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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치1/몸과정치2

후쿠자와 유키치와 일본이라는 신체 上

by 북드라망 2018. 5. 10.

후쿠자와 유키치와 일본이라는 신체

  

 

세계의 창생(蒼生)이 많다 하더라도,

몸에 한 점의 아픈 곳도 없고 태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조금의 병도 앓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결코 있을 수 없다.

병리를 가지고 논한다면,

금세(今世)의 사람은 설령 건강한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병을 지닌 건강[帶患健康]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도 역시 사람과 같다.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의 개략』

 

 

건강의 개념사


앞에서 보았듯이 후쿠자와가 신체적 유비를 통해 건강한 사회상을 도출하는 작업을 했다면, 후쿠자와의 정치적 발언 이외에도 그의 건강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건강(健康)’이라는 단어는 언제부터 쓰인 것일까? 당연한 말이지만 건강이란 개념의 의미 역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쓰인다. 단어 그 자체만 보자면 근대에 들어서 새롭게 생겨난 번역어였다. 에도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의 ‘건강’과 같은 뜻은 ‘丈夫’나 ‘健やか’ 등으로 표현되었다. 건강이란 말이 처음으로 번역된 것은 난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이 말이 대중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시기 이후, 다름 아닌 후쿠자와 유키치에 의해서였다.



후쿠자와는 당시 구체적으로 개념화되지 않았던 ‘健康’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health 개념을 받아들인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물론 후쿠자와가 health의 역어로서 ‘건강’이라는 말이 처음부터 채택한 것은 아니었다. 사전 형식의 『증정화영통어(增訂華英通語)』(1860)에서 그는 ‘health’에 해당하는 번역어란에 ‘精神’이라고만 기재하고 있다. 이는 그가 ‘건강’이라는 말이나 ‘health’의 의미를 몰라서였다기보다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 건강이라는 말이 아직 친근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후쿠자와가 최초로 ‘건강’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서양사정』(1866)에서 부터였다. 이 책에서 그는 ‘학교’ 항목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면서 얻은 울분을 해소하여 마음을 개운하게 하여 건강을 보전한다고 하며 ‘건강’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이때까지 건강이란 단순히 정신적 혹은 신체적 상태의 편안함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 본 바와 같이 『학문의 권장』(1871)에서는 건강을 ‘힘의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독특한 발상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균형의 논리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으로 인해 내부의 생명력이 강해진다는 논리였다. 외부의 자극으로 안의 생명력을 강화시킨다는 논리는 서양의 건강 논리와 닮아 있다.

물론 주지하듯이 전통의학에 대한 후쿠자와의 비판은 그의 저작 곳곳에서 보이는데, 이는 그가 서양의학을 배우면서 경험한 내용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서양 학문의 시작은 오사카에 있는 서양의학을 가리키던 기숙학교 오가타 주쿠(緖方塾)에서였다. 그는 의학이나 건강에 관한 글을 많이 남기고 있는데, 전통의학과 서양의학을 대비하며 전통의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후쿠자와에게 고류의 의도(醫道)와 서양의 의도는 일본의 범선과 서양의 기선으로 비유되기도 하는데, 멀리 항해하는데 무엇을 탈지는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묻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후쿠자와에게 전통적 신체에 대한 인식은 전부 사라졌다고 보아야 할까. 그는 『문명론의 개략』(1875)에서 ‘십전건강(十全健康)’과 ‘대환건강(帶患健康)’을 구분한다.

지금의 세계를 향해 문명의 극도(極度)를 촉구하는 것은 이를 비유하면 세상에 완전히 건강한[十全健康] 사람을 구하는 것과 같다. 세계의 창생(蒼生)이 많다 하더라도, 몸에 한 점의 아픈 곳도 없고 태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조금의 병도 앓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결코 있을 수 없다. 병리를 가지고 논한다면, 금세(今世)의 사람은 설령 건강한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병을 지닌 건강[帶患健康]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도 역시 사람과 같다. 설령 문명이라 부른다 하더라도 필시 허다한 결점이 없을 수 없다.

─후쿠자와 유키치, 1962,『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槪略)』, 岩波書店, 55쪽


여기서 보듯 그에게 건강이란 완전무결한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물론 이 글의 핵심은 문명 역시 대환건강, 즉 병을 지닌 건강처럼 결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것임을 지적하는 데 있다. 하지만 후쿠자와에게 세상에 완전한 건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건강이란 병을 지닌 채 균형을 유지하는 사고가 존재함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보다 적극적으로 서양의 의학 개념을 받아들이는 후기 저술인 「생리학의 대사」(1897)에서 보이는 건강 개념과 대비된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아는 것이 인신생리학의 제일주의이다. 백과의 학술이 종종 다양해서 그 근원 경중이 같지 않은 중에서도, 사람으로서 스스로 자신의 몸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물질을 알아 그 구조조직을 알아 그 운동작용을 아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가령 전문의 학자가 아니더라도 각자 몸을 보호하기 위한 대개의 소양 없이는 안 된다. 사람이 취급하는 일체의 제도구에서도, 그 성질과 그 작동을 알지 않으면 그릇되이 이를 손상하는 일이 많다. 하물며 자신의 신체에 있어서랴. 이를 소중히 해 손상시키지 않고자 한다면 우선 스스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인신의 구조조직을 보이는 해부학(아나토미)에서, 그 작동을 설명하는 것을 생리학(피지올로지)라 하고, 이 신체를 건강히 보존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건전학(하이진)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후쿠자와 유키치 전집(福澤諭吉全集)』11권, 1958, 195쪽

이러한 근대적 건강법은 대환건강이라는 사고방식과는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다. 즉 건강을 완전한 상태로, 질병을 불완전한 상태로서가 아니라, 건강이라 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이 불완전성 속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사고다. 이것이 전통 의학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건강에 대한 일반적 이해와는 다른 것은 분명하다. 내외의 균형이라는 기 중심의 사고관은 국소적 병리이론이나 실증적 건강관과 전적으로 다르다고 할 때, 후쿠자와의 건강관은 근대적 방식의 건강에 대한 이해와는 다르게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후쿠자와의 전통의학에 대한 비판의 초점은 그것이 실증적이지 않다는 점이었지, 전통의학의 기본관념에 대한 전적인 부정은 아니었다.

  

오가타 고안(緒方洪庵)의 데키주쿠(適塾)에서 배운 이래로 후쿠자와는 일생 동안 의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체나 건강의 비유를 즐겨 쓰곤 했는데 이러한 그의 의학적 사고가 정치사상과 무관하다고만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좀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메이지 일본의 사상가들 중 많은 이들이 의학 공부로부터 시작하거나, 그들의 부모가 서양의였던 점은 서구의학이라는 새로운 사상과 일본의 근대가 처음부터 연계되어 진행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후쿠자와는 이러한 신체에 대한 인식을 통해 정치적 사유를 어떻게 전개하고 있는지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국가라는 신체


그가 『문명론의 개략』에서 ‘국체’를 강조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서 국체(國體)의 체란 ‘합체’를 뜻하며 ‘체제’를 뜻한다. 국체를 통해 자타가 구별되며 한 정부 하에서 자치를 이루는 것으로 표상된다. 이는 서양의 Nationality의 번역어로, 가장 유력한 원천은 같은 종족의 인민이 역사의 변천을 함께 겪고 회고의 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따라서 국체의 존망은 그 나라의 백성이 정권을 잃느냐 잃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국체 개념이 다른 여러 개념들과 혼동되어 이해되어 왔음을 비판한다. 즉 국체란 political legitimation을 의미하는 정통(政統)과도, 임금의 자리를 부자의 핏줄로서 이어가는 line을 의미하는 혈통과도 다른 Nationality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오직 혈통에만 관심을 갖고 국체를 경시하는 폐단이 있음을 지적하고, 국체가 나라의 근본으로, 국체를 보전한다는 것은 제 나라의 정권을 잃지 않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절대 사라질 수 없는 ‘생명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후쿠자와는 국체를 사람의 신체에 비유한다.

이를 인신(人身)에 비유하자면 국체는 신체와 같고 황통은 눈[眼]과 같다. 눈빛을 보면 그 신체가 죽지 않았음을 징험할 수는 있다 해도, 일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눈에만 주의하고 전체의 생력(生力)은 돌이켜 보지 않는다는 도리는 없다. 전체의 생력에 쇠약한 바가 있으면 그 눈도 또한 자연히 빛을 잃게 되는 법이다. 혹은 심지어는 전체는 이미 죽어서 생력의 흔적조차 없는데도 오직 눈만 떠있음을 보고 생체(生體)로 오인하는 수도 없지 않다.

─후쿠자와 유키치, 1962, 『문명론의 개략』, 42쪽

여기서 국체는 직접적으로 신체에 비유되며 ‘전체의 생명력[生力]’이라는 단어로 설명된다. 분명히 후쿠자와의 비판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황통사로서 일본사다. 후쿠자와는 ‘황통연면(皇統連綿)’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 독립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황통이 이어져 온 것이지 그 역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즉 황통연면은 독립의 징후일 뿐, 그 원인은 아니었다. 이는 후기 미토학이나 국학에서의 국체론 논리를 완전히 뒤집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국학에서 주장하는 국체론이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모델이라면 후쿠자와의 국체론은 그것을 황통과 구별하여 시공간적으로 영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논리로 제기하고 있다. 이로써 하나로 만들어 발전시켜 영구히 보전해야 할 가치로서 국체가 등장하고, 이는 전체 신체의 건강으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이때의 눈의 역할은 무엇인가. 황통의 눈은 신체의 건강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전신(인민)의 활력이 쇠약해지면 눈(황통)도 자연히 빛을 잃게 된다. 후쿠자와에게 국체는 기존의 혈통을 중시하는 황통과도 구별되며, 정치적 정당성을 의미하는 정통과도 구별되는 것으로, 무형적인 것이자 동시에 무한적인 것이었다. 국체라는 신체에서 황통은 건강 상태를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기능을 담당하기는 하지만, 이는 네이션 전체의 생명력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후쿠자와는 뒤에서 이 내용을 다시 한 번 보충하고 있다.

감히 묻건대, 천하의 인사들이여, 충의 이외는 괘념할 것이 없단 말인가? 충의도 물론 옳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충을 하려면 대충을 하라. 연면한 황통을 보호하기를 원한다면 그 연면함에 빛을 더하여 보호하라. 국체가 단단하지 않으면 혈통에 빛이 있을 수 없다. 앞에서도 비유한 바와 같이 온몸에 생력(生力)이 없으면 눈도 빛을 잃는 법이다. 눈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신체의 건강에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안약을 사용한다고 해서 눈의 빛을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서양의 문명은 일본의 국체를 공고히 하고 아울러 그 황통을 더 빛낼 수 있는 유일무이의 것이므로, 이를 섭취하기에 주저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단연코 서양의 문명을 취함이 마땅하다.

─후쿠자와 유키치, 1962, 『문명론의 개략』, 44쪽

이를테면 황통이 건강해야 국체 역시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이 소위 국체론자들의 믿음이었다면 후쿠자와의 논리는 그럴 가능성을 배제한다. 온몸에 활력이 없으면 눈이 빛을 잃는 것처럼 국체가 단단하지 않으면 황통의 빛 또한 있을 수 없다. 물론 후쿠자와가 국체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후쿠자와의 논의의 핵심은 국체가 문명과 병립가능하다고 설득하는 데 있었다. 눈의 건강은 단지 안약을 사용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신체 전체의 건강에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이처럼 후쿠자와는 근대 일본에서 충성대상을 천황 일인에서 국가 그 자체로 전이시키고자 한다. 이것이 다만 황통으로서 눈과 구별해 신체 전체의 건강을 말한 이유였다. 여기서 탄생하는 것이 ‘국체’, 국가라는 신체의 개념이었다. 그렇다면 국가라는 신체는 어떻게 건강해 지는가? 그 답을 후쿠자와에게서 찾아보자.

 

글_김태진

 ※ 이 글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건강’을 읽는다: 메이지 일본의 정치사상과 신체관」, 『한국일어일문학회』 제100집, 2017년 3월에 실린 글입니다. 참고문헌이나 각주는 원글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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