는 큰 허물이 생기면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하지만 작은 허물은 그냥 코웃음을 치며 넘긴다. 하지만 이런 작은 허물이라고 무시하다 보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그러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나중에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니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놓치지 않고 잘 성찰하면 자신의 삶의 전환점으로 사용할 수 있다. 허물이 생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 허물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문제다! 허물을 잘만 사용하면 마치 뱀이 허물을 벗으며 성장하듯 우리도 허물을 벗으며 성장할 수 있다.^^
글_김지형(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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