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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의질문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바쁜 세상에 맞서는 안티의 윤리

by 북드라망 2019. 10. 30.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바쁜 세상에 맞서는 안티의 윤리

세상의 속도와 달리 자기만의 속도로 걸어갈 수는 없을까?



왜 고양이의 시선인가?


대 스타일수록 공연의 맨 마지막에 등장해서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하는 법이다. 소세키 문학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하 『나 고양이』)를 가장 끝으로 소개하는 까닭은 대 스타를 대우하는 이치와 같다. 『나 고양이』는 소세키의 장편소설 14편중에서 내가 가장 애정을 느끼는 작품이라 아껴둔 보물을 꺼내는 심정이다. 1905년 1월 『나 고양이』 1회분이 잡지에 발표되었다. 소설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원래 시험 삼아 한 편 썼던 소설이 열화와 같은 인기를 얻게 되자 소세키는 11편이나 연재를 이어나가게 된다. 『나 고양이』는 무명작가였던 소세키를 세상에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맨 처음 쓴 등단작이 생애 가장 유명한 대표작이 되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이 소설에는 자본주의의 실상과 허상을 비롯해 근대문명 비판과 자기본위의 개인주의, 마음의 탐구와 같은 소세키의 주요 사상이 총망라되어 있다.




『나 고양이』는 이름 없는 새끼고양이가 구샤미 선생의 집으로 기어들어와 함께 살면서 시작된다. 고양이는 주인집 식구들을 관찰하고 그 집에 드나드는 친구들과의 대화를 엿듣고 전해준다. 잡지에 연재되던 이 소설은 상 ,중, 하권으로 묶여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소세키는 상권 자서에서 “고양이가 살아있는 동안, 고양이의 기분이 내킬 때는 나도 다시 붓을 잡아야 한다.”고 썼다. 소설을 쓰게 하는 동인(動因)이 작가의 의지가 아니라 고양이의 기분에 따라서라는 발상이 독특하고 재미있다. 왜냐하면 고양이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소세키는 왜 고양이를 소설의 화자(話者)로 삼은 걸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생각하는 존재’이다. 동물이지만 인간 행태의 앞면과 뒷면을 폭 넓게 투시할 수 있는 인식력을 가졌다. 심지어는 주인의 심리까지 꿰뚫어보는 독심술도 구사한다. 이 집의 고양이는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파악해 나간다. 고양이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인간 군상을 객관화시켜서 바라본다.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태가 고양이의 시선으로 보면 당연하지 않고 이질적으로 비친다. 

 

고양이가 바라보는 문명세계는 한 마디로 “바쁘다. 바빠.”이다. 고양이가 보기에 인간은 쓸 데 없는 일을 만들어서 바빠서 허둥대는 존재다. 고양이는 인간들이 바쁜 까닭을 간파한다. 예컨대 인간은 하늘과 대지를 만들기 위해 조금도 애쓰지 않았으면서 땅에 금을 긋고 자기의 소유라고 주장하느라 바쁘다. 창공에도 울타리를 칠 태세다. 인간은 천지자연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느라 바쁘다. 고양이가 보기에 인간은 태생적으로 평등을 싫어하는 것 같다. 동물은 옷이 필요 없는 데 인간은 왜 옷을 입는가. 재산과 신분과 지위가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고양이는 복장을 통해서 계급의 차별성을 나타내려는 문명세계의 인간을 비웃는다. 인간이 유일하게 평등해지는 곳은 모두가 옷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는 공중목욕탕 안이다. 고양이가 공휴일에 주인을 뒤따라가서 공중목욕탕을 보고 생각하는 인식수준이 이 정도로 근사하다. 소세키가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인간세상을 냉철하게 조감할 수 있는 관찰카메라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고양이는 10년째 중학교 영어교사를 하고 있는 구샤미가 “목욕탕과 탈의실 사이에 놓인 문지방을 딛고 서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문명사회에 속하지도 못하고 벗어나지도 못하는 경계인이다. 때로는 구샤미가 소세키가 되고 때로는 고양이가 소세키를 대변해준다. 소세키는 자유자재로 인간과 동물을 넘나들면서 자아와 타자의 세계를 그려나간다. 그러고 보면 소세키는 문명사회를 냉소하는 방관자적인 위치를 넘어서 시대와 사회를 해석하고 증언하는 참여자의 위치에 자신을 올려놓고 싶었던 것 같다.  



무사태평 한가롭게 사는 사람들

 

고양이가 얼마나 인간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는지는 간게쓰의 혼담에 얽힌 소동만 봐도 알 수 있다. 간게쓰는 구샤미의 제자로 지금은 대학에 근무하는 물리학자이다. 존경받는 학자가 연구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괴상말똥하다. 간게쓰는 <목 매달기의 역학>을 연구하는데 언제부터 사람들이 목을 매서 자살을 했는지 목을 매는 방법론이 역학적으로 타당한지를 계산한다. 사회고위층을 이루고 있는 대학사회의 허상을 들춰내는 뼈있는 농담이 배꼽을 잡게 만든다. 인근에 살고 있는 돈 많은 사업가 가네다는 간게쓰를 사위로 삼고 싶어 한다. 재산은 차고 넘치니 박사라는 명예까지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가네다 부인은 간게쓰가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내려고 직접 구샤미의 집을 방문했다가 깜짝 놀란다. 가네다가 누구지? 구샤미의 반응이 심드렁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지금까지 가네다씨 아내라고 말했을 때 후다닥 태도를 바꾸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 사람 뭐야? 가난한 선생 주제에 건방지기 짝이 없네. 가네다는 자신들 앞에서 설설 기지 않는 벽창호가 괘씸해서 구샤미를 골탕 먹이려고 인맥을 총동원한다.


구샤미는 눈치도 없이 “나 이 결혼 반댈세.”로 나간다. 이유는? 가네다 부인의 코가 너무 커서 싫다는 거다. 높은 콧대만큼 부인은 거만하고 무례하다. 가네다가 지폐에 눈과 코를 붙여놓은 ‘활동지폐’라면 그의 딸은 ‘활동우표’쯤 될 게 뻔하다. 그에 비하면 간게쓰는 ‘활동도서관’이다. 간게쓰는  <개구리 눈알의 전동작용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지만 개구리 눈알같이 깎으려는 유리알은 자꾸만 콩알만 해진다. 박사학위는 요원해지고 부잣집 딸과의 혼사는 무산된다. 이 우스꽝스러운 소동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인정도 의리도 사라진 속물주의를 신랄하게 폭로하고 있다. 




고양이는 구샤미 집안의 일상사를 사생화처럼 촘촘하게 묘사한다. 문자 그대로 일상사이다. 특별한 사건이랄 게 없다. 구샤미가 집에 드나드는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가 거의 다다. 드나드는 지인들은 미학이나 물리학, 문학을 전공한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이다. 구샤미 일행은 돈벌이에는 최소한으로 에너지를 기울이고 남는 시간은 모여서 시시한 농담 따먹기로 소일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족속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써 입을 놀리고,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에 웃고,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에 기뻐하는 것 말고는 별 재주가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7년, 108쪽)

 

고양이가 보기에 인간은 이상한 족속이다. 쉴 새 없이 말하고 웃고 즐거워하는 것 밖에 신통한 재주가 없어 보인다. 바로 이 점이 내가 고양이에게 전격 공감하는 부분이다. 스토리텔링이야말로 인간을 연대하게 만들고 사회를 유지시키는 힘이 아닌가.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는 시인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재담이었다. 나는 사는 재미의 대부분을 벗들과 나누는 한담에서 얻는다. 아무리 신세가 고달파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세상풍파를 넘어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구샤미 집에는 이야기가 백과전서처럼 흘러넘친다. 미학자 메이테이가 세상에 있지도 않은 ‘도치멘보’라는 서양요리를 주문해서 식당 종업원을 골려먹은 이야기를 꺼낸다. 말장난에는 문학계에 새롭게 유행하는 하이쿠운동이 암시되어 있다. 구샤미는 ‘땅속의 거인이 끌어당기는 힘’이라는 이야기로 화답하면서 중력에 대한 물리학 지식을 뽐낸다. 메이테이가 전사한 친구의 소식을 편지받고 슬퍼서 ‘목매는 소나무’를 찾아간 이야기를 하면 간게쓰는 강물 아래서 부르는 아가씨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듣고 다리에서 뛰어내렸다는 ‘자살미수사건’으로 대응한다. 거의가 농담이거나 과장된 뻥이다. 뻥을 쳐도 뭐라는 사람이 없다. 허풍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안목”에 속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기에 허허 웃어넘긴다. 농담 같으면서도 고급지고 지성적인 수다삼매경에 빠진다. 그들은 해학과 익살을 소일거리 삼아 장난과 허풍을 즐기며 살아간다.

 

이런 한가로운 사람들 같으니라고. 어떻게 이렇게 무사태평 살아갈 수 있지? 슬며시 의문이 든다. 소세키가 『나 고양이』를 연재하기 시작한 때는 일본이 뤼순을 함락한 해이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일약 세계사의 주역으로 합류했다. 정치적으로는 국가라는 거대 담론 하에 일사불란하게 집결하고,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주식과 경마 열풍이 불고, 황금만능주의와 한탕주의가 휩쓸고 있었다. 물가와 집세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취업난은 심해지고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있었으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한정 없는 세상이다. 그런데 구샤미 일당은 하릴없이 세상을 비꼬고, 재치 있게 세태를 패러디하며 노닥거린다. 세상의 낙이라곤 입담뿐이다. 이래도 되나? 이래서야 경쟁에 뒤처지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근대화의 물살을 탈 수 있을까? 설마.



도락,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활동


세상은 구샤미 같은 사람을 고집쟁이라고 부른다. 구샤미도 자신이 시류의 흐름에 동떨어진 아웃사이더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는 맨날 학교 선생이 힘들다고 푸념하지만 그렇다고 돈 잘 버는 사업가로 변신할 생각은 꿈에도 없다. 돈을 벌려면 경쟁사회에 합류해야 하는데 실속을 차리는 계산에는 둔하다. 옷은 단벌이요, 지붕 위에는 풀이 자라고, 문패 대신 밥풀로 명함을 붙여 놓는 초라한 생활이지만 세상의 속도를 쫒아 뛰고 싶지는 않다. 아니 그 속도에 맞춰서 뛸 능력도 없다. 빠른 세상과 관계없이 천천히 서행하고 있는 이들의 행보를 뭐라 부를 수 있을까?

 

소세키가 이들의 행보에 붙여준 이름은 “도락(道樂)”이다. 도락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주색잡기가 먼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보편적인 통념으로는 게임이나 도박 같은 취미생활에 중독되어 무책임하게 일상을 방기하는 파락호가 연상되기 마련이다. 소세키는 도락의 의미를 비틀어서 사용한다. 장자가 말하는 쓸모없음의 쓸모랄까 가치의 전도가 일어난다. 세상에서 유능한 사람이 남을 함정에 빠뜨리고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불한당이라면 무능한 사람은 고급한 인간이다. 소세키가 말하는 도락은 즐거움이 도가 되는 삶이다. 남들처럼 실리와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활동이다.

 

구샤미 일행은 화폐가 지배하는 사회를 벗어날 수 없지만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정신적인 자유’이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수채화를 그리고, 연극을 하고, 신체시를 짓고, 하이쿠로 응답한다. 가정경제를 책임진 가장이 도락에 빠지면 큰일이라고? 밤낮으로 투 잡, 쓰리 잡을 뛰어도 모자랄 판에 태평하게 살아가다니 걱정되는가? 맞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걸맞지 않는 처세술이다. 4,50대에 과로사 하는 사건이 새삼스럽지도 않게 된 오늘날의 속도전을 생각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한량이라고 비난받기 알맞다.

 

끼리끼리 만난다고 고양이의 성품도 주인을 똑 닮았다. 고양이는 지금까지 쥐를 잡은 적이 없다. 쥐도 못 잡는 쓸모없는 고양이라고 구박받자 인력거꾼 집의 고양이를 찾아간다. 검둥이는 완력을 자랑하며 자기는 쥐를 40마리 넘게 잡았다고 거드름을 피운다. 당시 도쿄시는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쥐를 잡아가면 마리당 5전씩 사들였다. 검둥이는 자기가 주인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줬는지 자랑한다. 그 말을 들은 고양이는 앞으로도 결코 쥐를 잡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돈벌이도 싫고 국가시책에 부응하는 것도 별로다. 고양이는 울타리를 사뿐히 뛰어 넘으며 공중곡예를 하며 논다. 검둥이는 얼마 후 절름발이가 되었다. 주인에게 충성했던 검둥이의 서글픈 말로가 거대한 생산사회에서의 인간의 노동을 돌아보게 한다. 

 

소세키는 <도락과 직업>을 대비시켜서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자본주의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철저히 분업화되었다. 기계화가 진행될수록 직업이 전문화될수록 공정이 분절되고 3배, 4배로 속도가 빨라진다. 효율성이 높아지면 이익이 커지는데 뭐가 문제냐고? 효율성을 추구하는 시스템은 인간을 소외시킨다. 나는 이 문제를 시아버지를 모시고 3년간 종합병원에 다니면서 절실하게 체험했다. 심장스턴트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 시아버지는 고혈압 때문에 정기적으로 심혈관내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갈 때마다 미리 혈액검사실에 가서 피를 뽑았다. 당뇨수치가 높아지자 내분비내과로 가라 했다. 다시 피를 뽑았다. 빈혈이 심해지자 이번에는 혈액종양내과로 가라 했다. 또 피를 뽑았다. 채혈결과를 기다리고 진료를 대기하는 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세 군데 과를 전전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피가 부족해서 아픈 환자에게 매번 세 번씩이나 채혈을 하니 기가 찼다. 모두 혈액에 관련된 병증이니 같은 날 한 번만 피를 뽑아서 세 가지 검사를 할 수 없느냐고 항의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혈압만 본다, 나는 당뇨만 본다, 나는 종양만 본다는 식이었다. 분업을 해야 빨리 빨리 환자를 처리할 수 있다는 효율성의 신화가 의료시스템을 잠식하고 있었다. 분업화의 과정은 노동하는 사람을 협소한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시킨다. 자본주의가 진행될수록 인간은 노동의 과정에서 소외되고, 생산의 결과로부터도 소외된다. 효율성이라는 기치아래 사람들은 유유자적 느긋하게 사는 법을 잊어버렸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에 대응하기 위해 소세키는 ‘도락’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소세키는 철저히 파편화되고 외로워진 개인이 인간적인 심성을 느끼기 위해서 도락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도락은 자신이 좋아서 “활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의무적으로 하는 노동과는 다르다. 활기차게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행위를 소세키는 도락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도락은 정신을 자극하고 살아있는 생생함을 즐기게 하는 윤활유이다. 그것은 취미에 빠져드는 열정이기도 하고, 학문과 예술의 원천이기도 하다. 도락은 문학도 되고 과학도 되고 철학도 된다. 무사태평 한가하게 수다를 떨며 살아가는 구샤미 일행에게 도락은 문명사회의 도도한 물결을 우회하는 안티의 윤리였던 것이다. 

 

이 소설은 화폐에 사로잡힌 근대의 진풍경을 풍자했다. 문명사회의 미래를 예견하는 장면도 많다. “현대 사회는 자살이 증가할 것이다. ‘죽고 싶은 남자 있음’이라는 팻말을 집 앞에 걸어두면 경찰이 와서 처리해줄 것이다. 행복해지도록 죽음을 돕는 게 국가 공무원의 의무다.”라는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만 점차 결혼이 불가능한 일이 되고 부모 자식이 떨어져 살게 된다, 부부이혼이 증가하고 독신이 늘어난다는 전망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1900년대 초에 이미 현대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감지한 소세키의 날카로운 안목이 돋보인다. 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 삶의 속도는 가속화된다. 빈부의 격차는 따라잡을 수 없이 벌어졌다. 아무리 가져도 만족스럽지 않고, 아무리 발전해도 마음은 불안해진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일찍이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죽은 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화폐라는 물신이다. 물신은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는다. 구원은 셀프! 

 

소세키는 문명사회에서 겪는 개인의 무력감을 종종 걸음걸이에 비유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발뒤꿈치로 걷는다. 도쿄에서는 까치발로 걷는다.” 가장 선진화된 도시사람들은 제대로 걷지를 못한다. 까치발로 종종거리다 어마무시한 인파에 휩쓸려서 떠밀려간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돈다. 근대인의 발걸음은 불안하다. 자기 스스로 속도를 조절할 수가 없다. 한 쪽 발은 고무신을 신고 다른 쪽 발은 축구화를 신은 격이다.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뛰다가는 넘어진다. 소세키의 작품에는 늘 속도감이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한다. 

 

소세키가 강조하는 삶의 윤리는 자기 속도로 걷기이다. 그것은 진보를 향해 직진하는 자본의 속도감에 제동을 거는 조용한 항변이다. 세상의 속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발걸음에 맞춰 걷는 사소한 몸짓이 필요하다. 빠름의 속물성에 저항하는 느림의 윤리다. 무조건적인 소유와 축적이 결코 삶의 해답이 되지 않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획일적인 가치관에 매몰되지 않고 천천히 도락을 즐기며 살아갈 수는 없을까? 숨 막히도록 획일화된 문명의 물결을 비껴갈 수 있는 여유, 누가 뭐래도 한가하게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견지하는 뚝심, 이것이 도락에 담겨 있는 비장의 무기일 것이다. 

글_박성옥


박성옥 선생님의 '소세키의 질문들' 연재는 이번 편으로 마감합니다.

그동안 함께 읽어 주시고, 사랑해 주신 독자님들께 감사합니다.

이 연재는 다듬어져서 2020년 새해 북드라망의 첫 책으로 발간될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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