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리뷰 ④
어느 광인(狂人)의 철학
박규창(규문)
아는 사람, 특히 함께 생활하는 사람의 책일수록 감개가 무량해진다. 왜냐하면 그가 어떻게 글을 썼는지 직접 봤기 때문이다. 민호와 나는 규문에서 함께 읽고 쓰고 밥 먹고 등산하고 축구하며 일 년을 보낸다. 거의 모든 순간을 함께하니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숟가락을 쥘 때 손 모양은 어떤지, 화장실에 얼마나 오래 있는지, 특히 비염이 심해지는 날씨는 언제인지 등등. 당연히 이 책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가 탄생하는 과정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모든 글쓰기가 그렇지만, 민호의 루크레티우스와의 만남도 순탄하지 않았다. 피부가 노랗게 떠서 오면 글을 쓰기 위해 어떤 밤을 지냈을지 상상됐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 악착같음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내심 저렇게 무리하면서까지 글을 쓰는 게 이해되질 않았다. 글 한 편 못 쓴다고 세상이 망하는 것도 아니고, 글 한 편 쓴다고 삶이 확 바뀌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민호 본인이 쓴 것처럼 루크레티우스와의 만남은 “결코 피뢰침과 번개가 아니었던지라”, ‘지금’ ‘꼭’ 이 만남을 이어가야만 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29쪽) 물론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글을 쓰지 못하는 건 매우 창피한 일이다. 하지만 몇 년 공부하고 말 것도 아닌데 매번 글쓰기에 사활을 걸 필요도 없지 않을까?
그러나 책을 읽고 나니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아마 내가 민호의 악착같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것과 비슷하게, 민호 자신도 왜 이렇게까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이해해야만 시작하고 지속할 수 있는 반면, 어떤 일들은 이해되지 않음에 기반해야만 시작하고 지속할 수 있다. 민호에게 글쓰기는 후자에 해당했던 것 같다. 이해되지 않음은 글쓰기를 중단해야 할 이유라기보다 글쓰기를 이어나가는 동안에만 나타나는 징후였다. 또한 이해되지 않음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내내 누구나 느끼는 신체적 신호이기도 하다. 이해되지 않음을 붙잡고 글을 쓰는 민호의 모습에서 광인(狂人) 루크레티우스의 흔적이 느껴졌다.
루크레티우스는 ‘광인’이다. 그러나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다수성 및 주류성에 대립”하며 떠돌았던 이방인이라는 의미에서의 광인이다.(42쪽) 루크레티우스가 살았던 시대의 로마는 제국으로서 더없는 번영과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번영과 풍요를 클로즈업하면 종교적 미신과 아수라장이 된 정치판, 끊임없는 전쟁과 반란이 보인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시대였던 것이다. (아마도 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루크레티우스는 이러한 로마 한복판에서 남들과 똑같이 살 수 없었다. 오히려 “여기서 아무런 문제 없이 정상적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아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아닐까?”(46쪽) 그는 모든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이해되지 않음을 붙잡아 질문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영혼을 이토록 뒤흔드는 흥분과 근심은 어디서 오는 걸까?”
답은 무지(無知)다. 그동안 추구해왔던 것들이 외려 “중독과 폭력, 체념과 미신의 굴레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 이러한 무지는 인간 삶을 포함해 사물이 존재하는 원리에 대한 무지와 맞닿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건 ‘원자’와 ‘허공’과 ‘원자들의 만남’ 이 세 가지다. 개체로서의 ‘나’는 원자의 결합 덕분에 잠깐 ‘나’인 것처럼 있는 것이고, ‘나’의 해체는 원자가 다르게 결합하는 사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를 실체화한다. 오늘 아프고 불편함을 느꼈던 것처럼 내일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지 않을 괴로움을 먼 미래에까지 투영한다. 즉, 사물의 본성에 무지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고, 쾌락에 탐닉하며, 스스로 정념(pathos)에 더욱 예속되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에 기반한 사유는 이러한 무지와 싸우는 무기였고, 병들었던 영혼을 돌보고 치료하는 의술이었다. 아무리 부유해지고 유명해져도 무지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두려움과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따라서 그에게 무지를 극복하는 것보다 시급한 일은 없다. 루크레티우스가 사람들에게 ‘광인’으로 여겨진 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좋음(善)을 따르기는커녕 우리를 중독시키고 병들게 만든다고 끈질기게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지와 맞서 싸우는 이 광인의 탐구는 너무나도 지성적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후대에도 그의 사유를 배우는 것일 테다. 그리고 약 2,000여 년이 흘러 공부하는 청년 민호가 광인 루크레티우스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시대와 조건은 다르지만, 지금 우리도 나름대로 풍요와 번영을 누리고 있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이용해 언제 어디든 쉽게 여행을 떠날 수도 있고, 한 번의 클릭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물을 ‘상품’으로 구매할 수 있다. ‘행복은 마르지 않는 부유함에 있다’는 생각은 거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므로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주식과 코인으로 인생 역전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풍요와 번영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갖 탐욕과 착취로 얼룩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선진국으로서 ‘녹색’의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건 아프리카를 비롯해 이른바 개발도상국에게 환경 오염을 외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껏 전기를 이용할 수 있는 건 밀양처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의 삶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공학도로서 나름의 정의감과 사명감을 가졌던 민호가 환경공학과를 자퇴하기로 결심한 건, 지금 우리의 욕망을 문제 삼지 않고 오염 수치를 낮추고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만으로 환경 문제를 사유하기란 전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처럼 민호도 사람들이 마냥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따르기보다 질문하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원자력은 과연 친환경 에너지인가? 많은 재산이 과연 우리의 삶을 책임져 줄 수 있을까? 삶의 풍요는 과연 물질적인 것으로 규정될 수 있을까? 사랑이란, 우정이란,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등등. 그런데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보다 질문을 품고 답을 내리기 위해 헤매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청년’으로서 우리 삶에는 그동안 겪은 사건보다 앞으로 겪을 사건들이 더욱 많을 것이고, 그 중에는 분명 우리의 알량한 경험과 앎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건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은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다 놓는다. 미로 같은 삶을 헤매는 것은 모든 이에게 닥친 공통된 필연이다. 하지만 이 필연이 우리가 앞으로 두려워하고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사건들을 다르게 겪어내기 위한 노력은 그 자체로 “‘그래도 다시 한번!’을 외치게 해줄 근기를 기르는 일”이 된다.(265쪽) 근기가 충분히 길러진 사람이라면 이 미로를 두려움 없이 용기 있게 헤맬 수 있을 것이다. 공부하는 청년으로서 민호는 매일매일 글을 쓰면서 광인 루크레티우스로부터 이러한 용기를 배웠다. 그리고 나는 종종 두렵고 무력해질 때마다 이 책을 펼쳐서 민호가 배운 용기를 나누어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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