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능력, 한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움직이는 일
글이란 뜻을 드러내면 족하다.
글을 지으려 붓을 들기만 하면 옛말에 어떤 좋은 말이 있는가를 생각한다든가 억지로 경전의 그럴듯한 말을 뒤지면서 그 뜻을 빌려 와 근엄하게 꾸미고 매 글자마다 엄숙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사람은, 마치 화공(畵工)을 불러 초상화를 그릴 때 용모를 싹 고치고서 화공 앞에 앉아 있는 자와 같다. 눈을 뜨고 있되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으며 옷의 주름은 쫙 펴져 있어 평상시 모습과 너무도 다르니 아무리 뛰어난 화공인들 그 참모습을 그려 낼 수 있겠는가.
글을 짓는 일이라고 해서 뭐가 다르겠는가. 말이란 꼭 거창해야 하는 건 아니다. 도(道)는 아주 미세한 데서 나뉜다. (……)
글을 짓는 건 진실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글을 잘 짓고 못 짓고는 자기한테 달렸고, 글을 칭찬하고 비판하고는 남의 소관이다. 이는 꼭 이명(耳鳴)이나 코골이와 같다.
- 연암 박지원, 「『공작관 글 모음』孔雀館文稿 자서」, 박희병 옮김, 『연암을 읽는다』, 돌베개, 2006, 383~384쪽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모방과 표절 사이를 헤매고, 새로움과 괴벽 사이에서 길을 잃곤 한다. 그래서 창작의 고통이 주는 절규가 이어진다. "대체 그러면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나는 어찌할 것인가? 그만두어야 하는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다. 왜? 글쓰기는 원초적 본능이자 소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사유의 모험을 시도한다. 고(古)와 금(今), 신(新)과 구(舊), 그 '사이'에 대하여. "아! 옛것을 배우는 사람은 형식에 빠지는 것이 병이고, 새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법도가 없는 것이 탈이다. 만약에 옛것을 배우더라도 변통성이 있고, 새것을 만들어 내더라도 근거가 있다면 현대의 글이 고대의 글과 마찬가지일 것이다."(박지원, 「초정집서」) '법고창신'이 도출된 현장이 바로 여기다.
- 고미숙,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 다산과 연암 라이벌평전 1탄』, 북드라망, 2013, 358쪽
인터넷 글쓰기가 일반화되면서 생겨난 변화 중에 가장 큰 것은 글의 호흡이 짧아졌다는 것과 재기발랄하거나 감성적인 글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예전 아날로그 시대의 글쓰기가 나 자신과의 대면이라는 성격이 짙었다면, 지금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는, 설령 그것이 블로그의 '일기'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글일지라도, 남을 향해 있는 듯 느껴진다는 점이 눈에 띈다. 늘 어디서나 '나'를 읽는 '남'이 있는 글쓰기, '좋아요'를 향한 글쓰기가 가져온 긍정적인 점들도 물론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 나에게 이 글쓰기의 단점은 '좋아요'를 향한 '멋부림'(그것이 유머든, 패러디든, 감상적인 것이든)이 글쓰기의 본래적 가치(라고 나는 생각하는) 자기와의 대면을 피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드물게 유머러스하거나 톡톡 튀는 글솜씨를 타고났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어떤 일이든 타고난 사람은 드문 것이 세상사의 법칙 아니겠는가. 대부분은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튀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개인적인 활동에서 이루어지면 사실 누가 뭐라 할 일이 전혀 아니지만, 일을 할 때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예전에 알던 H는 타고나기를 재기발랄과는 담 정도가 아니라 철벽을 쌓았나 싶을 만큼 거리가 멀었던 친구였다. 그런 H는 어쩌다 글을 써서 홍보하는 업을 가지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늘 재기발랄함으로 승부하려고 했다. 인터넷만 열면 이곳저곳에 깔려 있는 그 수많은 재미난 표현이나 카피처럼 쓰고 싶어했지만, 결과는 늘 '재작성'이었다. 사실 그의 강점은 오히려 담백한 글쓰기에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좋은 점보다는 '튀어 보이게 쓰지 못하는' 단점에만 매달린 결과, 자신감만 점점 잃어가고 말았다. 자신만의 느낌을 잃어버리고 자꾸 남들에게 인정(환호, 탄성)받는 억지 감정을 꾸며 내려다(이상하게 이런 건 정말 자신을 제외한 남들 눈에는 기가 막히게 잘 보인다) 자신에게 실망만 거듭하며 스스로를 못 살게 구는 H의 모습은 안쓰러웠다.
사실 글쓰기에서 모방은 중요한 훈련이다. 유명한 소설가들이 습작 시절, 선배 작가들의 좋은 글들을 베껴 썼듯이, 또 더 거슬러 올라가 필사를 하면서 글쓰기를 배웠던 과정이 있었던 것처럼. 중요한 건 한두 군데 기교를 모방하는 건 훈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글이란 본래 춤이나 음악, 그림처럼 자기를 표현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만들어 낸 표현도구이고, 우리가 쓰고 싶은 건 궁극적으로 내 생각, 내 감정이고, 어떤 종류의 글이든 시작은 역시 '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두 가지의 기교를 연마한다고 해서 내 생각과 내 감정을 대면하게 될 리는 만무하다. 물론 요즘처럼 남의 생각, 남의 감정이 자기 손 안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수시로 쏟아지는 시대를 살면서 '자기 생각', '자기 감정'과 대면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더 많은 정보가 더 좋은 글을 만들어 줄 것 같은 유혹에도 훨씬 더 이끌리기 쉽다.
하지만 역시 마라톤도 100미터 달리기부터 시작되듯이, 어떤 피아노 소나타도 도레미를 익히는 데서부터 시작되듯이, 꼭 성취하고 싶은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뭔가를 즐기는 경지에 오르기 위한 방법에는 기본기를 익히는 노력과 시간, 두 가지밖에는 없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창신'(創新)에 몰두하는 박제가를 염려하여 연암이 주었던 조언, "새것을 만들려고 기교를 부리는 것보다는 옛것을 배우려다가 고루하게 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라는 말은, 당연히 고루한 게 낫다는 것이 아니라, 기교에만 새로움에만 몰두하지 말고 '법고창신'(法古創新)하라는 뜻이다. 기본기를 익히고 거기에 새로움을 더할 수 있다면 말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새로움'을 더하기까지는 부족하더라도 기본기가 탄탄하다면, '나와의 대면'과 '진실된 글쓰기'는 충분히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글은, 새로움이 주는 다수의 탄성을 불러오지는 못할지라도, 한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움직일 수는 있다. 이 움직임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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