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여름은 어떻게 오는가
인재가 만발, 운빨 최고의 한나라
지금까지 한의 최전성기를 이루어낸 무제를 만나 보았다. 그의 통치 기간은 무려 54년으로 그 기간 동안 대부분의 사상, 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제국의 꽃을 피웠다. 반고 논찬에 의하면 “한은 역대의 모든 적폐를 물려받았지만 고조는 혼란을 안정시켜 정도를 확립하였고, 문제와 경제는 양민에 노력하였으나 고대 예악이나 문물제도를 갖추려는 노력은 많이 부족하였다.” (「무제기」,『한서』1권, 명문당, 385쪽) 문경제 시대가 태평성대였으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족함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족함을 무제가 등장해서 메꾼 것이다. 창업에 맞는 군주 유방의 출현, 그리고 지친 백성을 기르는 군주 문경제의 출현 그리고 예악과 문물제도를 갖출 수 있는 군주 무제의 출현까지 적절한 시기에 딱 맞는 왕이 등장했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는 운빨 최고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제는 앞서 보았듯 해를 품은 예지몽에 걸맞게 한나라의 잠재력을 사방팔방 확산하는 능력을 가진 자였고 때 마침 한나라에 여름이 도래했다. 시절과 능력이 딱 맞아떨어진 형국인 것. 무제는 온 천하를 비추는 태양 같은 군주로 요순시대처럼 온 천하가 스스로 군주에게 복종해 오는 태평성대의 시대가 펼쳐지길 원했다! 해품군 무제의 비전은 광대했고 그 의지 또한 강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황제도 혼자 할 수는 없는 법. 현명한 군주 무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지금 짐은 종묘를 지키고 받들면서 일찍 일어나 추구하고 저녁에도 생각해보지만 깊은 물을 어떻게 건너가야 할지 알지 못하겠노라. 아름답고도 위대하도다! 어떻게 하면 선제의 공업과 미덕을 널리 알리고 위로는 요순과 같고 그 다음 삼왕과 같아지겠는가! 짐이 불민하여 먼 곳까지 덕을 펴지도 못하니, 이는 그대들이 보는 대로니 고금 왕도정치의 요체를 잘 아는 현량한 인재들은 짐의 책문을 받아 살펴 모두를 문서로 답하되 죽간에 지어 올린다면 짐이 친히 열람할 것이다.”
- 「무제기」,『한서』1권, 명문당, 297쪽
한무제는 요순시대 재현을 위해 인재를 적극 등용한다. 앞서 고조 때는 인재들이 군주를 찾아왔다. 그들은 패자가 될 군주를 스스로 정하고 동시에 자신의 재능을 펼칠 군주를 선택했다.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다. 무제 시기에는 천하는 안정되었고 주도권은 무제에게 있었다. 무제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인재를 과감하게 등용한다. 한무제의 인재 리스트를 공개하니 인재풀을 감상하시라.
“공손홍과 복식, 예관은 모두 큰 기러기와 같은 뜻을 가지고서도 연작에게 시달림을 당해 멀리 밀려나 양이나 돼지를 키웠는데 만약 때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찌 그런 지위를 누릴 수 있었겠는가. 이때는 한의 건국 60여 년에 천하는 태평하고 부고는 충실했지만 사이(四夷)는 아직 복속하지 않았고 제도에는 여러 결함이 있었다. 무제는 무제의 인재를 등용하며 서둘러 간절히 구하였으니 처음으로 안거를 보내 매승을 영입하고 주보언을 알현하고서는 늦게 만난 것을 탄식했었다. 그러나 많은 선비들이 황제를 흠모하여 모여드니 이인(異人)이 한꺼번에 출현하였다. 양을 치던 복식을, 상인인 상홍양을, 노비인 위청을, 투항한 포로 김일제, 흙일 하던 부열, 소를 기르던 영척과 같은 명철함이 있었다.
한의 인재영입은 성하였으니 고아한 유생인 공손홍, 동중서, 예관이 있고,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잘 천거한 한안국과 정당시가 있었으며, 법령을 잘 정비한 조우와 장탕이 있고, 문장에는 사마천과 사마상여, 골계에는 동방삭과 매고가 있고, 응대에 뛰어난 엄조와 주매신, 그리고 역수에는 당도와 하낙굉이 유명하였고, 협율(협율, 음악)에는 이연년, 운주에는 상홍양, 사신에는 장건과 소무, 장수로는 위청, 곽거병, 유조를 잘 따른 곽광과 김일제가 있으니 그 밖의 인재는 이루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로써 큰 공적을 쌓고 창조하였으며 제도 장비와 문물을 후세에 전하였으니 후세에도 이러한 성대가 없었다.”
- 「엄주오구주보서엄종왕가전(상)」,『한서』5권, 명문당, 327쪽
신분제 시대에 돼지를 키우던 자가 재상이 되다니 파격적인 인재 발탁이다. 우리는 보통 무제의 과감한 인재 정책에 감탄하지만 인재를 등용하고 싶어도 그만한 인재가 없었다면 등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재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받쳐준 것도 한나라의 행운인 것이다.
한무제, 신하와 제후들을 장악하다
한무제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인재를 등용했지만 실상은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위한 조치였다. 기존에 있는 공신들은 왕권을 간섭할 정도로 실권이 상당했다. 소하, 진평, 주발 등 승상들을 떠올려보라. 그들은 황제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는가. 이제 공신들도 나이가 들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그런 상황에서 무제는 현량과를 통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재들을 등용할 수 있었다.
“매번 조회의 논의에서 공손홍은 그 단서만을 열어 주군이 스스로 채택하게 할 뿐 면전에서 반대하거나 조정에서 논쟁하지 않았다. 이에 무제는 공손홍의 행실이 신중하고 변론에 여유가 있으며 법조문과 관리 업무에 익숙하고 유학으로 문장을 잘 꾸민다고 생각하며 공손홍을 좋아하였기에 1년 만에 좌내리까지 승진하였다.”
「공손홍복식예관전」,『한서』4권, 명문당, 554쪽
돼지를 키우던 공손홍이 재상이 된 것은 무제의 평등한 인재 등용 정책 덕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재상권 약화를 의미했다. 한 마디로 무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 것. 신하들은 당연히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는데 혈안이 되었고 업적 위주의 관료제가 시행되기 시작했다.
무제의 중앙집권을 향한 욕망은 집요했다. 신하들을 자기 손에 넣게 되자 이제 지방 제후 제거 작업에 나선다. 무제의 욕망을 눈치 챈 인물이 있었으니 주보언이다. 무제는 주보언을 만나고 늦게 만난 것을 탄식할 정도로 주보언을 신임했다. 그 신뢰가 어찌나 깊었던지 1년에 4번을 진급하면서 승승장구했다. 주보언의 가장 큰 업적은 지방 제후 장악을 위해 제안한 추은령(推恩令)이다. ‘추은’, 은혜를 베풀어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정책도 이면에는 깊은 뜻이 내재되어 있었다.
“고대 제후의 봉지는 백 리를 넘지 않았기에 강약의 형세에 따라 쉽게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제후는 수십 개의 성을 연결하여 사방 천리에 달합니다. 풀어주면 교만 사치하여 쉽게 음란해지고 조이면 강한 힘으로 저항하며 서로 연결하여 중앙에 대항합니다. 이제서 이들을 법으로 삭감하려면 만역의 싹이 트게 되니 전날 조조가 그러한 예입니다. 지금 제후의 자제가 십여 명이 되더라도 적장자만 뒤를 이을 뿐 나머지는 비록 골육이지만 조그만 땅에도 봉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 해서는 인효를 권장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제후들이 ‘추은(推恩)’을 받아 자제에게 땅을 나누어 봉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저들은 각자 바라던 바를 얻을 수 있어 기뻐할 것이며, 주상께서는 덕을 베풀면서 실제로는 그 나라를 분할하는 것이기에 그 세력은 필히 조금씩 약해질 것입니다.”
「공손홍복식예관전」,『한서』4권, 명문당, 554쪽
요지는 간단하다. 제후가 적자에게만 땅을 세속하지 말고 그 이외의 자손에게도 땅을 분할해서 나누어 주라는 것. 이 정책을 강요하지 않았고 ‘장려’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파급효과는 확실했다. 적자가 아닌 자제들은 땅을 분배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가랑비에 옷이 젖어들듯 추은령 장려는 많은 자손들에게 땅이 분할되면서 제후 세력이 자연스럽게 해체되기 시작했다. 이제 무제는 제후들과 대립각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 추은령이 시행되는 한 시간은 무제편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정책인가. 그러니 어찌 무제가 주보언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제후들의 세력을 자연스럽게 해체한 추은령(推恩令)
제후의 세습이 무너지면서 작은 지역에 봉해진 제후들은 국가에서 파견된 관리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제후들은 자신의 권력을 자연스럽게 국가에 헌납하게 되었다. 대신 그들은 자신의 땅에서 나오는 세금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권력은 없지만 물질적인 풍요를 선택한 제후들. 오초칠국의 난이 발생한 이유를 기억하실 것이다. 조조가 경제에게 영지 삭감 정책을 제안해서 그것이 씨앗이 되어 제후국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물론 경제가 이것을 잘 진압해서 주도권을 잡긴 했으나 그 불씨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추은령의 시행으로 더 이상 오초칠국의 트라우마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무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제후가 사라진 후 지방관을 파견했으나 지방관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면 도적들이 발호하기도 하고 감독의 주체인 지방관이 비리를 저지르기도 했다. 추은령 시행 후 문제가 생길 때 마다 승상은 임기응변식으로 자신에게 속한 관리를 파견하여 문제를 수습하는 정도였다. 무제는 중앙집권을 위해 좀 더 치밀한 관리 체계를 기획한다. 그는 평상시에도 지방관과 지방 호족을 감독하기 위해 자사부를 설치한 것이다. 이제 그 곳에서 근무할 인재 발굴에 나서게 된다.
“대개 비상지공(非常之公)을 세우려면 꼭 비상지인(非常之人)이 있어야 하니 말은 내달리거나 뒷발로 차지만 천리를 갈 수 있고, 사인(士人)은 세속의 낡은 규율을 넘을 때 공명을 이룰 수 있다. 물론 수레를 뒤엎는 말이나 방자한 인재가 있다지만 다만 통제하기 나름이다. 각 주군에 명하여 관리나 백성 중에 뛰어난 수재나 등급을 초월하여 장상이 될 수 있거나 먼 이국에 사신으로 보낼 만한 자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라.”
「무제기」,『한서』1권, 명문당, 358쪽
“자사부 13주를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문무 대신이 반가워하지 않자 조서를 내려 말했다.”고 한서 무제기는 기록하고 있다. 자사부는 지방관리를 감시하는 부서이다. 자(刺)는 꾸짖다. 찌르다는 뜻으로 지방관의 비리를 감시한다는 의미이다. 이 정책을 문무대신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지방에서 상주하면서 근무를 해야 하니 유배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조건을 간파한 무제가 자사에 알맞은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설득하는 논리가 놀랍다. 비상한 공을 세우려면 비상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운을 뗀다. 뒷발로 차야 천리를 갈 수 있고 선비는 낡은 규율을 넘어야 공명을 얻을 수 있다는 황제의 말에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흔들렸겠는가. 지방으로 가길 꺼리던 인재들은 공명을 얻기 위해 기꺼이 관리가 되어 떠나게 된다. 결국 무제(원봉 5년_bc 106년)는 전국을 13개의 감찰구역으로 나누었고 각 부에 인재가 배치될 수 있었다.
위에서 보았듯이 무제의 화려한 여름은 저절로 온 게 아니다. 겉이 화려하기 위해서는 그 만큰 치밀한 내부가 받쳐주어야 한다. 무제는 그 원리를 온몸으로 터득한 존재였다. 추은령을 통해 제후의 세력을 해체하고 자사부를 만들어 지방관과 지방 호족들을 관리할 정도로 치밀함을 발휘했기 때문에 제국의 뜨겁고 화려한 여름은 계속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글_박장금(감이당, 금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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