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사주명리는 미신인가? 과학인가?

사주명리는 사주명리다!



“북드라망에 <사주에 대한 오해와 이해> 느낌으로 글 하나 써 주실 수 있을까요. 보통 미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식전환용 글이 필요한데” 얼마 전 받은 문자다. 어차피 2주에 한 번 북드라망에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별 고민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답문을 보냈다.


아마도 이런 부탁이 들어온 이유는, 내가 과학 공부를 하고 있는데다가 몇 차례 의역학 공부를 했었기 때문인 듯했다. 그러니까 내가 추측한 청탁자의 요구는 ‘사주는 미신이 아닙니다. 과학입니다’였다. 나는 이런 요구를 마음에 두고,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학이 가진 미신적 측면을 얘기하고, 과학과 미신의 불분명한 경계를 말할까.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을 사주명리적 차원에서 얘기해 볼까. 아님 서양 물리학의 상호작용으로 오행을 해석해볼까. …… 그러다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왜, 과학을 끌고 와 사주명리를 이야기해야 하지?’


사주명리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은 극과 극이다. 어떤 이에게는 의지가 되고, 어떤 이에게는 미신으로 느껴진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과학이 인정한 동양 사상


1960년대, 서양 과학계는 동양 사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독특한 세계상을 보여주는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 그리고 당시 사회·정치적 분위기와 기계론적 과학에 대한 반성이 만난 결과였다. ‘신과학 운동’이라 불리는 이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다. 여기서는 신과학의 배경이 불교 사상이나, 동양의 기(氣), 도(道)의 세계상과 매우 가깝다는 정도만 아는 걸로도 충분할 듯싶다.

신과학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서양과학의 자기반성은 신랄했다. 그동안 과학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편협한 학문을 해왔는지를 돌아봤다. 그들은 이론들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동양 사상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자연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상을 그려냈다. 이런 흐름은 동양의 자연관이 서양과학에 의해 입증되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신과학 운동 덕분에 동양 사상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간 서양 과학에 주눅 들어 살던 동양 사상 연구가들에게는 신나는 소식이었다. 사람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거 보라고, 결국 동양 사상이 맞지’라고. 동양의 자연관이 비과학이네, 미신이네 깔보던 서양 과학계가 이제야 제정신을 차린 듯 보였다. 일명 신과학 총서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도 그런 책들을 보며 뿌듯해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잠깐! 뭔가 이상하지 않으신지. 그간 천대받던 동양 사상이 새롭게 읽히게 된 일은 참으로 고무적이다. 그런데 만약, 만약에 말이다, 시간이 흘러 서양과학이 동양의 자연관은 역시나 틀렸었다고 입증하면 어떡할까. 그럼 그 때가서 동양 사상은 다시 주눅 들어 살아야 하는 걸까. 


 사주명리는 과학이 아니다


다시 나에게 묻게 된다. ‘왜, 과학을 끌고 와 사주명리를 얘기해야 하지?’ 좀 더 고민해보니, 과학은 이미 서양과학이다.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서구적 사유의 전통에서 태어났다. 그 사유 속 자연은 동양의 자연과는 완전히 다르다. 보는 세계 자체가 다르기에 취합하고 분석할 데이터 자체가 다르다. 과학이 필요로 하는 요소들을 동양의 자연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주명리는 미신이 아니지만, 과학도 아니다. 아니, 과학이어서도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러고 나니 막막해졌다. 나는 사주명리를 잘 모른다. 사주명리 강의를 들었고, 날림으로 동의보감을 읽었다. 그러고 보니 몇 개월간 의역학 공부를 한 적이 있긴 하다. 감이당 대중지성이 생기기 전, 일명 ‘장주’라는 프로그램에서 의역학 공부를 했었다. 그것도 2년 전 일이니, 지금 머릿속에 그닥 남아있는 게 없다.(-_-;;)

나는 사주명리가 서양에서 출발한 과학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저런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이거다. 과학을 주고 공부하는 나에게 어렴풋이라도 보이는 사주명리의 독특성을 이야기하는 것. 그럼으로써 과학과 사주명리가 서로의 길을 가면서도, 무언가 짜릿한 만남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와 함께.


 과학과 사주명리가 보는 세계


변화와 운동은 연속적이다. 물의 흐름, 시간의 흐름 등을 머릿속에 그려보시면 좋을 듯싶다. 과학은 이런 흐름을 분절해서 사유한다. ‘이것’과 ‘저것’이라는 요소들을 만들고, 그 요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으로 힘이나 운동, 변화를 접근한다. 이렇게 요소를 딱 규정하기에, 별다른 혼란없이 사용될 수 있다. 또 수학을 이용할 수 있어서, 높은 규칙성과 예측성을 일반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계 또한 명확하다. 우선 흐름을 요소로 분절한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쭈우욱~ 연속된 것들을 분절할 수 있는 방법은 말 그대로 무수히 많다. 한 때, 물리학에서 기본 입자라는 강입자가 백 개도 넘게 발견된 적이 있었다. 백 개가 넘는 게 기본 입자라는 사실에 물리학계는 당황했고, 다시 더 근본적인 요소를 찾아 들어갔다. 


요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흐름의 분절도 중요하다. 그래서 항상 분배의 문제가 급선무다. 요소들이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가 관건이 된다. 순환도, 분배된 요소들을 이리저리 돌리는 구도다. 한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유행했는데, 서양 사유에서 정의란 기본적으로 이런 소유의 분배다. 한편, 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에는 ‘매개’가 반드시 요청된다. 매개 없는 직접적 만남은 서양 사유에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반면 사주명리는 흐름 그 자체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천간지지나 오행이라는 규정이 있지만, 그건 분배된 속성을 가진 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것들은 분절 이전의 힘들을 표현한다. 일단 할당받은 속성을 가지고 이리저리 돌리는 게 아니라, 순환함으로써 모이고 흩어지는 매듭들을 표현한 게 천간지지와 오행이다. 그래서 매듭들을 딱 떨어지게 분절하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흐름 속에서 유연하게 매듭들을 풀고 묶는 능력이 중요하다.
 
오행의 상생·상극이라는 것도, 요소들‘사이’의 운동이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오행이라는 힘들의 흐름이다. 그래서 둘 사이를 매개하는 것 따위는 필요 없다. 직접적으로 부딪히고,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다. 천간지지 역시 마찬가지다. 요소를 규정하기보다는 힘들의 흐름이 먼저이기 때문에, 다양한 합·충이 있고, 천간지지의 배치가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사주명리는 복잡하고 유동적이어서 규정과 예측이 많이 흔들린다. 그러나 힘들이 만드는 다양한 관계의 장을 읽는 게 관건인 사주명리는 연속적인 흐름으로서 자연을 그 모습 그대로 이해하는 데 적합하다.


오행을 표현한 작품.


 과학과 사주명리의 앎의 구도


과학은 주체-객체의 분리된 구도를 전제한다. ‘인간인 주체’가 ‘대상인 객체’를 관찰하고 조직한다. 그래서 자연을 이용하는 높은 기술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또 대상 자체를 세분화하기 때문에, 전문화된 앎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주체라는 인간에 대한 앎은 미비하다. 화학기호만 해도 백 개가 넘고, DNA의 복잡한 서열을 읽어내지만, 정작 인간 자신의 삶이나 감정에 대해서는 너무 빈곤하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심리학이 과학을 자처하고 나섰고, 뇌과학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심리학이나 뇌과학이란 게 좀 마뜩치 않다. 우선 너무 개인적이고, 협소하다. 성격형성에 있어서는 어릴 때 가정에서의 양육이 절대적이다. 사람의 특성을 알아내는 여러 지표들은, 이를테면 IQ, EQ 등으로 다 따로따로다. 과학화된 다면적 심리검사로 유명한 MBTI도 그 사람이 가진 성격이 무언지 분석하는 게 전부다. 뇌과학도 한 사람의 머릿속에만 관심이 있다. 게다가 그 머릿속을 이런저런 지역들로 나누고, 그 지역들의 특성을 규정하는 작업이 주를 이룬다.
 
이처럼 인간 자신을 대상화하고, 관찰하고, 조작하는 게 앎의 기본 구도다. 그래서 전문화를 자랑하지만, 그 앎 자체는 매개를 필요로 한다.  스스로 과학적 검사를 할 수 없고, 어딘가를 찾아가야 하며, 전문가의 도움이 꼭, 반드시 요청된다. 스스로의 배움보다는 교육을 ‘받는’ 게 의미 있는 일로 여겨진다.

사주명리는 주체-객체 구도도 없고, 객체들을 세분화해서 다루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학문적 전문성이 떨어져 보인다. 거기다 자연을 대상화해서 조작적으로 다루는 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현대의 기술력과는 거리가 멀다. 대상을 어떻게 할까의 문제보다는 자기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할까가 사주명리의 중심이다.
 
더욱이 인간은 자연이고, 자연은 인간이다. 요컨대, 인간이나 자연을 대상화해서 주체-객체를 결정해 놓고 출발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이란 대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 자신을 바꿈으로써 자연이 바뀐다. 또한 자연에 대한 앎이 곧 인간에 대한 앎과 공명한다. 자신을 공부하는 게 자연에 대한 공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공부와 변화에서도 어떤 매개 없이 스스로에게 배움과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 중요하다.  


 사주명리여~ 네 갈 길을 가라, 과학이야 뭐라든!


과학이든, 사주명리든 모두 그것들이 가진 장점이 곧 단점이다. 단점은 장점으로부터 나왔고, 장점은 단점의 원인이다. 더욱이 과학과 사주명리는 그 장점이 서로 극과 극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과학은 동양의 자연을 이해할 수 없었고, 미신처럼 취급했다. 

그러나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미신인 것은 아니다. 미신이란 어떤 것이든 스스로 뜻을 알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믿고 의존하면 미신이다. 그렇기에 과학이기에 미신이 아니고, 사주명리이기에 미신인 것이 아니다. 이해 없는 믿음과 그로 인한 예속 상태를 만드는 게 미신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신들만이 자연에 대한 진리라며, 믿음을 요구하는 과학이야말로 미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미신과 미신 아님은 그 앎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느냐, 아니면 그 앎에 의해 사용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니 ‘사주명리가 미신인가’ 대신, ‘무엇이 사주명리를 미신으로 만드는가’를 물어야 한다. 과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한 어떤 앎도 미신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과학을 기준삼아 사주명리가 미신인가 아닌가를 따지지 말자.  대신 둘의 독특성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게 훨~씬~ 남는 장사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지만, 과학과 사주명리는 각각 독특한 앎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기가 불가능하지만, 반면에 그 둘이 부딪칠 때 진정 새로운 뭔가가 창조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슷한 것들끼리 만나면 결국 그것과 비슷한 것만 나오지만, 완전히 다른 애들이 만나면 그 둘도 아닌 새로운 무언가가 창조가 될 수 있다. 이게 요새 유행하는 ‘하이브리드’, 즉 잡종이다. 나는 과학과 사주명리가 이런 잡종이 됐으면 좋겠다. 그러니 ‘사주명리여~ 네 갈 길을 가라, 과학이야 뭐라든!’
 

오행과 팝아트, 이모티콘의 만남!


둘 중 하나가 주연이고 다른 하나가 조연이 되는 대신에, 시끌벅적 수다를 떠는 이웃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통해 지지받고 이해받는 대신에, 서로를 참조하며 각자가 자신을 더욱 독특한 잡종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이러기 위해서라도 자기 말고는 몽땅 미신이라는 과학의 그 못된 입버릇부터 고쳐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그래도 때로 멋지고 훌륭한 과학자들도 있다. 양자론의 불확정성 원리를 만든 하이젠베르크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가 했던 말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인류의 사상상에 있어서, 두 개의 다른 사상의 조류가 만나는 그러한 지점에서 가장 풍요한 발전이 자주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마도 거의 전적으로 타당한 얘기길 것이다. 이러한 조류들은 인류 문화와 전혀 다른 분야에, 상이(相異)한 시대와 상이한 문화 환경과 상이한 종교적 전통에 그 근원을 두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 둘이 실제로 만나는 일이 이루어진다면, 행여 그처럼 긴밀히 서로 연결을 맺어 하나의 진정한 상호 작용이 일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새롭고도 흥미진진한 발전이 곧 뒤따라 전재될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으리라.


─하이젠베르크 


_ 신근영(남산강학원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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