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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의 저자 안도균 인터뷰

by 북드라망 2017. 9. 18.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의 저 안도균 인터뷰




1. 최근 사주명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주명리에 관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었는데요. 이 책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가 여타의 명리학 책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사주명리를 운명에 개입하는 도구로 쓴다는 점입니다. 대개는 운명을 맞히기 위해서 사주를 봅니다. 그러나 사주명리는 운명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어떤 아우라 혹은 어렴풋한 성향을 짐작할 뿐이죠. 그건 운명이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사주명리학계에서도 대체로 결정된 운명은 없다는 쪽에 동조하긴 합니다. 그렇다면 운명을 정확하게 맞힐 수도 없지요. 운명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운명의 결과를 맞출 수 있습니까? 하지만 사주명리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여전히 ‘어떻게 하면 정확하게 맞힐까’로 향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러한 방향성을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사주로 그의 운명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서사를 사주와 연결하는 겁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시공간의 특성이 그의 몸에 깊은 흔적을 남기는데 그 성향을 특정 문자로 표현합니다. 그걸 사주팔자라고 하죠. 그런데 그 문자는 일종의 기호예요. 하늘이 내려준 계시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문자기호일 뿐이죠. 사주의 해석이란 이 기호의 의미를 확장해 가면서 그 사람의 운명에 접근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주를 맞히기 위한 방편으로 쓸 때는 이런 확장성이 억압됩니다. 틀리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능한 의미들 가운데 그 사람에게만 맞는 특정 해석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운명을 규정하고 상대를 그 규정의 틀 안에 가둡니다. 또한 거기에는 어떤 권력관계가 작동합니다. ‘사제권력’이랄까요. 사실 운명론에는 어떤 음적(陰的)인 힘이 있습니다. 그건 표면에선 알 수 없는 심연의 흐름들을 읽을 수 있는 힘입니다. 상담가는 그것으로 기를 죽이려 하고, 내담자는 그 특별한 힘에 의탁합니다. 저는 그런 규정과 권력에 저항하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그 해석이 특정한 규정성에서 벗어나 의미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집니다. 또한 사주를 매번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존재를 새롭게 규정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규정은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킵니다. 이것이 사주명리로 운명에 개입하는 첫번째 방법입니다. 두번째 방법은 미래에 개입하는 것인데 이것은 설명이 길어질 수 있어서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이 책에서 자기 운명에 개입하기 위해 사주명리를 배우고, 사용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 주세요. 운명을 자기가 바꿀 수 있다는 뜻인가요? 

 

자기를 새롭게 규정한다면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삶의 태도가 바뀌면 운명이 바뀌겠죠.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바뀔지는 모릅니다. 운명에 개입하다고 하면 흔히 자기의 욕망대로 특정한 결과를 이루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면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거기엔 많은 변수가 있어서 결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욕망이 특정 결과에 집착되어 있으면 삶의 과정은 지옥이 됩니다. 예컨대, 글을 쓰고 싶다와 훌륭한 작가가 되겠다는 욕망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글을 쓰고 있는 현장을 기쁨으로 채울 수 있지만, 후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결과에 늘 노심초사하고 좌절합니다. 저의 사주명리는 전자의 욕망을 지지합니다. 이러한 욕망은 특정 미래를 염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향해 미끄러집니다. 그러면서 욕망은 우발적인 변수의 리듬을 타면서 또 다른 욕망을 낳습니다. 1번 질문에서 미처 답하지 못한 두번째 개입이 여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즉, 사주의 해석이 새롭게 일어나는 낯선 욕망에 명분을 주고 계산되지 않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독려합니다. 이것이 사주로 미래에 개입하는 방법입니다. 




욕망이 바뀌면 존재가 바뀝니다. 이때 또 다시 자기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다시 첫번째 개입으로 존재를 재구성해야 하겠죠. 이런 식으로 사주는 운명에 개입하게 됩니다. 특정한 결과를 얻으려는 기존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직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욕망의 흐름에 길을 내어주는 것이죠. 

  

3. 자기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해석할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닫힌 해석을 조심해야 합니다. 존재에 대한 해석은 항상 열려져 있어요. 사주명리는 존재의 운명을 해석하는 여러 가지 방법론 중의 하납니다. 단적인 측면만 보고 운명을 단정해선 안 됩니다. 특히 특정인의 해석에 머무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상담을 받는 것보다는 조금 덜 의존적이긴 하지만, 책을 통해 운명론을 스스로 접하는 경우도 특별해 보이는 해석에 자신의 운명을 의탁하게 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운명론에 관한 대부분의 책들은 저자의 해석을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운명론을 스스로 터득한다 해도 결국 저자의 세계관 안에 갇히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주명리는 신비한 계명이나 진리가 아니라 존재의 개별적 서사에 유연하게 적용되는 물렁물렁한 기호입니다. 해석도 존재도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걸 전제해야 하겠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개인의 운명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는 겁니다. 즉, 운명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시대와 연결된 대중적 욕망이나 내면화된 권력 등에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사주 해석 역시 그런 구조적 배경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다양한 공부와 연결시켜야 하겠죠. 특히 인문학적인 지식은 그런 종합적인 해석에 매우 유리하게 응용될 수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를 읽게 될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그 말은 운명이 잘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그건 사주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쌓여 왔던 습관 때문입니다. 생명은 생생불식하는 변화의 동력을 가지고 있는데, 오래 묵은 습관은 생명력을 약화시킵니다. 습관적인 감정과 사유, 그로 인해 반복되는 갈등과 쾌락의 관계 양식은 번뇌와 질병을 일으킵니다. 그 지루한 굴레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선 자기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단을 할 수 있다면 처방은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문제가 벌어지는 과정을 추적할 때는 그 과정을 개선하고 싶은 어떤 실천의 욕망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실천이 바로 처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가 그런 진단과 처방을 위한 방편이 되길 바랍니다. 운명을 바꾸는 것은 결국 습관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습관을 바꾸는 것은 산을 옮기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강한 의지를 사용한다 해도 결국 기존의 습관이 의도한 세계 안에서 돌고 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합니다. 위에서 ‘존재의 재구성’이라든지, ‘새로운 욕망에 길을 내는 것’을 언급한 이유가 바로 그런 필요에 의해섭니다. 자기의 오래된 습관을 바꾸기 위한 지혜의 통치술로서의 사주명리, 그것이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가 의도하는 운명의 정치학입니다. 그 정치적 주체가 되는 길 위를 꿋꿋이 걸어가시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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