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한뼘 양생』 리뷰 - 타자의 돌봄이 곧 나의 돌봄이다

by 북드라망 2024. 11. 19.

『한뼘 양생』 리뷰 - 타자의 돌봄이 곧 나의 돌봄이다

황지연(사이재)

                                                                             

여기 독박육아 아니 독박돌봄을 자처한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문탁네트워크의 수장 문탁 선생님이다. 주위에서 뜯어 말렸음에도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어머니를 10년 동안 지극정성 아니 지극당연함으로 모셨다. 허나 그것이 낭만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를 좌충우돌 간병하면서 ‘노년의 실존 양식’에 대하여,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곡진하게 묻고 그 생각을 여기 이 책  『한뼘 양생』에서 풀어냈다. 

 “오늘 밤 죽게 해주세요.”

 

저자의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딸 앞에서 하던 이 말.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라고 버릇처럼 외쳤지만 이내 그 젊은 주인공은 늙어서 “오늘 밤 죽게 해주세요”라고 외치는 사회적 목소리처럼 내게는 다가왔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 젊음은 결국 노쇠하고 병이 들어 죽음의 문턱으로 들어가지만 그것은 지극히 우주의 운행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운행을 자본적 사고방식과 현대의학은 눈앞에서 잽싸게 치워버리고 나이듦과 병듦을 수치로 여기는 풍토로 만들었으며 비참하고, 고독하고, 약점인 것처럼 우리를 쓸모없는 사람이라 여기게 만든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고립 속에서 고독사를 할지언정 남에게, 가족에게조차도 돌봄 받을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저자는 이 돌봄받을 권리를 회복하고자 한다. 누구나 돌봄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자기의 사람(공동체)을 힘껏 돌보고 지키는 일’을 꺼리지 않고자 한다. 


이렇게 저자 또한 자신의 어머니를 힘껏 돌보려 애썼다. 허나 그것은 한 인간을 돌보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인간이 한 사회로부터 형성된 그 모든 것을 돌보는 것이기도 하다. 젊을 때 돈을 벌고 자식들을 키우느라 바빠서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손상을 결여와 비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어머니’는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한 준비가, 생로병사를 나름대로 겪어 낼 자기 언어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사회가 나이 듦을 수치로 여기게 만드는 풍토도 있었다. 하여 이런 사회로부터 ‘통치당하지 않는 기술’을 우리는 한뼘 한뼘 연마해야 한다. 그야말로 한뼘 양생족이라는 새로운 노년의 탄생이라고나 할까?


저자는 운동권 출신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문제처럼 형이상학적 외침을 추구하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소박한 아파트에서 공동체를 시작했고, 자기 동네에서 동네 사람들과 책 읽기 모임을 가졌으며, 개념과 관념에 빠진 시간도 있었지만 결국 실질적인 삶에 대해 실존의 구체적인 면모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책의 곳곳에 묻어난다. 


책의 제목에 있는 ‘양생’은 그 실마리로서 그것을 화두로 사회구조적인 문제, 가부장제의 문제, 현대의학의 문제 등등을 풀어내며 우리에게 놀라운 통찰력을 선사한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낭만을 잃지 않았다. 낭만을 걷어내니 진정한 낭만이 내게는 느껴졌는데 가령 이런 대목이었다. 

“낭만적 사랑의 가장 사랑하는 단 한 사람(only one)이라는 판타지를 걷어 내면 모든 사람은 다양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며 살아간다.”  (이희경, 『한뼘 양생』, 191쪽)


‘양생이 개념이나 규정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저자는 이제 독자에게 곡진하게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