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리를 만드는 사회
혹리의 탄생
무제의 신하 중, 장탕이란 인물이 있다. 하급관리에서 시작해 어사대부까지 오른 인물로, 청렴과 엄정한 법 적용의 대명사다. 무제의 신임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天下事皆決湯(천하사개결탕)! ‘천하의 모든 정치가 오직 장탕의 손에서 결정되었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그러나 반고의 평가는 무제와 다르다. 반고는 장탕을 혹리로 분류했다. 왜 반고는 장탕을 혹리, 즉 가혹한 관리라 부른 것일까?
부국강병의 욕망이 이글거리는 시대. 무제는 흉노를 서역으로 몰아내고, 사이(四夷)를 복속시켜 영토를 넓혀나갔다. 다스릴 땅이 넓어지니 관리가 많이 필요한 건 인지상정. 관리가 많이 필요한 시대에 무제는 어떤 관리가 필요했을까?
무제가 천하를 통치하면서 현인을 등용하고 유생을 채용하며 나라의 영역을 수 천리 넓히면서 공을 세운 자는 위세를 부리며 마음대로 행동하였고, 나라의 재용이 부족해지자 모든 것이 변하여 범법자라도 납속하면 용서를 받고 곡식 바친 자를 관리에 임용하였는데, 이로써 천하는 더욱 사치하고 나라는 어지러워지고 백성은 가난해졌으며 도적이 봉기하고 도망치는 백성이 많아졌습니다. (중략) 바르지 않아도 재물 있는 자가 행세하게 되고 기만하거나 문서에 능숙한 자가 조정에서 우대받고 패악하거나 흉포한 자가 고관이 되었습니다.
「공우전」,『한서』6권, 명문당, 321쪽
우리는 보통 위대한 황제의 기준을 업적에 둔다. 그 중에서도 영토 확장은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다. 그러나 공우는 이러한 기준으로 황제를 평가하지 않는다. 공우가 시대를 기억하는 방식은 업적이 아니라, 업적의 이면이다. 넓은 영토를 무조건 칭송할 것이 아니라, 그 넓은 영토가 어떤 희생 위에서 구축된 업적인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공우가 보기에 영토 확장은 수많은 백성들을 가난에 내몰고, 그들을 도적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과연 이것이 칭송받아야할 일인가. 게다가 공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러한 업적에 일조한 자들 역시 문제 삼는다. 왜 현인과 유생이 즐비했음에도 나라가 어지러웠느냐고.
공우에게 중요한 것은 인재가 아니라 인재를 이끄는 힘의 속성이었다. 군주의 욕망과 시대의 형세가 만들어낸 힘 관계를 봐야한다는 것. 일례로 문제(효문황제)때 한나라의 형세는 ‘제국의 봄’이었다. 이제 막 전란의 혼돈에서 벗어나, 천하가 회복과 휴식을 열망하던 시기로 가혹한 법이 작동할 수 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황로의 철학으로 자기를 수양하는 공검의 군주였다. 청렴을 중시하고 탐욕을 천시했다. 해서 문제는 재물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상인과 같은 부류를 관리로 두지 않았다. 또 그런 자들이 모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무제 시대에 이르러 한나라의 형세는 변했다. 나라가 부유해지고 힘이 넘치자 무제는 대외 정벌을 선언한다. 천하의 천자가 되겠다는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자 무제 곁에는 무제의 욕망에 감응한 자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무제 역시 능력만 있으면 출신을 막론하고 인재 삼았다. 양을 치던 자나 노비, 상인은 물론 범법자라도 상관없었다. 오직 능력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과연 어떤 능력일까? 주된 능력은 2가지다. 세금 잘 걷기와 형벌 잘 주기.
이렇듯 무제가 능력과 성과중심으로 다스림의 형세를 만들자, 성과내기에 지나치게 몰두한 자들이 관료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름하야 ‘혹리’의 탄생! 장탕은 이러한 시대적 조건을 토양삼아 탄생한 한나라 대표 혹리다.
법대로! 가혹하게!
장탕은 혹리 영성의 수하였다. ‘차라리 어미 호랑이를 만날지언정 화가 난 영성을 만나지는 말아야 한다.’(「혹리전」, 『한서8권』, 명문당, 352쪽)할 정도로 흉포한 바로 그 영성이다. 혹리 밑에 혹리라는 배치도 흥미롭지만 영성의 추천에 의해 장탕이 승진한 것 역시 흥미롭다. 혹리는 마치 자신만 챙길 것 같지만, 그런 이미지와는 다르게 사실 추천도 잘했던 것. 그 뒤로 장탕은 운이 좋았는지 단 한 번의 좌천 없이 추천에 추천을 거듭, 승상 전분에 의해 시어사(侍御史)까지 오른다. 시어사는 감찰직으로, 법을 위반한 관리들을 적발하여 탄핵하는 것이 주된 임무다.
이 때까지 별다른 두각 없이 지내던 장탕에게 하나의 인생사건이 찾아온다. 이름하야 ‘진황후 무고사건’. 사건의 대강은 이렇다. 무제의 아내 진황후는, 무제가 총애한 노비 위자부의 임신소식에 격분하여 무당 ‘초복’을 불러 저주술을 행했다. 죄명은 무고죄. 여기서 말하는 ‘무고’는 오늘날의 허위사실 유포죄의 무고(誣告)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상대방을 해코지하는 저주로서의 무고(巫蠱)다. 장탕은 바로 이 사건의 조사로 주목받는다. 오늘날로 보면 ‘특검’인 셈이다.
장탕은 진황후의 권세에 휘둘리지 않고,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파헤쳐 관련자를 모두 처형시켰다. 처형된 자만 무려 삼백여 명. 장탕은 이 판결로 일약 스타가 되어 무제의 눈에 들게 되었다. 태중대부로 전격 승진! 누가 봐도 가혹한 판결이었지만 무제에게 장탕의 판결은 가혹함이 아닌 엄정함이었다. 그러나 조금 들여다보면, 사실 이 판결은 무제가 원한 바이기도 했다. 무제와 진황후가 정략결혼 사이라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둘 사이에는 10년 동안 아들이 없었다. 게다가 무제는 평소 진황후의 교만함과 후궁의 핍박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기에 ‘걸리기만 걸려라’는 심정으로 지켜보던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때마침 드러난 진황후 무고죄를 그냥 넘어갈 리 있었겠는가. 장탕이 공을 세운 데에는 이런 곡절이 있었다.
그 무렵, 흉노의 혼야왕 등이 투항했고 한은 대거 군사를 일으켜 흉노를 토벌했으며 산동 지역의 수해와 가뭄으로 빈민이 흘러들어와 나라에서 구제해주길 원했지만 나라의 재정도 바닥이 났었다. 장탕은 무제의 뜻에 따라 백금전과 오수전의 주조를 주청했고, 천하의 염철을 전매하면서 부유한 상인이나 대상인을 억누르고, 고민령을 시행하면서 부호와 세력가를 제거하였으며, 법령을 교묘하게 적용하여 죄에 얽어매면서 법의 집행을 도왔다. 장탕은 매 조회마다 나라의 재용을 논의했고 해가 저물도록 천자와 망식 할 때도 있었다. 승상은 그저 자리만 지켰고 천자는 모든 국사를 장탕과 결정하였다.
「장탕전」,『한서』5권, 명문당, 20-21쪽
대외정벌이 계속될수록 나라의 곳간 상태는 비어가, 무제는 빈민과 투항하는 자들 마저 거두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무제는 재원 마련이 시급했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 증세를 반길 백성은 없다. 무제의 근심은 여기에 있었다. 허나 장탕은 군주의 욕망을 읽고, 군주의 뜻에 따라 법을 적용하는 것에 능한 자! ‘무제가 처벌할 의도가 있다면 속관 중에서 각박한 사람에게 사건을 배정하였고 만약 무제가 용서할 뜻이 있으면 가볍게 평결하는 자에게 맡기었다.’(「장탕전」, 『한서5권』, 명문당, 18쪽) 할 정도로 장탕의 법은 무제를 위해 교묘히 쓰였다. 장탕은 무제의 의중이 재원마련에 있음을 알고 조세법을 손본다. 없는 세금은 만들고, 있는 세금은 강화하고! 그 결과 장탕은 상인, 수공업자, 고리대금업자에게 세금을 걷는 산민전! 이들의 숨긴 재산을 고발하는 자에게 포상금을 주는 고민령! 국가주도의 화폐 주조와 염철 전매! 등 많은 조세법을 만든다. 무제는 이런 장탕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탕이 하급관리에서 시작해 구경의 반열에 오른 배경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다.
반고는 이처럼 군주의 뜻에 영합하여 가혹하게 법 적용한 자들을 일컬어 혹리라 칭했다. 장탕을 혹리라 칭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일례로 혹리 왕온서는 법 판결로 처형시킨 자의 피가 10여리나 흘렀다고 한다. 혹리들의 가혹하기가 대략 이 정도였다. 혹리는 무엇에 의해 가혹해지는 것일까?
능력을 팔아, 사심을 채우다
노자에는 ‘법령이 늘어나면 도적이 늘어난다.’고 말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법령이 늘어나서 도적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법이 아무리 많아도, 법을 적용 하는 관리가 문제 삼지 않으면 죄가 아니지만, 법을 적용하는 관리가 죄인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비록 법이 1개라 할지라도 10개의 죄를 만들 수 있다. 해서 중요한 것은 법의 양이 아니라 법을 해석하는 관리의 신체성이다. 법을 적용하는 관리가 어떤 가치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지를 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가치가 가혹함을 낳을까?
관리는 관료제의 질서에 가치를 둔다. 관료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과를 중심으로 승진과 좌천이 오고가는 구조로, 서열과 위계를 중시하는 권력집단이다. 성과를 낸 만큼 승진하니 무척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료제에 편입된 신체를 성과와 승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한계가 있다. 성과와 승진에 포획된 신체의 양산! 한계가 극단에 이르면 부작용을 낳는 법이다. 가혹함은 성과주의의 부작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혹리가 성과를 중시한다는 점에 있다. 법이 가혹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법과 성과주의의 만남! 그렇다면 장탕은 어땠을까?
장탕은 회남왕과 형산왕, 강도왕의 반란을 치죄하면서 그 근본을 철저하게 밝혀내었다. 엄조와 오피에 대하여 무제는 석방하고 싶었지만 장탕은 이를 따지며 말했다. ‘오피는 본래 모반을 꾸몄으며 엄조는 신임을 얻어 왕궁에 출입한 복심의 신하로 다른 제후와 이처럼 은밀한 왕래를 했는데 죽이지 않는다면 뒤에라도 다른 이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무제는 그 판결에 동의하였다. 장탕은 판결하면서 교묘하게 대신들을 타격하여 자신의 공적으로 만들었는데 이와 유사한 일이 많았다. 이로써 장탕은 더욱 신임을 받아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
「장탕전」,『한서』5권, 명문당, 19쪽
장탕은 회남왕 모반사건을 맡았다. 사건의 핵심은 ‘엄조’라는 인물에 있었다. 엄조는 누구인가? 『한서』에는 ‘오직 엄조와 오구수왕만 신임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엄조가 제일 앞서 나갔다.’(「엄주오구주보서엄종왕가전(상)」, 『한서5권』, 명문당, 274쪽)했을 정도로 엄조는 무제가 가장 총애한 신하였다. 그런 엄조가 모반죄에 연루된 것이다. 형벌은 사형! 무제는 엄조를 살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장탕에겐 무제가 가장 아끼는 신하라도 법 외부에 있을 수 없었다. 장탕은 엄조가 모반에 직접적인 연루가 없다 할지라도, 그가 제후와 사적으로 만나고 많은 재물을 받은 것은, 그 자체로 권세를 잡기 위한 의도라고 해석했다. 게다가 <예기 왕제>에도 ‘비리(非理)를 따라 윤택해졌다면 듣지 않고 주살한다.’(같은 책, 395쪽)는 법이 있으니, 사적으로 얻은 재물은 그 자체로 사형이었다. 무제는 결국 장탕의 판결에 손을 들어주었고, 엄조는 처형 되었다.
당시 엄조 사건을 두고 장탕의 가혹함에 비난 여론이 쏟아졌다. 장탕이 엄조를 모함해서 배척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일까? 이에 대해 무제는 장탕의 법 적용이 엄정했다고 평가 했으며, 반고 역시 ‘엄조와 가연지는 궁궐에 출입하면서 권세를 잡으려 했으니 처형될 만 하였는데 어찌 배척당하고 모함 받았다고 한탄하겠는가!’(같은 책, 397쪽)라고 논찬하며, 장탕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주매신, 적산과 같은 신하들은 장탕의 법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원한을 품었다. 왜일까?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장탕의 법 적용이 아니라 법 판결을 이용해 자신의 승진도구로 삼은 장탕의 사심에 있었다. 원한감정은 법 집행의 정당성이 사심에 의해 퇴색될 때 생기는 것이 아닌가. 대부분의 혹리가 이러한 사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재물을 위해 가혹해지거나! 권력을 위해 가혹해지거나!
권력이 만든 원한감정
가혹함이 지나치면 적을 만든다. 장탕은 엄조사건의 해결로 권력의 최고 정점 어사대부까지 올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몰락하게 된다. 그 사연이 흥미롭다.
장탕이 정위가 되어 회남왕 반역에 대한 심문을 주관하면서 엄조를 사건에 연루시켜 죽게 하자 주매신은 장탕에게 원한을 품었다. 매신이 장사가 되었을 때 장탕은 수시로 승상의 업무를 대행했다. 장탕은 주매신이 전에 자신보다 높았었기에 일부러 주매신을 무시하고 욕보였다. 주매신이 장탕을 알현할 때 장탕은 책상에서 답례를 취하지도 않았다. 주매신은 언제나 목숨을 걸고 장탕을 해치려 하였다.
「주매신전」,『한서』5권, 명문당, 308쪽
장사(長史)인 주매신은 평소에 장탕에 원한이 있었는데 이는 그의 전(傳)에 실려 있다. 왕봉은 제나라 사람인데 유학으로 右內史에 승진했었다. 변통은 종횡가의 학술을 배웠는데 억세고 포악한 사람으로 제남국의 相이었다. 예전에 두 사람은 장탕보다 상관이었으나 관직에서 밀려났다가 장리의 서리로 장탕 아래에 몸을 굽히고 있었다. 장탕은 승상과 업무를 같이 하면서 이 장사 3인(주매신,왕조,변통)이 평소에 거만하다는 것을 알고 늘 꺾어 무시했었다. 그래서 장사 세 사람이 같이 모의하기를 (중략) 장탕이 무제에게 주청하려는 일을 전신 등이 미리 알아서 중간에 물자를 챙겨 돈을 번 뒤에 장탕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다.
「장탕전」,『한서』5권, 명문당, 28쪽
장탕이 몰락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인용문만 보면 장탕의 처세가 문제인 것 같다. 거만과 무시!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장사 3인이 장탕의 상관이었을 시절엔 그들 역시 장탕에게 거만과 무시로 일관했었다. 누가 더 나쁘고 덜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해서 이 사건의 해석을 장탕의 처세가 못마땅했던 장사 3인의 단순 모함사건으로 보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다른 이유는 없을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장탕의 대인관계다. 장탕은 평소 주위사람들, 특히 자기수하들을 잘 챙긴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장탕이 왜 장사 3인에게만 유독 모질었던 것일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관료제의 권력구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서』 「주매신전」은 장탕과 주매신이 결코 가깝게 지낼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왕조와 변통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엄조와 주매신의 관직은 황제를 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시중으로 황제의 직속자문기관이다. 무제는 자주 엄조와 주매신에게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을 상대로 변론케 하였는데, 일례로 승상 공손홍은 삭방군 설치와 관련한 토론에서 주매신의 변론에 한마디도 꺼내지 못할 정도였다. 공손홍이 누구인가? 돼지를 키우다 문장 하나로 승상에 오른 인물이 아닌가. 그런 공손홍을 침묵하게 했던 이들이 당시 시중이었다. 그들은 변론과 책문에 능해 황제의 총애를 받기에 유리했다. 반면 장탕의 관직은 시어사, 즉 감찰직으로, 모든 대소신료가 눈치를 보는 자리였다. 무제에게 이 둘은 모두 필요한 관리들이다. 하지만 권력을 기준으로 봤을 때 시어사와 시중은 대립을 피할 수 없다. 지위가 만든 권력이 그들을 대립하게 하는 것이다. 해서 장탕이 엄조를 처형한 것은 단순한 처형이 아니다. 모반자의 처단과 시중의 권력에 대한 견제가 동시에 이루어진 법 판결이었던 것이다. 장탕 입장에서는 권력 견제 측면에서라도 절대 엄조를 그냥 살려둘 수 없었다. 주매신의 원한이 죽음을 불사케 하는 감정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권력구도에서 밀려난 악감정, 엄조에 대한 의리, 초나라 사람 특유의 분노를 참을 수 없는 기질. 이 모든 것이 주매신을 살인충동으로 이끈 것이다.
모함의 함정
평소 장탕을 신뢰했던 무제였지만, 장사 3인의 집요한 모함에 신뢰는 흔들렸다. 그런데 그들은 왜 ‘모함’을 선택했을까? 그렇게 죽이고자 했다면 자객을 보낼 수도, 독약을 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관료제는 성과를 내야 승진이 가능하다. 승진을 통해 다시 장탕의 상관이 되면 자연스레 문제가 개선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장사 3인은 능력으로 장탕을 넘어서질 못했다. 이미 어사대부가 되어버린 장탕을 무슨 수로 앞지른단 말인가. 이럴 때 흔히 등장하는 방법이 자객이나 독약인데, 이는 증거가 남기에 훗날 죄 값을 물을 위험이 있다. ‘모함’은 이처럼 능력이 부족한 자들이 능력 있는 자를 끌어내릴 때 쓰기 가장 좋은 술수다. 게다가 증거도 없다. 이 얼마나 좋은 방법인가.
관료제 사회에서 가장 손쉬운 모함이자, 치명적인 모함은 도덕성에 흠집 내기다. 한마디로 비리공무원 프레임 씌우기! 게다가 법을 집행하는 관리에게는 무엇보다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 무제 역시 장탕이 장사꾼 전신과 결탁해 중간에서 돈을 챙겼다는 소문에 분노하지 않았는가. 장탕은 곧장 심문을 받았다. 허나 죄를 인정하지 않아 무제의 분노를 더한다. 그러나 무제는 기분대로 벌을 주는 황제가 아니다. 무제에겐 법적인 절차가 중요했다. 이에 무제는 조우에게 심문을 다시 맡긴다. 조우는 누구인가? 조우는 장탕과 호형호제하던 사이로, 함께 율령을 제정하고 법을 엄격하게 고치는데 앞장섰던 혹리다. 혹리를 처벌하기 위해 혹리를 앞세운 무제의 선택! 조우는 무제의 의중을 파악했다. 하여 심문하기 전, 장탕에게 비난 섞인 어조로 말한다. ‘지금 사람들이 당신이 모두 죄가 있다고 말했고, 천자께서도 당신의 죄를 거듭 지적하며 스스로 일을 끝내게 하려는데 어찌 그렇게 대꾸하는가?’(「장탕전」, 『한서5권』, 명문당, 29쪽) 장탕은 이 말을 듣고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죄의 유무가 아니라, 황제의 의중이 자신을 벌주려 한 것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장탕은 자살한다. 황제가 처벌할 의도가 있다면 죄가 없어도 법을 바꾸면서까지 벌을 주던 자신이 만든 덫에 갇힌 것이다.
훗날 무제는 장탕의 청렴을 알고, 뒤늦게 모함을 주도한 장사 3인을 처형한다. 장탕의 억울함은 이렇게 풀린다. 그러나 그 결과 무제 곁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장탕도 엄조도 주매신도 없었다. 무제의 의심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 무제는 자신이 그토록 신뢰했던 자들을 의심한 것일까? 혹 성과주의 사회의 한계는 아닐까. 성과와 이익으로 맺어진 군신관계는 그러한 조건이 사라지면 의심으로 이어지는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성과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자, 예관
여기 성과를 중시한 시대에, 그러한 성과주위에 포획되지 않고 자기본위를 지킨 관리가 한 사람 있다. 그는 바로 순리의 대명사 예관이다. 순리라 불린다지만 무시하지 마시라. 그는 종사에서 시작해 좌내사를 거쳐 어사대부까지 오른 인물이다. 장탕의 지위와 동일한 바로 그 어사대부다. 예관의 어사대부가 놀라운 것은 그가 군주의 뜻에 영합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소신과 능력으로 이룬 결과라는 사실인데, 무엇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예관을 추천해 승진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장탕이라는 점이다.
예관이 조세를 징수하면서 풍흉에 따라 납부시기를 조절하며 백성끼리 서로 대여케 하였는데 그 때문에 조세가 많이 납부되지 않았다. 뒤에 군량 징발이 있어 좌내사(예관)가 조세 미납이 많아 최하등급을 받았고 면직되어야만 했다. 백성들은 예관이 면직된다는 말을 듣고 예관이 떠날 것을 걱정하여 부자들은 牛車로, 가난한 집에서는 등짐으로 조세를 운반하여 밧줄처럼 이어졌고 다시 평가하여 최상급을 받았다.
「공손홍복식예관전」,『한서』4권, 명문당, 578쪽
법은 누군가를 죽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누군가를 살리기도 한다. 예관의 법은 生의 법이었다. 生의 법은 무엇일까? 관건은 법이 아니라 법의 적용에 있다. 예관은 법 이전에 백성의 삶을 살피고, 계절을 이해하고, 풍흉을 고려했다. 그런 후 이러한 조건을 근거삼아 법을 재해석하여 적용했다. 이것은 분명 공평한 법 적용이 아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누구하나 예관의 법이 불공평하다고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예관의 기계적이지 않은 법 적용이 백성에겐 오히려 더 공평하고 더 공정한 법이었던 것이다. 예관은 자기본위의 법 적용으로 수많은 백성을 흉작으로부터 살려냈다. 이것이 바로 법의 생의 기운이다.
법은 공부하면 되지만, 공감은 공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성과주의는 사람을 모든 관계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에, 더더욱 공감할 수 없는 신체로 만든다. 그렇다면 예관의 무엇이 공감의 지평을 넓힌 것일까? 반고가 말한 바, 예관의 인물됨은 ‘청렴으로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자’로, 일찍부터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가치에 대해 고민하며, 끊임없이 자기수양을 행했던 인물이다. 최하등급의 관리평가를 받을 줄 알면서도 그러한 평가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여기서 생기는 한 가지 의문! 그렇다면 장탕의 청렴은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장탕 역시 재산이 겨우 5백전에 불과 했을 정도로 청렴했다. 게다가 그의 가혹함은 부호와 세력가들에게만 작동했을 뿐, 사실 백성들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장탕은 혹리라는 평을 벗어나지 못했다. 왜인가? 장탕에게 청렴은 스펙이었다. 군주와 상사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청렴이었던 것이다. 해서 장탕의 청렴은 늘 규범적으로 사용되었을 뿐, 일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장탕이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라 평가 받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셈이다.
예관은 공검(恭儉)을 택한 대가로 장탕과 같은 권세를 누리진 못했다. 그러나 모함관계의 함정에는 빠지지 않아 평생 관직을 지키며 천수를 누렸으니, 이 또한 얻은 바가 있었다. 모두가 성과와 능력에 경도된 시대, 무엇으로 자기본위를 구성할 것인가? 반고가 혹리와 순리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 하고자 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글_강보순(감이당 화요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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