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식탁 위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하는 기호-요리학』 서평 (2)
신화, 해석을 기다리는 식탁
강평옥(인문공간 세종)
인류의 무의식을 담다
『신화의 식탁 위로:레비-스트로스와 함께하는 기호-요리학』은 오선민 선생님의 다섯번째 책이다. 이번에도 역시, 실망시키지 않고 제목이 길다. 지난 작품을 보면 긴 제목 속에 책의 핵심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뚫어져라 제목을 쳐다본다. 신화를 요리해서 식탁에 올린다고? 신화에는 시공간, 인종, 성, 나이를 막론하고 인류의 원형적 무의식이 담겨있다. 신화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고, 지금까지 수집된 양이 어마어마하다. 먹는 이야기가 많지만, 그렇다고 무의식을 해석의 식탁으로 곧바로 올릴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가 채집한 신화는 체계적이지 않고 산발적이고 뒤죽박죽이다. 레비-스트로스는 1950년부터 21년간 813편의 무문자 사회의 신화를 채집해서 해석했다. 이렇게 말하면 신화의 방대한 정도에 대한 느낌이 오지 않는데,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은 총 4권, 이 중 우리나라에 번역된 1권~3권 분량이 총 2,100여 페이지이고 번역되지 않은 4권은 1권~3권에 맞먹는 분량이라고 하니 거의 총 4,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이다. 입이 떡 벌어지는 분량인데, 레비-스트로스는 4권을 마치고 ‘드디어 신화학의 입문서가 쓰였다’고 했다. 『신화학』에 수집된 방대한 이야기는 신화의 극히 일부분인 셈이다. 그만큼 인류 무의식의 세계는 깊고 넓은 바다이다. 인류의 원형적 무의식을 신화를 통해 맛보기 하고 싶다.
해석이 필요한 기호학 요리
신화의 내용은 꿈을 꾸듯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가 끝인지도 모르게 끝이 나고, 뱀이 인간이랑 결혼해서 갑자기 하늘의 별이 되더니, 그걸 지켜보는 거미의 불안한 눈빛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응?! 누군가 태어나서 간난신고를 하다가 결국에는 죽는, 우리에게 익숙한 재현의 언어를 가지고는 무의식으로 차려진 식탁의 세계에 초대될 수 없다. 바로 『신화학』을 폈다가는 짧은 시간 안에 깊은 잠에 빠져들기 쉽다. 하지만 오선민 선생님의 친절한 기호 요리 시범, 레시피를 잘 따라가면 해석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신화 요리는 불맛이고, 요리사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기호’ 언어로 되어 있다. 같은 돼지고기 재료라도 요리법에 따라 굽고 삶고 튀기면 삼겹살 구이, 보쌈, 탕수육이 되는 것처럼 신화는 해석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기호 해석을 하면 허무맹랑한 이야기, 엄두가 나지 않는 방대한 더미로만 보이던 이야기로 레고 블록 쌓기나 찰흙 놀이처럼 무한히 많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기호는 현실의 재현 언어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고 최대한 그 의미를 풍요롭게 해석한다. 예를 들어 꿀은 달콤한 간식, 약, 해장에 쓰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독으로 쓰이기도 해서 어린아이에게는 금지 식품이다. 꿀은 이처럼 먹는 상황, 수확 장소와 시기 등에 따라 약 또는 독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낳는다. 이야기의 맥락에 따라 꿀이라는 재료는 기호적 해석이 필요하다.
대칭적 사고
신화를 요리해서 누구와 어떻게 나눠 먹어야 할까?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를 인류의 무의식이 산출하는 야생의 과학이라고 한다. 야생의 사고란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공간 너머를 포함한 전체를 치우침 없이 사유하는 사고이다. 치우침이 없다는 것은 지금 살고 죽는 것의 전후, 공간 너머를 시공간으로 연결하고 시야를 확대하여 우주 차원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야생의 사고가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현실에서는 그대로 두면 도처에서 자신에게 좋은 것만, 맛있고 화려한 음식만 바라는 즉, 제때,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비대칭이 일어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인류는 비대칭이 될 수 있는 우주 질서를 신화를 통해서 매 순간 무의식적으로 균형을 맞추려는 대칭적 사고를 한다. 신화는 먹는 이야기를 통해 나의 일, 너의 일이 따로 있지 않다고 한다. 그렇기에 신화는 내가 먹는 타자가 나와 무관하지 않기에 관계를 맺기 위해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모두의 일을 생각하라는 윤리를 말한다.
신화는 남/여, 밝음/어둠, 높음/낮음 등 다양한 이분법적 기호가 상호작용하는 공생 관계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밝음은 어둠과 상반되게 보이지만 밝음은 어둠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밝음만 있거나 어둠만 있어서는 밝음도 어둠도 있을 수 없다. 밝음과 어둠이라는 이분법적 기호는 밝음과 어둠이 함께 있을 때만 가능한 상보적 관계이다. 한 신화에서 사람들은 고구마 수확에서 종을 다변화해 옥수수 케이크 제조까지 하지만, 멈출 줄 모르고 더 많은 옥수수를 생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이에 하늘은 청년들을 급격하게 늙게 만드는 것으로 경고한다. 늙은이가 된 청년은 생산량을 늘리고 싶어도 늘릴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축적을 멈추게 된다. 야생의 사고에는 축적이 없고, 남기지 않을 만큼 수확하며 절제한다. 보로로족의 신화에는 옥수수 정령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추수감사절 풍요에 대한 감사뿐 아니라 작물을 죽인 것에 대한 무례함을 사과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는 재배는 내가 필요하다고, 내가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고, 우주에 공손한 마음과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사고가 담겨 있다.
공생하는 윤리 지침서
신화의 구체적인 지침으로는 네 몫을 해라, 남을 도와라, 제때와 제자리를 찾아라, 자기 자리를 고집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변용해라, 자기의 고유성을 잃지 않도록 적당한 선에서 멈춰라, 절제해라(한계를 알아라, 축적하지 마라), 겸손해라(대상을 가리지 말고 차이를 인정해라), 인사 잘해라, 감사해라 등이 있다. 인류의 원초적 무의식은 맛있는 것을, 많이 먹는 탐욕으로 편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먹을 때 예의를 지켜 공생하는 것으로 균형을 맞추려 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에 등장하는 신화는, 서구의 입장에서 보면, 문자도 ‘없이’ 문명화되지 ‘않은’ 원시 ‘야만인’들의 말도 되지 ‘않는’ 구술 이야기이다. ‘없다’, ‘않는다’는 말속에는 기준 미달이라는 부정이 있다. 이때의 기준이란 자신들이 정한 것으로서, 야만에서 문명으로의 진보라는 시계열적 진화를 뜻한다. 하지만 원시사회는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문자를 만들지 못한 것이 아니라, 문자를 의도적으로 거절했다고 한다. 문자가 기억을 재현의 방식으로 보존하고 단일한 척도를 가지기 때문이다. 서구사회의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그들도 인류의 하나로서 비록 그들이 현실에서는 좋은 것만, 자기만 편중된 삶, 축적하는 삶을 살더라도, 그들의 무의식은 전체의 관계 맺기를 위해 균형을 맞추려 한다. 신화는 같은 재료라도 맥락에 따라 요리를 달리할 수 있다. 해석하는 만큼 해석이 달라지고, 그 크기만큼 세계를 이해하고 볼 수 있다. 신화는 우리의 해석을 기다리는 식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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