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탈바꿈, 그 가능성에 대하여 #3
- 두 번째 수칙, 벗어나는 자만이 존재를 바꾼다
대붕이 구만리까지 날아간 까닭은?
대붕은 왜 힘겹게 9만 리까지 날아올라 남녘 바다로 가려하는가? 남녘 바다에 무엇이 있기에 무릅쓰고 가는가?
매미와 비둘기가 그를 비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있는 힘껏 날아올라 느릅나무나 다목나무 [가지]에 머무르지만 때론 거기에도 이르지 못해서 땅바닥에 동댕이쳐진다. [그런데] 어째서 9만리나 올라가 남쪽으로 가려고 하는가?"
교외의 들판에 나가는 사람은 세 끼니의 식사만으로 돌아와도 아직 배가 부르고, 백리 길을 가는 사람은 하룻밤 걸려 곡식을 찧어야 하고, 천리 길을 가는 사람은 석 달 동안 식량을 모아야 한다. 그러니 이 조그만 날짐승들이 또한 어찌 알겠는가?
구만리까지 날아 남녘 바다로 가려는 대붕을 보고 매미와 비둘기는 비웃는다. 조금만 날아도 힘든데 9만 리를 날아 남쪽으로 가서 뭐하냐고? 매미와 비둘기가 보기엔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다 바치는 꼴이다. 북명도 바다, 남명도 바다라면 무엇을 보려고, 무엇을 위해서 자기 존재를 다 던지는가? 나무 꼭대기에 오르는 것도 힘든데, 무엇을 위해 그 멀리까지 날아가는가? 이 조그만 벌레와 새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붕의 행동은 우습기 짝이 없다. 이들은 날아오르는 일 자체가 힘겨운 존재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비추어 대붕의 비상을 무모하다고 비웃는 것이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왜 다른 세계를 넘보는 걸까, 삶에 안주하는 매미, 새들에게 대붕의 비상은 쓸모없는 도전으로 보인다.
그런데 장자는 이 조그만 벌레와 새들이 대붕의 뜻을 아느냐고 되묻는다. 하루 길을 가는 사람과 백리 길을 가는 사람과 천리 길을 가는 사람들은 식량을 준비하는 시간이 다르다.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은 딱 그 만큼만 날아다닐 준비를 하지만, 구만리 너머를 날아가는 대붕은 구만리를 날아갈 준비를 한다. 그 노력과 의지와 배포가 얼마나 다른지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조그만 벌레와 새들, 혹은 메추라기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소요유」에 제시된 곤붕 우화의 다른 버전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가는 길에 따라 식량을 준비하는 시간도 다르다
메추라기가 이것을 비웃으며 말하기를 ‘저것은 도대체 어디로 가겠다고 하는 것인가? 나는 힘껏 날아올라도 몇 길을 지나지 않고 도로 내려와 쑥대밭 사이를 날아다닐 뿐이다. 이것이 또한 내가 날아다닐 수 있는 최상의 경지다. 그런데 저것은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다.
그러므로 그 아는 것이 벼슬자리 하나 채울 만한 사람, 그 행실이 마을 하나를 돌볼 만한 사람, 그 능력(덕)이 임금 하나를 섬길만하여 한 나라를 맡을 만한 사람들, 이들이 그 스스로를 보는 것은 이 메추라기와 같다.
곤붕 우화의 다른 버전은 신하 극(棘)이 탕임금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곤붕의 우화는 장자의 창작이 아니라 구전되던 설화였음을 알 수 있다. 극 버전의 우화에서 대붕을 비웃는 상대는 메추라기다. 이 버전에서 중요한 부분은 메추라기의 말 뒤에 나오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 만족한다. 사람들은 관리가 될 정도의 지식, 마을 하나를 돌볼 정도의 행실, 한 나라를 다스릴 정도의 능력에 만족한다. 사람들은 이 너머를 보지 않는다. 이 당시로 사람들은 가신이 되거나, 대부가 되거나, 제후가 되는 일에 몰두하고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이런 정도의 뜻으로 세계를 품은 듯이 자부하며 다른 세상을 볼 줄 몰랐다. 자기가 사는 국가가 전부인 줄 알고, 그 이웃 나라조차 볼 줄 몰랐으며, 더구나 인간세계 너머의 다른 존재들의 세계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장자는 인간적 시각보다는 우주적인 안목을 요구한다. 인간들의 권력다툼이나 재산다툼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로부터 시선을 돌려 더 멀리 바라보기를 권하고 있다.
장자는 곤붕의 우화를 통해 인간들이 대붕을 비웃는 작은 새나 벌레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우쳐준다. 인간 세상뿐 아니라 만물 각각은 모두 다 갇혀있다. 『장자』<추수>편에서 북해약은 황하의 신 하백에 말한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는 것은 살고 있는 곳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이오. 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대해 말해도 별 수 없는 것은 살고 있는 철(계절)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오. 한 가지 재주뿐인 사람에게 도에 대해 말해도 통하지 않는 것은 교육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오." 각 존재들은 인지능력의 한계와 상식의 편협함에 갇혀 있으면서 세상을 다 안다고 자신한다. 자신이 속한 세계만 보면서 세상을 다 보았고, 자기가 속한 세계만 알면서 세상을 다 안다고 말한다. 그 이상을 보려하지 않을 뿐더러, 그 이상을 보는 자들을 비웃고 경계한다. 자신의 입장에서 만물을 평가하고 재단하면서 자신의 입장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우물 안 개구리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아는가? 조균[아침에 피는 버섯]은 밤과 새벽을 모르고 씽씽매미는 봄, 가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짧은 수명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라는 나무가 있으니 오백 년 동안은 봄이고 또 5백년 동안은 가을이다. 옛날 상고에 대춘이란 나무가 있었으니 8천년 동안은 봄이고 다시 팔천년 동안은 가을이었다. 그런데 [불과 7백년 산] 팽조는 지금 장수한 사람으로 아주 유명하여 세상 사람들이 이에 견주려 한다.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늘 나를 기준으로 만물을 평가한다. 나보다 크면 크고, 작으면 작다. 나보다 오래살면 장수한 것이고 나보다 적게 살면 요절한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만, 인간의 정량(情量)에서만(원중랑, 역주 원중랑집 5, 廣莊, 323-326쪽), 인간의 시력으로만 만물을 본다. 그러나 만물은 무한히 크고 무한히 작다. 인간이 지각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영역 밖에는 수없이 많은 만물들이 무한히 크고 무한히 작은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의 수량에는 끝이 없고 시간은 멈춤이 없으며 사물의 운명도 일정함이 없고 처음과 끝은 되풀이되어 집착이 없다."(추수편) 이런 입장에 서면 팽조도 요절한 것이 되고, 조균도 씽씽매미도 장수한 것이 된다.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물은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기준이나 원리는 있을 수 없다. 무수히 많은 기준, 원칙이 상황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진다. 배치에 따라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절대 중심은 없고, 중심은 움직일 뿐이다.
대붕의 착지 : 지상으로의 회귀
대붕은 절대 중심이 없음을 깨달은 존재다. 그래서 북해에 갇히지 않고, 북해의 지상에도 갇히지 않는다. 하늘로 비상함으로써 지상의 한계를 벗어난다. 그런데 왜 비상한 후 다시 남해의 지상으로 내려온 것일까? 북해와 남해는 같은 바다라는 점에서 그렇게 다를까? 대붕이 심연에서 튀어 올라 하늘로 올라간 후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걸 보면 무모하다는 의심이 살짝 든다. 남쪽으로 간 대붕은 북쪽 바다에서의 대붕과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 알 수가 없다. 존재가 탈바꿈되는 전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가?
아지랑이와 먼지, 이는 [천지간] 살아있는 생물들이 서로 입김을 내뿜어 생기는 현상이다. 하늘의 푸르고 푸른빛은 제 빛깔일까, [아니면] 멀리 떨어져서 끝없이 멀고멀기 때문일까? 붕이 아래를 내려다볼 때에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대붕이 곤이었을 때, 곤은 비상을 꿈꿨다. 저 하늘은 이 심연과 지상과는 다른 세계일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대붕은 하늘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다. 초월하지 않고, 지상으로 회귀한다. 우리는 곤이 대붕이 된 큰 뜻은 지상을 완벽하게 떠나는 초월에 있다고 점친다. 변화는 늘 일상을 벗어나는 데서 일어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붕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다시 내려온다. 왜 그랬을까?
대붕이 지상으로 회귀하다
대붕이 구만리 하늘로 올라가 지상을 내려다보니 지상에서 보았던 하늘은 하늘에서 보는 지상과 다르지 않다. 지상은 만물이 뿜어내는 숨기운으로 가득 차있고 아득하게 멀어 푸르고 푸르다. 하늘은 푸르고 땅은 누런 줄 알았더니, 하늘의 입장에서 볼 때 지상이 오히려 아득하고 푸르다. 하늘에 오른 자만이 알 수 있는 경지다. 지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존재들에게 하늘은 지상과 다른 세계다. 대붕은 하늘과 지상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하늘로 비상해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초월자의 관점에 서자 만물이 모두 같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대붕은 하늘에 머무르지도 않고, 북녘으로 다시 내려가지도 않는다. 제3의 길을 선택한다. 초월자로 머무르지 않고 남쪽으로 내려온다. 세상을 떠났다가 다른 세상으로 내려온 것이다. 남쪽의 대붕은 더 이상 북쪽에 살던 대붕이 아니다. 지상과 하늘이 다르다고 인지했던 대붕에서 지상과 하늘은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한 대붕으로 변화한 것이다.
대붕은 진정 깨달은 자다. 대붕은 하늘로 비상한 후 북쪽 바다로부터도 하늘로부터도 자유롭다. 하늘과 지상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지상을 보면 지상이 높다. 지상에서 하늘을 보면 하늘이 높다. 지상에 갇혀있을 때는 절대적으로 하늘이 높았다. 하늘에 올라 지상으로 내려다보고 나서야 깨닫는다. 절대 높음은 없다. 그러니 절대 중심, 절대 진리는 없다. 누가 더 높고 낮은지는 하늘의 입장에서만, 지상의 입장에서만 따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과 지상은 똑같이 높거나 똑같이 낮다. 그러니 지상의 입장만 고수해서도 안 되고 하늘의 입장만 고수해서도 안 된다. 지상의 입장도, 하늘의 입장도 뛰어넘어 만물 저마다의 생명력이 활발발해지는 세계로 착륙한다. 그것이 남명 즉 천지(天池)다. 하늘대로 혹은 자연대로 살 수 있는 연못이다. 대붕은 다시 지상으로 착지한다. 일상을 뛰어넘어 초월했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북명의 일상으로부터 탈출하여 남명의 일상으로 돌아온 대붕은 분명 다른 존재다. 북명에서와 똑같이 먹고 자는 존재지만, 남명에서 먹고 자는 대붕은 차원이 다르다.
급기야는 구만리 창천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가 된다. 구만리 저 위에서 내려다 본 지상은 하늘처럼 아득하고 파랬다. 심연까지 내려갔다 구만리 고공까지 솟구쳐 오른 자. 심연도 지상도 고공도 모두 경험한 자만이 이 세상의 모든 제도와 진리와 가치와 봉상스를 회의하고 여기에 싸움을 걸며, 자신의 생명과 본성에 유익하고 유용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 니체가 그랬듯이 대붕은 고독하다. 홀로 깨어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붕은 고공에서 홀로 살지 않는다. 다시 지상으로 착지한다. 그리고 다시 물고기가 되어 심연으로 내려갈지도 모른다.
대붕은 홀로 깨어있는 자다
"근진에서 노닐어 아무 장애가 없다면 모두 성인인 것이지. 어찌 머리 셋과 팔 아홉을 지니고 멀리 사람과 벌레의 바깥으로 벗어나 있단 말인가? 오로지 사람과 벌레의 구분에 편안하되, 자기 한 사람의 정량을 기준으로 그것들과 크고 작음을 다투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어디를 가든 소요하는 것이 된다."
─원중랑, 역주 원중랑집 5, 광장, 소요유
이미 짐작했을 터, 장자에게 대붕은 최종의 도달점, 즉 최고의 경지가 아니었다. 대붕이 된 이후에도,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 본 이후에도 대붕의 변신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붕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다른 존재로 살기 위해 북쪽의 바다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남쪽 바닷가로 끊임없이 이주했다. 그러니 대붕이 되는 것 자체는 중요치 않다. 다르게 살아가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중요할 뿐이다.
현실이 너무 틀에 박히고, 지나치게 부조리하고, 때로는 갑갑하게 느껴져서 다른 세계를 욕망하고, 다른 존재가 되기를 꿈꾸는가? 그렇다면 마음을 낸 그 즉시 다르게 일상을 구성하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신체의 리듬과 마음의 결을 만들어 보시라. 용문 협곡의 그 거칠고 사나운 물살을 거슬러 마침내 용이 된 이무기처럼, 해양적 존재의 타성을 버리고 지상적 존재의 중력을 익혀낸 곤 물고기처럼, 지상적 삶의 안온함과 관성을 떨치고 초월을 위해 경쾌한 몸을 만들어낸 대붕처럼, 그렇게 매순간을 다르게 살아보자.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종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비상할 것이다.
일찍이 루쉰이 말하지 않았는가?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 절망은 자포자기하게 만들고, 실천 없는 희망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그러니 오직 마음 낸 그대로 살아갈 뿐이다. 초발심을 일상에서 실현하기! 매순간 비일상적 탈주를 일상화하기! 대붕이 되어야 대붕처럼 사는 게 아니라, 대붕처럼 살아야 대붕이 된다.
길진숙(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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