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사회 만들기
‘건강(健康)’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이다.
에도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의 ‘건강’과 같은 뜻은
‘丈夫’나 ‘健やか’ 등으로 표현되었다.
건강이란 말이 번역된 것은 난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이 말을 대중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후쿠자와 유키치가 계기였다.
─키타자와 카즈토시(北澤一利), 『‘건강’의 일본사(「健康」の日本史)』
안과 밖의 균형으로서의 ‘건강’
근대 일본의 사상가 중에 후쿠자와 유키치만큼 많이 논의되어 온 이도 드물다. 동시에 그처럼 평가가 엇갈린 인물 역시 드물다. 그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으로 갈리는데, 한쪽에서는 건강한 내셔널리스트이자 자유와 평등을 강조한 자유주의의 선구자로, 다른 한쪽에서는 탈아입구론의 제창자로 제국주의적 사상의 맹아를 품은 사상가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이고 서로 상충하는 평가를 하나로 이어 보여주기 위해, 그가 초기에 보여준 건강한 사상이 일본의 국권이 강해지는 시기에 ‘전향’하게 되었다거나, 혹은 초기부터 후쿠자와의 사상 안에는 이미 국권론적 사상 경향이 ‘내재’하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후쿠자와가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살았다[一身二生]’고 말한 것처럼, 그의 사상 역시 전반기의 ‘민권론자’로서의 삶과 후반기의 ‘국권론자’로의 삶으로 나눠질 수 있을까? 이 글은 메이지 초기의 후쿠자와의 사상을 그가 사용하는 신체 은유를 통해 살펴봄으로써 그의 사상적 특징을 다시 읽어내고자 한다. 그가 글을 쓰면서 유비 내지 은유를 많이 쓰고 있는 학자였던 점은 유명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신체나 건강에 대한 유비를 즐겨 사용해왔다. 이는 몸, 질병 등과 같이 일반 인민들에게 친숙한 유비를 통해 효과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려는 의도뿐만 아니라, 개념으로서는 단정 지어 말하기 어려운 사상의 실상(實像)을 전달하고자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상이란 단순히 정치적 맥락에서 나오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관과 연동되어 있는 측면이 강하다. 그렇다면 후쿠자와가 생명 내지 건강을 어떤 관점에서 보았으며, 그가 어떤 식의 신체 은유를 사용하여 정치 개념을 사유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꽤 중요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후쿠자와 사상의 일면을 볼 수 있게 할지 모른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학문의 권장』(1872) 중 4편 ‘학자의 직분을 논함(學者職分論)’에서 정부와 인민의 관계를 신체에 유비하고 있다.
모든 사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의 평균(平均)이 없으면 안 된다. 비유하자면 사람의 몸[人身]과 같다.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음식이 없으면 안 되며, 대기와 햇빛이 없으면 안 된다. 또한 춥고 덥고 아프고 가려운 것처럼 밖으로부터 자극[刺衝]을 받으면 안으로부터 이에 반응함으로써 일신(一身)의 활동을 조화(調和)시킨다. 만약 외물의 자극을 없애고 단지 생명력[生力]의 활동에만 맡겨 방치[放頓]한다면, 몸의 건강은 하루도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나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정치[政]는 일국(一國)의 활동이다. 이 활동을 조화시켜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려면, 안에 있는 정부의 힘과 밖에 있는 인민의 힘을 내외상응(內外相應)하여 그 힘을 평균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정부는 생명력과 같으며 인민은 외물의 자극과 같은 것이다. 만약 외물의 자극을 없애고 단지 정부의 활동에만 맡겨 방치한다면, 나라의 독립은 하루도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인신궁리의 뜻을 알고 그 정칙(定則)으로 일국 경제의 논의에 적용시킬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이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 福澤諭吉, 1978, 『학문의 권장(學問のすすめ)』, 36〜37쪽
우선 후쿠자와가 건강을 ‘안의 생명력’과 ‘바깥의 자극’의 ‘균형’이라는 논리로 설명하는 것이 눈에 띈다. 몸의 건강은 외부의 음식물과 대기와 햇빛,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받은 신체 내부가 반응을 보임으로써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내부의 생명력에만 의지한 채 방치해 둔다면 건강이 유지될 수 없으며,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있어야 일신의 활동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는 국가의 건강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정치의 활동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으로는 정부의 힘과 밖으로는 인민의 힘이 필요하며 그것을 잘 조화시켜 ‘힘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안과 밖의 균형이라는 사유 속에서 방점은 ‘외부의 자극’에 찍혀 있다. 주지하듯 “정부는 있어도 국민(nation)은 없다”라는 후쿠자와의 말은 외부의 자극, 즉 인민의 자극이 없이 정부의 활동에만 의지한다면 국가의 독립은 불가능함을 말한 것이었다. 당시에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혹은 미약하게 존재했던 외부의 자극이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메이로쿠샤 동인들의 비판
그런데 이 글은 앞서 살펴본 메이로쿠 잡지와 관련이 있다. 같은 메이로쿠샤 동인들인 가토 히로유키, 모리 아리노리, 쓰다 마미치, 니시 아마네 네 사람의 논평이 메이로쿠샤 잡지 2권에 실려 있다. 후쿠자와의 글 역시 원래는 메이로쿠 잡지에 같이 실리기로 했던 것이었다. 이들은 메이로쿠샤를 통해 새로운 토론의 수평적 장을 만들어가고자 했다. 이 때 후쿠자와의 논의를 발단으로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메이지 정부에 들어가 관료로서 일해야 하는지, 아니면 학자는 정부에 들어가서는 안 되며 재야에서 비판하는 직분을 다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이 붙은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신체상에 따라 후쿠자와 논의를 비판하며 논쟁하고 있다는 점이다. 후쿠자와가 이야기한 내양과 외자, 즉 안으로의 양생과 밖으로부터의 자극이라는 힘의 균형으로서의 건강 논리를 가지고 사회를 설명하는 것이 그들 사이에 논쟁 지점이 되었던 것이다.
우선 가토 히로유키는 「후쿠자와 선생의 논의에 답한다(福澤先生の論に答う)」는 글에서 후쿠자와의 글을 ‘내양(內養)’과 ‘외자(外刺)’의 균형, 즉 정부 관리의 다스림[理治]과 그에 대한 인민의 자극 양자의 균형을 강조하면서도, 실은 바깥으로부터의 자극을 더 중요하게 본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가토는 내양과 외자라는 이분법적 대립 속에서 인민의 역할을 강조한 후쿠자와의 논의를 ‘리버럴’이라고 평가하며, 이러한 리버럴이 진보에 일익한 면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민권의 확장이 국권의 쇠약에 이를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이 글에서 국가유기체설을 주장한 프란츠(Konstantin Franz)의 『국가생리학입문』이란 책을 인용하며 리버럴당과 코뮤니스트당의 이론이 전혀 다르지만 공통된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 리버럴당이 교육, 통신, 우편 등 모든 공중에 관계된 것들을 민간에 위탁하고 정부는 이것들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해 국권을 감축시키고 민권을 확장시킨다면, 코뮤니스트당은 모든 산업을 모두 국가가 장악함으로써 국권을 확장시키고 민권을 감축시킨다. 이처럼 두 당은 서로 추구하는 방향은 반대이지만 모두 군권과 민권을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후쿠자와에게 정부와 인민 사이의 힘의 ‘균형’이 강조되었듯이 가토 역시 균형을 중시한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는 가토가 민권 확장과 국권의 쇠약을 ‘길항’ 관계, 즉 제로섬 게임으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국가 관리와 민간 관리, 국무(國務)와 민사(民事)를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가토는 후쿠자와의 ‘내양 경시’와 ‘외자 중시’가 리버럴에 빠질 우려가 있음을 경고한다. 가토는 지식인이 관리가 될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결국 본인의 재주와 학식에 의해 선택될 문제라며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논의에는 국권의 감축을 염려하며 정부 관리에 의한 지도의 필요성이 엿보인다. 결론만을 보면 어느 한 쪽에 편향되지 않을 것을 주장하는 점에서 양자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가토의 논의에서 결국 방점은 ‘외자’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반대하며, ‘내양’ 쪽에 찍혀 있다. 당시 국회설립에 대한 요청이 있는 상황에서 국권과 민권 간의 대립구도로 후쿠자와의 논의를 파악하고, 지나친 자극이 건강을 해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리 역시 「학자직분론의 평(学者職分論の評)」이라는 글에서 후쿠자와의 논의를 비판한다. 일국의 전체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인민과 정부가 양립해야 그 성공을 얻을 수 있다는 후쿠자와의 말을 인용하며, 민의 공무는 나라가 필요로 하는 바, 문사나 무사 모두 힘을 다해 종사해야 된다고 말한다. 이때 민이란 “그 직무를 이루는 권리와, 그 책무를 담당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자”로, 일본에 호적을 가진 자는 모두 일본국민으로 관리도, 귀족도, 평민도 모두 같은 민으로 이 책무를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부는 모든 백성[萬姓]의 정부로서, 민을 위해 세워지며, 민에 의거해서 세워지는 것”이다. 이처럼 모리는 이른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발상에 기초하고 있는데 여기서 정부는 인민이 구성한 것으로 후쿠자와 식으로 정부와 인민으로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모리는 후쿠자와처럼 인민과 정부, 재관과 사립을 수평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인민이란 일체로서 성립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그가 정체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전제군주정[王威無限]에 대해 이를 정권 일가의 소유로서, 정령이 임의로 행해지기 때문에 백성이 이를 좋아하지 않게 되어, 불화와 소란이 일어나게 됨을 지적한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그 권력을 제한해 정권을 다수로 나누게 되는데 이를 입헌군주제[定律王政] 혹은 공화민정(共和民政)이라 한다. 하지만 이때 입헌군주제나 공화민정은 권력 분립의 의도이지, 정부와 인민 양자를 내외대립 혹은 자충조화(刺衝調和) 시키는 논리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모리의 비판이었다. 그는 서양에서도 그러한 예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후쿠자와를 겨냥한다.
모리는 지식인과 정부의 역할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후쿠자와의 방식이 편향되기 쉬움을 지적하고, 후쿠자와와 같이 학자가 모두 관료의 길을 버리고 정부 바깥에서만 있게 되면 배우지 못한 자들만으로 관료가 구성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 정부를 밖에서 자극하는 것과 정부가 공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구별될 수 없으며 정치체를 구성하는 정부와 인민 역시 구별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이는 민선의원설립, 즉 서양의 제도를 본받아 일본에서도 국회를 개설하고자 했던 운동이 일어났을 때의 그의 시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정부’와 ‘민선의회’가 둘이 아님을 강조한다. 1874년에 제출된 「민선의원설립건백서」에서 “오늘날 민심이 흉흉해 상하가 서로 의심하며, 자칫하면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조짐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은 천하의 여론공의(輿論公議)가 옹색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에 대해, 모리는 이러한 책임을 현직의 정부관료에게 물어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건백서를 제출한 이들이 정부관료였을 때 만들었던 법과 지금 정부관료에서 물러나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민선의원설립 논의가 나온 배경에 현직에서 밀려난 이들의 정치적 의도가 있음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이어 모리는 “소위 ‘민선의원’이란 무엇인가. 정부가 인민에게 명령하여 세운 것인가, 아니면 정부에 신고하고 인민의 뜻에 따라 회의를 여는 것인지 혹은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세울 수 있는지” 묻는다. 건백서에서 주장한대로 민선의원을 설립한다 해도 이것이 정부가 인민을 위해 세운다는 뜻이라면 전적으로 정부의 의원이 되며, ‘민선(民選)’이라는 문자도 민간의 인물을 정부가 선택하여 설치하는 의원이라는 뜻이라면 결국 정부의 뜻에 따르는 것이 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모리는 건백서의 주장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정부와 민간이라는 명목상의 이분법적 분류를 깨뜨리고 있다. 이는 앞서 본 정부와 인민 사이의 내외대립 혹은 자충조화라는 논리에 대한 비판이었다.
건강한 사회란 어떠해야 하는가
보다 직접적인 신체 유비는 네덜란드의 첫 유학생이었던 니시 아마네와 쓰다 마미치의 글에서 보인다. 니시는 「비(非)학자직분론(非學者職分論)」이라는 제목으로 후쿠자와의 글에 반대하는 논의를 여섯 가지 들고 있다. 그 중에 후쿠자와의 신체 비유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정부는 인신의 생력과 같고, 인민은 외물의 자극과 같다라고 한다. 이 생력(生力)‧자충(刺衝)론은 논의 중의 맥락이라 해도 의문 없이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른바 자충이 적당하다면야 가능하다. 그러나 자충이 과격하다면 생력원기(生力元氣)가 근본부터 쇠약해짐을 틈타 다른 병이 발발할 우려가 있다. 예를 들면 눈병[患眼]이 있는 사람과 같다. 광선의 자충이 심하면 해로움이 적지 않다. 이른바 자충이라는 것도 인민의 개명진보가 점차 서게 되면, 즉 적절[適宜]하다면 괜찮다. 그러나 자충을 일으킨다면 아마 과격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대개 이것들이야말로 인위로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 자충의 기(機)가 맹동(萌動)하는데 이르면 어찌 할 수 없다. 즉 민간의 지기(志氣)가 떨치거나, 사회가 세워지거나 하면 지극히 가하다. 그러나 붕당(朋黨)이 흥한다거나 이어 소요가 시작되면 지극히 불가하다. 따라서 이른바 자극은 그 옮음을 얻으면 영미처럼 되지만, 만일 그 옳음을 얻지 못하고, 그 도를 잃는다면 프랑스나 스페인처럼 된다.
─니시 아마네(西周), 「비학자직분론(非學者職分論)」, 『메이로쿠잡지(明六雜誌)』2호
니시는 후쿠자와의 현상인식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상황을 무시한 채 펼치는 과격한 주장에는 반대한다. 후쿠자와의 신체 유비에 대해서도 외부의 자극이 지나칠 경우에 대해 경고한다. 즉 ‘자충’이 과격하다면 ‘생력원기(生力元氣)’가 근본부터 쇠약해져 다른 병이 생길 우려가 있다는 대목에서 보이듯이 내부의 생력원기와 외부의 자극 사이의 균형을 중시하면서도, 눈병이 심한 상태에서 외부의 강한 빛이나 감기가 심해져 악성병이 되는 경우를 들면서 외부의 지나친 자극을 주의해야한다고 말한다. 외부의 자극이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피부이완이나 감기의 예에서처럼 그것은 적절함을 필요로 한다.
정부의 생기를 진작시키는 기나염(幾那塩), 즉 당시의 강장제로 쓰이던 약 같은 것이 필요하지만 정부에서 일하는 학자가 없어서도 안 된다. 인민의 자충에 걸맞는 온도가 중요하지만, 학자의 사립도 또한 없어서는 안 된다. “사립을 주장해 그 생기를 기르지 않으면 예를 들면 피부이완의 사람이 혹한을 만난 것과 같이, 어느 정도 모한발열(冒寒發熱)이 변해서 악성병[疫癘]”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인민의 개명진보 상태를 무시하고 자극만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바라보는 점에서 후쿠자와의 시선과 동일하지만 니시는 아직 역사적으로 외부의 지나친 자극이 가지고 올 위험성을 더 우려한 것이다. 외부의 적당한 자극은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내부가 약한 상태에서 지나친 자극은 건강에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이 니시의 생각이었다.
쓰다 마미치(津田真道) 역시 「학자직분론의 평(學者職分論の評)」이라는 글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신체를 유비하면서 후쿠자와의 논의를 평하고 있다.
국가를 사람의 몸[人身]에 비유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정부는 생명력[生力]과 같고, 인민은 외물(外物)과 같다고 한다면, 비유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원래 인민을 몸 밖의 자극물[刺衝物]에 비유한다면, 국외의 것에 비유하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인민은 국내의 인민으로, 국내의 것이다. 생각건대 외물의 자극은 외국의 교제로 비교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정부는 정신과 같고, 인민은 몸체[体骸]와 같다. 생각건대 정신과 몸체가 상합(相合)해 인신을 이루고, 정부와 인민이 상합해 국가를 이룬다. 몸체가 있다 해도 정신이 없다면 죽은 사람이고, 정신만 있고 몸체가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또한 인민이 있어도 정부가 없다면 나라를 이룰 수 없다. 단지 정부만 있어도 인민이 없다면 더더욱 나라를 이룰 수 없다.
─쓰다 마미치(津田真道), 「학자직분론의 평(學者職分論の評)」, 『메이로쿠잡지(明六雜誌)』2호
여기서 쓰다는 후쿠자와의 논의를 인민을 국외의 것으로 파악했다고 비판한다. 쓰다는 국외의 것으로 설정해야 할 것으로, 인민의 정부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외국과의 교제를 들고 있다. 모리가 정치체에서 인민과 정부를 하나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와 마찬가지로, 쓰다는 인민과 정부를 하나의 신체로 파악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에 대항하여 외국과의 교제로 인해 생기는 자극을 외부로 상정한다.
또 하나 중요하게 보아야 할 점은 후쿠자와가 내부와 외부의 힘의 균형이라는 관점 속에서 정부와 인민의 관계를 파악한다면 쓰다는 정부와 인민의 관계를 정신과 몸체[体骸]의 관계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정신과 몸체가 상합해 사람의 몸[人身]을 이루는 것처럼, 정부와 인민 역시 상합해 국가를 이룬다는 주장은 일반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때 정신이 없이 몸체만 있어도, 몸체 없이 정신만 있어도 인신이라 할 수 없는 것처럼 국가 역시 정부와 인민 모두를 필요로 한다.
정신과 몸체의 관계로서 정부와 인민을 파악하는 방식은 흔히 생각하는 유기체적 발상과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쓰다의 신체 유비는 특이한 지점을 보인다. 그는 신체를 정신과 몸체로 나누지만, 몸체는 몸체 나름의 천연의 법칙을 따른다는 점을 강조한다. “몸체는 단지 정신의 명령대로 이에 복종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몸체에는 몸체 천연의 확률이 있다. 이 확률을 넘어 굳이 몸체를 사역한다면 정신도 따라서 지치고, 인신이 쇠약해지고, 결국 사망에 이른다. 만약 이 천연의 확률에 따라 몸체를 사역한다면 신체는 점점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쓰다의 논리대로라면 몸체는 정신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천연의 확률’을 지키지 않고 정신이 몸체를 사역시킨다면 정신도 수고로워지고 인신이 쇠약해진다. 이러한 논의는 정신인 정부의 명령과 몸체인 인민의 관계를 지칭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쓰다는 ‘인민자유자주’의 설을 주장해 정부의 명령이라 해도 무리한 것은 거절할 권리가 있으며, ‘자유자주의 기상’을 인민이 도야할 것을 요청한다.
쓰다는 후쿠자와식의 인민과 정부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넘어 외국과의 관계 속에서 정치체를 사유하는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이때 정치체는 정부=정신, 인민=몸체로 구성되는 인신으로서 다른 인신인 정치체와 교제한다.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한 쪽에 속박되지 않으며 흡사 수평적 심신관계의 모습을 띈다. 인민의 정신적 자립을 강조하는 것은 후쿠자와와 동일하지만, 정치체의 내부와 외부를 보다 확장해 외국과의 관계를 시야에 넣고 있다. 쓰다는 다른 글에서 군주를 뇌로, 백관유사(百官有司)를 신경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국가는 예를 들면 인신(人身)과 같다. 군주는 뇌이다. 백관유사(百官有司)는 신경, 오관백체(五官百體)이다. 뇌와 신경이 감응, 착란하여 오관백체가 그 쓰임을 그르치면 이를 풍전(瘋癲)이라 한다. 시녀[婦寺], 환관이 권(權)을 농단하고 혹은 대신이 발호(跋扈)하고 병졸이 강해져서 정령(政令)이 그 장소를 잃어, 백관유사가 그 직분을 그르친 때는 국체(國體)가 궤란(潰亂), 국가의 병환이 야유(夜遊), 풍전의 증세가 됨이 어찌 이상하겠는가. 이를 칭해 괴국(怪國)이라 한다.
─쓰다 마미치(津田真道), 「괴설(怪說)」, 『메이로쿠잡지(明六雜誌)』25호
학자직분론 비판에서 정부를 정신, 인민을 몸체에 비유한 것과 유사하게 뇌를 군주로, 몸을 백관유사로 비유한다. 이때 뇌와 신경의 관계가 착란을 일으키면 풍전, 즉 간질의 상태에 이르러 신체에서 괴질이 되듯 나라에서도 백관유사들이 군주를 어지럽히면 괴상한 나라[怪國]가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뇌와 신경이라는 근대적 신체 발상은 그가 유학을 통해 배웠는지는 불분명하나 앞서 정신과 몸체가 각각의 규칙이 있다고 말한 것을 고려할 때 이 신경의 역할은 중요하다. 이는 단지 뇌의 역할로서 군주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과 몸체를 이어주는 신경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군과 민에 관한 또 다른 글인 「본은 하나이지 않다는 론(本は一つにあらざる論)」에서도 군과 민의 관계는 전통적인 발상과 다르다. 그는 만물이 하나의 근원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원소들의 결합임을 강조한다. 이는 화학에서의 원소나 물리에서의 역학 등 새로운 학문을 통해 발견된 것이었다. 그는 화학에서 60 여개의 원질이 다양하게 결합해 천만의 물이 된다고 설명하면서, 인간 역시 혼과 몸 두 가지의 본(本)으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이때 혼은 어떠한 것인지 알기 어렵지만 몸은 피, 육, 골, 혈, 발(髮), 조(爪) 등 많은 것으로 구별되며, 또한 그 육, 골 등의 원질을 분석하면 수십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처럼 그에게 신체는 다양한 원소로 이뤄진 결합물로 혼과 몸 두 가지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정치적 해석으로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의 본(本)은 군(君) 단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나라의 본은 천만의 창생(蒼生)이다. 나라의 본이 민이라면 군은 말(末)임이 분명하다. 비유하면 집의 본은 주춧돌[礎]로 동량(棟梁)은 말인 것과 같다. 군은 말로서 본이 아니라고 해도 존숭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쓰다 마미치(津田真道), 「본은 하나이지 않다는 론(本は一つにあらざる論)」, 『메이로쿠잡지(明六雜誌)』8호
따라서 앞서 본 정부와 인민의 관계 역시 쓰다의 이 글에 비추어 본다면 단순히 복종관계로서 결합한 것이 아니다. 화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라에서도 본은 단지 하나가 아니라 여럿으로 구성된다. 그가 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와 인민은 각각 천연의 확률로서 존재하는 원리가 다르며 오히려 본은 민이라는 식으로 관계를 뒤집고 있다. 이는 민의의 존중과 의회주의 도입의 필요성을 연결하는 그의 논리와 이어진다.
메이로쿠샤 회원들 간의 논쟁에서 핵심은 어떻게 새로운 엘리트들을 충원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것은 정부 대 민간의 구도로 나뉘어져 진행되었다. 여기서 후쿠자와의 관료제에 대한 비판은 밀이나 기조, 토크빌의 영향 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밀이나 기조의 관점이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작은 정부론 차원이었다면 후쿠자와에게 문제는 국과 민 사이의 균형이었다는 점에서 그것을 전적으로 같은 논의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신체론의 자장 속에서 어떠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가를 논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균형으로서 건강 개념으로 사회를 파악하는 후쿠자와 논의에 가토와 니시 등은 지나친 민권의 강조로 인한 우려를 표명한다. 하지만 후쿠자와는 이후 가토와 니시의 공포에 대해 정부 바깥의 인민이 정부와 경쟁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소인(小人)의 이론이라고 일축하며 민간의 사람도 정부의 사람도 지위가 다를 뿐 함께 도와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이 아니라 동료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이들 사상가들에게 정부와 인민이라는 관계는 각각 특이한 신체유비로 나타난다. 후쿠자와의 신체가 안과 밖의 균형관계로서 표현되었다면, 가토에게 그것은 안과 밖의 길항관계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 모리는 정부와 인민을 하나의 신체로 파악하며, 니시는 양자의 관계를 수평구도로서 보는 데는 동일하지만 신체가 처한 조건이 각각 다르듯 정부와 민간의 관계 역시 역사적, 구체적 상황이 고려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쓰다는 정부를 머리, 인민을 몸으로 보면서 신체 안으로 끌어안아 밖을 외국으로 보는 관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신체는 머리와 몸이 각각의 규칙 속에서 움직이며 몸의 독자적 방식이 강조된다. 이처럼 메이로쿠잡지에서 국가에 대한 신체 유비는 우리가 아는 상식과 다른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흔히 국가에 대한 신체 유비는 서양의 유기체적 사유가 들어오면서 그것으로 정리되었던 것이라고 이해되지만, 이미 전통적인 발상 속에서 이미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상황들을 해석하는 은유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메이로쿠 지식인들은 정부와 인민 사이의 균형을 중시한다는 공통적인 기반을 공유하면서도 저마다 미묘하게 다른 관점에서 신체은유를 활용해 사회를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_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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